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랭크 게임 (6)
“근데 왜 서포터를 하는 거야? 할 거면 서포터 캐릭터를 배우던가. 굳이 서포터 할 이유가 없잖아.”
“어떻게 하는지 보기나 해.”
툴툴거리는 제로콜의 말에 토끼가면은 짧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게임을 하면서도 몇 번이나 들어온 말이었다. 그야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캐릭터인 ‘레이나’는 서포터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니까 이런 불평도 당연한 일이다.
입을 다물게 할 방법은 단 하나.
실력으로 보여주는 것 뿐.
게임이 시작되고 바텀 라인전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상대 바텀 듀오의 캐릭터는 맹진의 알리스와 서리궁수 려원.
전형적인 원딜-탱커 조합이다.
“1레벨 딜교 바로 들어간다.”
“1레벨부터? 저기 CC기가 몇 개인지는 알아?”
“쫄았어?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간다.”
토끼가면의 도발에 제로콜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눈 앞의 토끼가면은 같은 말을 해도 사람을 묘하게 화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총 안 쏘고 탱커를 했으면 대성을 했을 인재다.
“하. 그래. 어떻게 하는지 보기라도 하자.”
“바로 들어간다.”
적 바텀 듀오가 오자마자 토끼가면이 바로 사격을 시작했다.
타다당!
정확하기 그지없는 탄환이 적 바텀 듀오에 틀어박혔다.
미니언들의 어그로가 토끼가면에게 끌렸다. 바텀에서 딜교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이 이 이유 때문이다. 미니언들에게서 어그로가 끌리면 원거리 딜러 입장에서는 사격을 제대로 할 각이 나오지 않으니까.
웬만큼 실력이 좋은 게이머라도 미니언들으로 시야가 꽉 막히면 제대로 된 사격을 적에게 꽂아넣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한수아는 ‘웬만한 게이머’가 아니다.
[마탄환]
마탄의 사수 레이나는 모드 변경을 통해 곡사가 가능하다.
시야가 가려져 있다고 해도 적의 위치만 안다면 시야가 가려져도 사격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타다다당!
파바바박!
“마, 막아!”
이어지는 사격에 당황한 알리스가 토끼가면을 향해 달려들었다.
[뿔로 받기]
퍼억!
알리스의 돌진에 맞은 토끼가면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물몸인 원딜이 CC에 제대로 격중당한 상황.
하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토끼가면이 바라고 있는 바였다.
타다다당!
다른 한 명의 원딜인 제로콜의 총격이 적의 원딜러에게 박혀들었다.
물론 상대도 바로 반격을 시작했지만 처음 토끼가면의 공격으로 데미지를 입고 시작한 상대가 이길 방법은 처음부터 없었다.
[퍼스트 블러드!]
상대방의 원딜이 쓰러졌다. 남은 것은 적진에 혼자 고립된 알리스 혼자뿐.
아무리 초반에 강력한 탱커라고 해도 2:1의 일방적인 사격에서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더블 킬!]
> 와
> 개쩌네
> 이 정도면 ㅇㅈ이지
“꽤 하네. 지금까지 해 온 원딜러들은 버벅거리거나 사격이 빗나가거나 하던데. 역시, 실력이 있긴 있어.”
더블킬을 먹은 제로콜은 입을 삐죽였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히 손발이 잘 맞는다.
지금까지 계속 함께해 온 서포터들은 움직이는 게 맘에 안 든다거나 스킬샷이 아쉽다거나. 뭔가 한 부분씩은 나사가 빠져 있었는데.
토끼가면의 무빙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정유채 : 와! 나이스!]
[풀창고 : 나이스 플레이!]
“나이스 플레이라고 하지 마. 그냥 평범한 플레이를 했을 뿐이니까.”
[정유채 : 왜?]
[풀창고 : 딱 보니까 토끼가면님이 하드캐리 했나보네.]
“아니거든? 그래도··· 지금까지 서포터 중에서는 제일 낫네.”
“그래. 누나가 잘 서포트해줄 테니까 무럭무럭 커 보도록 해.”
“니가 왜 누나야? 나이 오픈도 안 했잖아!”
“몰라? 게임 잘하면 원래 누나라던데.”
제로콜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오. 서로 티키타카 하는거 보니까 케미도 잘 맞아 보이는데?]
[둘이 지난 번에 만났을 때도 잘 놀았어.]
“대체 언제! 어디가!”
풀창고와 정유채의 말에 제로콜이 소리를 질렀다.
