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전쟁의 서막 (4)
정령의 안식처라는 이름은 수많은 종류의 정령들이 있을 것만 같은 이름이지만, 실제로 안에 있는 정령의 종류는 두 종류였다.
화염의 정령과 냉기의 정령.
“홀비도와 레바테인. 둘의 아래에 있는 정령들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다 쫓겨났기 때문이야.”
“그렇군.”
정령들을 잡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화염의 정령은 북해빙공으로 죽이고, 냉기의 정령은 불멸화영심법으로 죽이면 되니까.
쩌저정!
냉기와 함께 화염의 정령이 얼어붙어 소멸했다. 상성에 맞는 무공의 사용이라는 것이 갖는 효율은 어마무시하다.
> 상성빨 ㅁㅊㄷ
> 나도 두개 다 배워야되나 ㄷㄷㄷ
> 걍 하나만 하셈 하나 배우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두 개를 어케함
물론 이런 묘기가 가능한 것은 BJ천마뿐이다. 신성력 하나를 제대로 쓰는 것만 해도 평범한 플레이어에게는 벅찬 일이었으니까.
“아니. 사냥하지 마라고··· 숨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단 말이야···. 잠입할 수 있는 경로도 다 머릿속으로 생각해 놨는데···.”
드라이오나가 구슬프게 훌쩍였지만.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정령들을 쳐 죽이며 전진하기를 얼마나 전진했을까. 거대한 크기의 공동이 나타났다.
공동의 절반은 얼음으로 뒤덮여 있고, 절반은 불꽃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군.”
공동의 양 끝단에 있는 것은 불꽃과 얼음으로 만들어진 도마뱀들이 잠들어 있었다.
[홍염의 홀비도]
[극한의 레바테인]
“저 놈들이 홀비도와 레바테인이로군.”
“맞아. 저 놈들은 나와 다르게 이성이 거의 존재하지 않아. 힘을 위해서 정신과 영혼까지 팔아넘긴 까닭이지.”
BJ천마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딴 짓을 해서까지 힘을 얻으려고 하다니.”
> 그딴 짓 안해도 나는 너희보다 강하다
> 근데 천마님도 정신과 영혼은 좀 팔아넘긴 것 같지 않음?
> 어허! 근거없는 억측을 더 했다간 베어넘겨 버리겠다!
정신과 영혼을 팔아넘기는 사공은 결국 무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 게다가 남의 힘을 빌려 만들어진 힘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저 둘이 잠자고 있는 곳 뒤에 홀이 숨겨져 있···는데. 훔칠 생각은 없지?”
“물론. 도망치고 싶다면 도망쳐도 된다. 싸움은 나 혼자 하는 것이니.”
“···안 도망쳐. 너는 내가 선택한 사람이니까. 네가 죽는다면. 나도 함께 죽을 거야. 그 정도는 각오했어.”
“좋은 기개로군.”
“이래봬도 전 여왕이니까.”
“배신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있어야 진짜 배신자라고 할 수 있지.”
“이게 진짜!”
단천은 드라이오나의 불평불만을 무시한 채 공동의 중앙으로 걸음을 옮겨나갔다.
[홀비도가 미약한 경계심을 품습니다!]
[레바테인이 미약한 경계심을 품습니다!]
걸음을 옮기자마자 떠오르는 경고 메시지. 하지만 BJ천마의 걸음은 주저라곤 하나도 없이 계속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홀비도가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기 직전입니다!]
[레바테인이 당신의 존재를 알아채기 직전입니다!]
홀비도와 레바테인의 몸이 뒤척였다. 쿠구궁! 두 마리의 도마뱀이 몸을 살짝 뒤척였을 뿐인데도 공동이 가볍게 울렸다.
“쯧. 적이 지척에 도착했는데도 알아채는 것이 이리 늦다니.”
공동의 중앙에 섰는데도 여전히 둘은 잠자고 있다. 놈들을 깨우기 위한 최적의 수단이라면.
“하나뿐이지.”
내공을 폐에 집중시킨 다음, 입 밖으로 퍼져나가는 공기에 내공을 싣는다.
어흥!
거대한 사자후獅子吼가 공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번뜩 뜨여지는 두 쌍의 눈동자.
[홀비도가 당신의 존재를 알아챘습니다!]
[레바테인이 당신의 존재를 알아챘습니다!]
홀비도와 레바테인의 거대한 몸체가 바닥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좌우에서 쏘아져오는 냉기와 화염.
“눈치가 늦다. 버러지들아.”
단천의 몸이 여유롭게 쏘아지는 공격을 검으로 받아냈다. 화기와 냉기가 동시에 몸에 꽂혀들었다.
