소설리스트

DIY천재의 힐링생활백서-157화 (155/159)

157. 소년기(139) - #마무리

“생각보다 간단하네.”

라그나가 소멸 어쩌고 하기에 까다로운 줄 알았는데, 정령을 구출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냥 데모스의 기운이 얽히고설킨 정령들을 떼어내면 되는 문제였다.

어릴 적 문방구에서 자주 사 먹었던 달고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별이니 하트니 비행기니.

틀에 찍은 모양에 맞춰서 떼어내는 그거 말이다.

-그, 그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니······. 여, 역시 왕의 친구시군요.

“뭘요.”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근데, 라그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나였기에 가능한 방법이긴 했다.

정확히는 데모스의 힘이 아니라면 떠올릴 수조차 없는 방법이라고 해야겠지.

물론 방법이 간단할 뿐이지, 앞서 달고나의 예시를 든 것처럼 나름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긴 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라그나의 몸을 뒤덮었던 데모스의 기운과 정령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휴우, 이걸로 일단 안심이네. 이제, 남은 건······.”

나는 숲 쪽을 쳐다봤다.

다들 머리카락 한 올 안보이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 감각에는 다수의 기척이 감지됐다.

“하여간.”

여긴 위험하다고 그렇게 얘기를 했건만, 꼭 저렇게 말을 안 듣는 사람이 있다니까.

하물며 그 숫자가 족히 수백은 넘어 보이는 게 모든 에프렐이 이곳으로 모인 듯했다.

아까 라그나와의 일전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부터 모여들더라니.

특히 내가 라그나와 엎치락뒤치락할 땐 몇몇 아는 사람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울러 작게나마 들려오는 대화 소리로 추정컨대, 다들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하기야.

아까 크나프 씨가 행한 의식은 단순히 정령을 소환하는 게 아니다.

굳이 정의를 내리자면 빌린다고 표현하는 게 옳겠지.

마법진이 맹약자와 정령 사이의 허브가 되어준 셈이다.

근데, 내가 강제로 맹약을 깨버렸으니 무슨 사태가 터졌으리라는 걸 알아차린 걸 떠나서 엄청나게 놀랐으리라.

뭐, 어차피 다들 한자리에 모으긴 했어야 했으니, 결과적으로는 귀찮음을 덜게 됐네.

나는 힘껏 손뼉을 쳤다.

짝, 하는 짧고 강렬한 소리가 숲의 적막함을 깼다.

더불어 나와 라그나를 예의주시하던 에프렐들이 흠칫하며 풀이 바스락거렸다.

놀라긴.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고, 드라고스 산맥에서 겁낼 게 없다던 종족이라더니 말이야.

“자, 다들 나오세요!”

내 외침에도 불구하고 에프렐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거기 숨어있는 거 다 아니까, 얼른 나오세요. 엘리니아 씨, 나르비 씨, 웰버른 씨.”

때아닌 에프렐 집합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을 언급하자, 숲이 술렁거렸다.

이윽고 몇몇 에프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언제부터 알고 계셨어요?”

엘리니아 씨가 민망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알았죠. 아주 그냥 다들 모였다고 티를 내시던데요?”

“아하하. 죄송해요. 걱정돼서······. 그나저나, 라그나를 상대로 이기실 줄이야! 진짜, 놀랐어요!”

“운이 좋았죠 뭐.”

엘리니아 씨에게 웃어준 나는 고개를 돌려 웰버른 씨와 시선을 맞췄다.

그는 크나프 씨에게 부축을 받고 있었는데, 잠깐이나마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아까보다는 혈색이 돌아온 상태였다.

“모두에게 할 이야기가 있는데요.”

“할 이야기······입니까?”

“예. 음, 엘리니아 씨나 나르비 씨가 직접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죠?”

내가 묻자 나르비 씨와 엘리니아 씨가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는 아이넬이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사실 아이넬 님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일이기도 했고요!”

얼씨구.

두 사람의 즉각적인 대답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진작부터 내게 일임하기로 얘기를 한 모양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에프렐도 아니고, 요정도 아닌데 말이야.

“알았어요. 어차피 따로 해야 할 일도 있었으니, 이 문제는 제가 나서서 얘기할게요. 그럼 일단 모든 에프렐을 한곳에 모아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힘겹게 대답한 웰버른 씨가 뒤쪽으로 손짓하며 에프렐들을 불렀다. 그제야 얌전히 숨어있던 에프렐들이 슬그머니 숲을 나왔다.

금세 공터는 수백의 에프렐로 가득 찼다.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를 설명하기에 앞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할 것들이 있어요.”

잠시 말을 멈춘 나는 내 머릿속에 새겨진 기억들.

이로나스 씨와 데모스의 기억을 토대로 짜깁기한 스토리를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더 오래전. 아티로스 대륙은 나름 평화로웠어요.”

귀여운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갔다.

“몹시도 평화로웠던 어느 날. 아티로스 대륙에 어둠이 들이닥쳤어요. 아마 여러분도 들어서 알고 계시겠죠?”

혼잣말에 가까운 질문이었으나 다수의 에프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그 어둠이라는 게 정확하게 어떤 건지 아는 분은 드물 거라고 생각해요. 그 어둠의 정체는 데모스. 다케스티아라는 머나먼 곳에서 온 사악하고 못된 사람이죠.”

“데모스······.”

데모스라는 말에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웰버른 씨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도 데모스의 지배 아니, 정확히는 데모스의 힘에 영향을 받은 라그나에게 지배 비슷한 걸 당했다.

그러나 정작 데모스에 대해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비단 웰버른 씨만이 아니다.

“그, 그런 자가 있었어요? 나르비는 알고 있었어요?”

“응? 아니, 나도 자세한 건 몰랐어.”