손발이 잘 맞는 건 맞는 거고. 그래도 팀원으로 토끼가면은 절대. 절대. 절대 사양이다.
***
쪼옵. 쪼옵.
단천은 한약 팩을 빨며 모니터 너머로 천마신교 일원들의 게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는 어째 게임방송 보면서도 한약을 마시냐?”
“건강에 좋아.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몸보신 많이 해 놔야 된다고. 누나도 마실래?”
“너 보면서 아저씨 같다고 생각하던 거 취소. 할아버지야 할아버지.”
단지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거나 말거나 단천은 수제 한약팩을 빨대로 빨아 마셨다.
안 먹을 것처럼 타박을 주던 단지은은 슬그머니 단천의 약재 냉장고에서 팩 하나를 꺼내들었다.
단천이 먹는 약들이 뭐가 됐건 몸에 직빵으로 효능이 온다는 것을 몸으로 체득한 덕분이었다.
“···할아버지 같다며?”
“그래도 동생이 준비해 준 건데 마셔야지. 이번 한약팩은 뭐로 만든 거야?”
“녹용.”
“진짜 녹용이야? 녹용 비싸잖아. 아, 돈 생겼다고 그거 막 써서 사 온 거야?”
“아니거든?”
지금 단천이 우려낸 녹용은 뒷산에서 발견한 사슴의 뿔을 받아온 것이다.
밀렵꾼의 함정에 빠져서 오도가도 못하는 것을 구해준 댓가로 받아온 뿔이다.
보금자리도 확인해 놨으니 보은을 받으러 종종 찾아가 피도 받고 녹용도 받을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서 사슴 가족이 새끼를 치면 녹용의 양도 늘어나겠지.’
단천은 사슴을 보호해주고, 사슴은 그 보은으로 뿔과 피를 제공한다.
이것이 진정한 상부상조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사슴 가족이 단천의 생각에 동의하는지는 별개의 문제기는 했지만.
21세기의 아쉬운 점 중 하나라면 뒷산에서 도움이 될 만한 야생동물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호랑이나 하다못해 반달곰이라도 많이 살면 도움을 좀 많이 받을 텐데.
그러고 보니 지리산에 반달곰의 개체수가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었다.
“반달곰들이 빨리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군.”
“갑자기 자연 이야기는 왜 해? 평생 자연 걱정이라고는 하지도 않더니.”
“자연이 잘 보존돼야 약재가 많아지니까. 그러면 약을 더 싼 값에 먹을 수 있게 되지.”
“할아버지! 제 동생 몸에서 나오세요!”
단천은 단지은이 단천의 몸에 악령퇴치 소금을 뿌리거나 말거나 모니터 안 화면에 집중했다.
[탕!]
[더블 킬!]
[타다당!]
[트리플 킬!]
> 그냥 총 한발 맞으면 죽네 ㅋㅋㅋㅋㅋ
> 원래 사람은 총 한발 맞으면 죽어
> 맞는 말이긴 한데 그 말이 그 말이 아니잖아!!
게임은 제대로 터져 있는 일방적인 상황이었다.
바텀 듀오가 게임을 터트려놓은 상황이라 한타 자체가 성립을 하지 않는 상황.
‘꽤 괜찮은 방법으로 방향을 잡았군.’
토끼가면, 그러니까 한수아가 서포터로서 자리를 바꾼 것은 아마 팀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내기 위한 아이디어였을 터다.
제로콜의 원딜로의 자리는 워낙 명확하고 포지션을 바꿀 수도 없으니까.
그러면서도 사격을 잘 하는 자신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원거리 딜러 서포터’라는 유니크한 포지션.
둘은 꽤 잘 맞는 듀오다. 둘의 케미를 처음 본 정유채도 동의할 정도다,
[둘이 엄청 잘 맞는데?]
[절대 아니야!]
[그냥 제가 잘 하는 것뿐인데요 뭐.]
[그것도 아니고!]
제로콜은 기를 쓰고 부정했지만, 그것은 단천에게는 그리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자, 게임 끝났으니 이제 바이바이 합시다 토끼가면님!]
[저 언니 팀원으로 넣으면 안 돼? 스킬샷 엄청 섹시하던데.]
[유채야. 다시 말하지만 저 사람 나이 모른다니까?]
[왜. 게임 잘하면 언니지! 그쵸 토끼가면 언니!]
[에헤헴!]
정유채의 칭찬에 토끼가면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합공을 하는 데 있어서의 움직임도 기가 막히다.