단천은 자하신공을 끌어올려 두 공격을 동시에 막아냈다. 하지만 순식간에 내공이 녹아내린다.
녹아내리는 내공을 더 오래 견뎌내는 것이 불가했기에, 단천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콰드드드득!
화르르르륵!
빙공과 화기가 동시에 단천을 향해 쏟아져내렸다. 단천은 요리조리 공격을 피해냈다. 공격을 직격당할 일은 없을 것이다.
> 진짜 피하는 건 월클 ㅋㅋㅋㅋㅋㅋㅋㅋ
> 아니 피하는 것만 월클인 것처럼 말하네
> 모든 면에서 ‘월클’이시다 이마리야
> 하루 종일이라도 피할 수 있음 ㅋㅋㅋㅋ
‘하지만, 공격당하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버틸 수 있다는 뜻은 아니지.’
채팅창에서 나오는 말처럼 하루종일 공격을 피해낼 수 있지는 않다. 한기와 열기는 피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양과 극음, 한 종류의 공격뿐이라면 북해빙공이나 불멸화영심법을 사용해 돌파할 수 있을 테지만. 지금은 양 쪽에서 두 가지의 공격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는 상황.
‘확실히. 상대하기 쉽진 않군.’
극양과 극음을 동시에 상대한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단천은 불멸화영심법과 북해빙공을 동시에 사용하는 음양쌍괴를 떠올렸다.
한 손에는 극양의 기운을, 그리고 반대쪽 손에는 극음의 기운을 사용하던 괴인.
─ 크헐헐헐! 꼬마야! 본 노부의 능력이 어떠냐!
─ 빙궁주랑 화영주를 동시에 상대하는 거랑 다를 바 없다니! 이런 개잡놈의 자식이!
‘혼자서 두 가지를 쓸 수 있다는 데 엄청 자부심이 있던 노친네였지.’
보통의 무인이라면 극양, 극음, 둘 중 한 종류의 내공밖에 가질 수 없다. 특수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 양음지체가 극양과 극음의 내공을 동시에 수련할 수는 있지만, 그런 자라도 한번에 한 가지의 내공을 운용할 수밖에 없다.
단천이 가지고 있던 천단공도 극양과 극음을 흉내내어 만드는 것은 가능했지만, 둘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음양쌍괴는 이런 모든 상식을 비웃듯이 극양과 극음의 힘을 동시에 사용했다.
‘꽤 재밌는 승부였지.’
극양을 다루는 무공은 무수히 많이 봐 왔다. 극음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두 무공을 동시에 쓰는 자와의 승부는 그 때가 처음이며, 마지막이었다.
─ 푸헐! 형님! 잔 받으시게! 아니, 왜 형님이냐니! 본 노부보다 무공이 세시니 형님이시지!
─ 형님이시니 술값은 형님이 내시겠지? 어허! 칼 집어넣고! 아!
상하관계의 정립이 끝나자마자 음양쌍괴는 동생을 자처했었다. 술도 자주 마시고, 무공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하고.
‘형동생을 가리는 목숨을 건 대련도 자주 했었지.’
물론 언제나 단천이 이겼었지만. 그래도 꽤 즐거운 대련이었다. 그렇게 아무리 친해져도 음양쌍괴는 자신이 어떻게 두 내공을 혼용해 사용할 수 있는지는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못 배울 리가 없는데 말이지.’
공격을 피해내던 단천의 몸이 완전히 멈춰섰다. 요리조리 피하던 공격이 멈추자마자 양쪽에서 공격이 쏘아져왔다.
콰드드드득!
화르르르륵!
> 안 피함?
> 뭐해 ㅅㅂ
> 피해욧!! 구석으로!!!
왼쪽과 오른쪽에서 동시에 날아오는 불꽃과 얼음.
피하라는 아우성이 채팅창에서 터져나왔지만, 단천은 피하는 대신 검을 고쳐잡을 뿐이었다.
서걱!
단천의 검이 좌에서 우로 휘둘러졌다.
깔끔하기 그지없는 일격이 끝나자마자 날아오던 얼음과 불꽃이 동시에 소멸해 버렸다.
> ㅅㅂ
> 뭐여
> ???
“역시. 되는구만.”
될지 안 될지를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이전에도 해 냈으니 이번에도 될 것이라는 확신이 어느 정도는 있었다.
“뭐야! 도대체 어떻게 한 거야!”
드라이오나의 경악에 BJ천마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말했다.
“어떻게 한 거긴. 필요한 곳에 필요한 심법을 썼을 뿐이다.”