엘리니아 씨는 물론, 내가 아는 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나르비 씨 또한 자세한 내막은 모르고 있었다.

“데모스는 이 평화로운 대륙을 손에 넣기 위해서 악독한 짓을 서슴지 않았어요. 그랬기에 대륙에 살아가던 모든 종족들은 터전을 빼앗겼고, 문명을 잃었죠.”

내가 환생을 하고, 또 이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할 무렵이었다.

당시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적이 있다.

뭔가 어긋났다고 해야 할까?

일례로 이곳에서는 주로 수렵과 채집을 통해 살아간다.

하물며 그 흔한 농사조차 지을 줄 몰랐다.

여기까지는 별달리 이상할 게 없다.

그냥 내가 이곳의 시대상이 얼추 신석기시대쯤 되겠거니, 하고 넘길 수 있었으니까.

근데, 막상 우리가 썼던 가구나 집기, 음식, 옷 같은 걸 보면 이야기가 다르다.

나야 그 현대에서 살았기에 정확한 건 모르지만, 대략 중세 시대쯤 되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적잖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래 봐야 이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심지어 내가 은근슬쩍 물어봐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그랬기에 나는 늘 의문을 품은 채 살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나는 마침내 이 의문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데커드 할아버지였다.

나는 그를 통해서 이 마을에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걸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마을이 생겨난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내가 느낀 위화감을 설명하진 못했던 것이다.

뒤이어 나는 또 다른 지식인을 만났다.

레비아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륙을 뒤덮었던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고, 나중에는 그것이 데모스였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때서야 나는 이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포칼립스.

혹은 종말 이후의 세계.

이미 아티로스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일궜던 문명과 문화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소멸한 상황.

지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핵전쟁 이후의 세계쯤 된다고 하면 이해하기가 쉬웠다.

과거에 일궜던 관습 중 극히 일부분만 전해져 내려오되, 모든 문명은 사라졌으니 어딘가 어긋났다고 느껴지는 게 당연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데모스라는 자가 아티로스 대륙을 집어삼키려는 것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서 나선 사람들이 있어요.”

그들이 이로나스 씨와 아직 얼굴도 이름 모르는 영웅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부활한 지 몇 달이 흘렀지.

지금도 노인의 사도가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며 무언가를 하고 있을 터.

잘 지내나 모르겠네.

아니,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지.

괜스레 헛기침하며, 잡념을 떨친 나는 재차 설명을 이어갔다.

“그중에는······ 여러분도 익히 알고 있는 정령의 왕도 있었죠.”

“오오오.”

“정령의 왕······!”

아는 단어가 나오자 반가워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저, 정령의 왕이 실존했다는 거야?”

“나는 단순히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긴 줄 알았는데······.”

정령의 왕은 그저 에프렐들 사이에 떠도는 전설 비슷한 거로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영웅들이 고군분투한 덕분에 아티로스 대륙은 데모스의 손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어요. 다만······.”

내가 말끝을 흐리자 에프렐들의 사이에서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노력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데모스를 물리치지는 못했어요. 대신 영웅들의 힘을 모아서 봉인시키는 것까지는 성공했죠.”

“봉인······.”

“네. 데모스의 영혼이 봉인된 일명 마봉석은 아티로스 대륙의 어딘가에 숨겨졌고, 오랜 시간이 흘렀어요. 문제는 데모스를 부활시키려는 자들이 있다는 거예요. 데모스의 추종자들은 대륙 각지에 숨어 남몰래 부활을 계획했고, 얼마 전까지도 이어지고 있었죠.”

“그런 악한 자를 부활시키려는 자가 있다고?”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기 때문인지, 데모스의 부활을 야기하는 자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소란스러워졌다.

“그래도 걱정할 건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데모스가 부활하기 전에 소멸시켰으니까요.”

“소······ 멸을 시켰다는 겁니까? 누가······ 서, 설마.”

웰버른 씨가 황망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나는 애써 민망함을 감추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한테는 데모스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겼거든요. 운이 좋았죠.”

내가 이로나스 씨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연히 호수에서 토트리를 낚지 않고, 아브륄에 가지 않았더라면?

록시와 루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데커드 할아버지를 알고, 레비아 선생님을 만나고 장터에 가지 않았더라면?

데모스를 물리치긴커녕, 부활조차 막지 못한 채 그저 나와 우리 가족들이 고통받는 걸 지켜봐야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로 운명이라는 게 있는가 싶기도 하단 말이야.

“제가 굳이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예요. 데모스라는 존재는 사라졌지만, 아직 대륙 곳곳에 추종자들이 남아있어요.”

“그럼 그들을 찾아서······.”

무어라 말하려던 웰버른 씨가 뒷말을 삼켰다.

보나 마나 그들을 찾아서 죽여야 하느냐고 묻고 싶었던 거겠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데모스의 추종자라고 해서 그들이 진정으로 데모스의 부활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스카른 씨만 하더라도 데모스의 추종자였다.

“그저 데모스의 힘에 지배를 당했기 때문이지, 결코 자기가 원해서 그런 건 아니거든요. 아마 지금 대륙에 숨어있는 추종자들 대다수가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들을 찾아서 저한테 알려주기만 하면 돼요. 어때요, 쉽죠?”

나는 에프렐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나와 시선이 마주친 에프렐들은 물론, 옆에 있던 웰버른 씨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그렇겠지.

제아무리 숲을 제집 안방처럼 돌아다니는 에프렐이라고 한들 드라고스 산맥은 어마어마하게 넓다.

과장 좀 보태자면,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격인 셈.

아니나 다를까.

“······알겠습니다.”

웰버른 씨는 이미 지은 죄가 있는지라 순순히 내 부탁을 받아들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전해야 할 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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