‘팀플레이에 대한 눈 자체가 있어.’
아마도 천공을 해 오면서 배운 것이겠지.
게다가 더 마음에 드는 것은 원거리 딜러라는 캐릭터에 가려져서 제 역할을 등한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레일라가 가지고 있는 유틸리티 스킬인 ‘연막탄’과 ‘곰덫’을 적절하기 그지없게 깔아서 제로콜이 딜을 할 수 있는 견적을 계속해서 만들어준다.
탑에서만 주구장찰 살아온 단천이기에 다른 서포터의 기준으로 설명을 하기는 힘들었지만.
무림으로 따지자면 대략 일류 고수 이상의 전투 센스다.
“···훌륭하군.”
한수아는 자신을 팀원에 넣도록 만들겠다는 말을 지키기 위해서 이토록 많은 준비를 해 온 것이다.
팀의 케미에도 잘 녹아들고, 서포터의 역할인 원거리 딜러를 키우는 능력 자체도 출중하다.
팀원으로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단천은 후원창을 열어젖혔다.
[BJ천마 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토끼가면 끼고 팀게임 하는 게 좋아 보임.]
[···천마 형. 진짜 천마 형이야?]
[짭퉁 계정 아닌데?]
제로콜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바텀에서의 호흡도 뛰어나고, 서포팅도 뛰어나고, 흠잡을 데가 하나도 없다.
[우이씨. 그래. 잘 해 봅시다.]
[BJ천마 : 거기 세 명이랑 같이 팀게임 챌린저 달면 우리 팀에 정식으로 들어오는 걸로.]
[그거야 껌이지!]
> 아니 챌린저를 무슨 껌인것처럼 말을 하네 ㅋㅋㅋ
> 역시 BJ천마의 제자
> 근데 저 정도 케미랑 팀워크면 ㄹㅇ 챌린저 단체로 갈 것 같은데?
> ㅆㅇㅈ
이걸로 마지막 팀원의 조각이 맞춰졌다.
정유채의 실력이 조금 쳐지는 것이 걱정되기는 하지만.
‘···직접 손댈 필요는 없겠지.’
단천이 직접 지도하는 천마신교의 인원은 한줌에 불과했다. 대충 가지고 놀기 가장 좋은 서윤학이 가장 잦았고, 그 다음이 혈귀단. 그 다음이 미래가 기대되는 후기지수들.
하지만 천마신교의 전체적인 무공 능력은 단천이 지도하는 무인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일취월장을 계속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 거기! 대련을 할 때는 더 죽을 각오로 해! 대련 상대를 못 죽이면 지존에게 죽는다! 그런 생각으로 하라고!
─ 겨우 발 좀 부러졌다고 대련을 항복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지존에게 걸렸으면 사지가 다 부러졌어!
─ 몸 안 좋다고 쉰다고? 나때는 말이야! 대련 쉰다고 하면 용암 위에 낚싯대로 매달려서 쉬어야 했어!
단천에게 직접 수련을 받은 자들이 다른 천마신교의 일원들을 가르쳤으니까.
그리고 가르침을 받은 천마교도들은 다른 천마교도들에게 단천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그 설파된 교도들이 다른 교도들에게 가르침을 설파했다.
무武가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누군가는 천마신교의 가르침을 보고 ‘증오의 연쇄’나 ‘폭력이 폭력을 부른다’같은 소리를 해 댔지만.
원래 호사가들은 자기들 보는 대로만 말하는 법이다.
[유채야. 정글 갱을 올 때 제발 타이밍 맞게 오라니까? 아까 제대로 킬을 못 낼 뻔 했잖아.]
[그리고 바텀 갱 루트가 너무 뻔했어.]
[···게임 이겼는데 이렇게 피드백 해야돼?]
[챌린저 가야 되니까. 아까 게임 12분 32초쯤에 한 갱킹. 다시 볼까?]
풀창고와 제로콜은 자신 입장에서는 BJ천마에 비해 ‘온건하게’ 피드백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하는 피드백의 강도는 단천의 피드백과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았다.
즉. 정유채의 실력도 일취월장할 것이 확실하다.
“이게 바로 자동사냥이라는 건가.”
만약 정유채까지 모조리 신경을 써야 했다면 단천 입장에서는 지금처럼 시간을 낼 수 없었을 터다.
단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의 화면을 껐다.
“오. 이 집 괜찮아 보인다.”
“그렇네. 내일 보러 가면 되겠다.”
단지은이 화면에 띄운 집을 보고 단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