극양의 검기를 사용해야 하는 좌측에서는 불멸화염심공을 쓰고, 극음의 검기를 사용해야 하는 우측에서는 북해빙공을 쓴다.
1초도 채 되지 않는 극히 짧은 시간동안 두 개의 내공을 갈아서 쓰는 것.
그것이 바로 음양쌍괴가 보여주던 기괴한 무공의 비밀이었던 것이다.
─ 아니, 씨부랄! 대체 어떻게 한 거요! 내공을 순식간에 갈아쓰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 아니, 본 노부의 무공은 태극의 무공을 끌어올린 뒤 음과 양으로 갈라 쓰는 것이 요체란 말이오! 그딴 기괴한 사공邪功따위가 아니란 말이야!
─ 알고 보니 눈속임 잡기술이라니! 이 빌어먹을 자식이 태극의 묘리를 무시해! 오늘 본 노부가 네놈을 반드시 죽이고 말겠느니라!
음양쌍괴는 자신의 잡기술이 들키자 노발대발하며 만날 때마다 단천의 무공을 부정했지만. 안 그래도 무공 실력이 밀리던 음양쌍괴가 눈속임이 들통난 후에도 단천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음양쌍괴의 잡기를 배워놓은 덕분에 편하게 됐군.’
단천의 검이 날아오는 얼음덩이는 열기가 깃든 검으로, 불꽃은 한기가 깃든 검으로 베어내기 시작했다.
눈 한 번 깜빡일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마다 바뀌는 검의 기운에, 쏟어져내리는 얼음과 불꽃이 속속들이 사라져나갔다.
> ㅁㅊ
> 아니 좀 현실에서 가능해 보이는 걸 해 ㅋㅋㅋㅋㅋ
> 실제로 되는데요??
> ㅅㅂ 진짜 하니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ㅋㅋㅋㅋㅋ
단천의 기예에 다시 한 번 채팅창에서 경탄이 터져나왔다. 모든 종류의 신성력을 쓰는 것도 모자라서 그걸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쓰기까지 하다니.
실로 압도적이라고 하기에도 힘들 정도의 기예를 바라보며, 채팅창은 경악에 찬 감탄사만을 연발할 뿐이었다.
***
“와···.”
드라이오나가 바닥에 쓰러진 두 마리의 도마뱀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성을 잃었을지언정 둘은 정령계에서도 손꼽히는 힘을 가지고 있던 두 정령이다. 심지어 둘이 가지고 있는 힘은 영혼을 바치며 더 강해지기까지 했다.
“그런 두 정령이, 함께 공격을 했는데도 인간 한 명을 이기지 못하다니.”
드라이오나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옆에서 묵묵히 서 있는 BJ천마를 바라봤다.
이토록 대단한 업적을 이룩했는데도 그는 무덤덤한 표정이다. 무덤덤한 것 같아 보이면서도 무언가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뭘 하면 되지?”
“홀! 홀! 이 자식아! 내 힘이 봉인돼 있는 홀을 찾아야지!”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 잠시 잊었어 ㅋㅋㅋㅋㅋㅋ
> 내버려뒀으면 100% 그냥 몬스터 잡고 밖으로 나왔다 ㅋㅋㅋㅋㅋㅋㅋ
> 퀘스트 깨는 법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남자 ㅋㅋㅋㅋㅋ
> 눈 앞에 있는 거 다 베다 보면 퀘스트따위는 완료되는 거 아니냐?
> ㅇㅈ합니다
단천은 채팅창의 근거 없는 비난을 무시한 채 홀의 조각을 찾아냈다. 반으로 잘려진 두 개의 홀은 공동의 양쪽에 떨어져 있었다.
“그냥 놈들을 처리하면 바로 홀을 얻을 수 있게 돼 있어야지. 귀찮게 만들어져 있군.”
“···애초에 놈들을 잡는 게 목표가 아니었다고···. 비밀스럽게 홀을 빼앗아서 나를 배신한 놈들에게 되찾은 내 힘을 제대로 보여주려고 했는데··· 다 망했어···.”
드라이오나가 훌쩍였지만 이번에도 그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실로 품격있는 여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취급이었다.
드라이오나가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맞는지를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단천은 조각난 홀을 맞췄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조각을 맞추자마자 바닥에서 훌쩍이던 드라이오나의 몸에서 환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오.”
드라이오나의 몸에서 터져나오는 빛에 BJ천마의 입에서도 가벼운 탄성이 터져나왔다.
“드디어 배신자와의 마지막 승부인가.”
> 그러니까 배신 안 한다고 ㅋㅋㅋㅋㅋㅋㅋ
> 드라이오나야 그냥 배신해서 반골의 상의 힘을 보여주자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