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VR캡슐 세부조정
“설치 기사입니다.”
계약이 끝난 다음 날. TG에서 보내온 설치기사들이 단천의 사무실에 들어왔다.
빠르기 그지없는 일처리다. 하긴, TG 입장에서도 실시간으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천공의 랭크 게임에 자신들의 기기가 사용되는 것을 광고하고 싶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존 기기를 들어내고, TG에서 가져온 기기 설치가 시작됐다.
“기본 설치는 금방 끝납니다. 커스텀 파츠들 설치를 해야 하는데···. 영양 보조제는 사용하십니까?”
“영양 보조제라 함은 어떤 겁니까?”
“MMORPG를 하는 플레이어분들이 붙이는 파츠죠. 1세대의 전설적인 게임인 「달빛 조각」같은, 오래 게임을 하는 경우에 설치합니다.”
“추가 설치 비용은?”
“없습니다. 어떤 옵션을 선택하셔도 전액 TG 부담이니까요.”
“설치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고전 게임 VR 변환 장치는···.”
“그것도 설치해 주십시오.”
“중력효과 감쇠 장치는···.”
“설치.”
“LED등은 어떤 색으로···.”
“다 설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옵션을 박아넣은 VR캡슐의 모습이 원래의 형체와 꽤 멀어졌다. 캡슐이라기보다는 00년대 SF영화에나 나올 생명연장기기와 같은 모습이다.
‘저걸로 우리 TG가 진짜 광고가 될까.’
TG에서 나온 설치기사가 살짝 우려를 하거나 말거나 단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공짜라면 모조리 다 설치해 놓는게 이득이다. 왜, 사람 사는 일 모르는 일이지 않던가.
“기존 캡슐 설정을 확인하겠습니다.”
설치기사가 단천의 원래 캡슐을 열어 설정을 확인하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최대 전력이 제한돼 있는데?’
과거 VR캡슐이 처음 선을 보였을 때에 안정적이지 못한 전력 공급으로 인해 두꺼비집이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던 탓에 하던 최대 전력 제한.
그런 제한이 왜 첨단 캡슐에 적용돼 있는지 설치기사는 잠깐 고민했다.
“예전에 이 기기 사용하던 곳이 전력 공급이 잘 안 되던 곳입니까?”
“처음 쓰던 곳은 달동네긴 했죠. 지금에야 사무실에서 사용하지만요.”
“그렇군요.”
그제서야 설치 기사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력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달동네에서 이런 고급 캡슐을 사용했다가는 사용을 할 때마다 전력 문제가 심각했을 터.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설정을 바꿨었다니. 옵션을 죄다 선택해대는 꼴을 보고 VR알못인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정말로 조예가 좀 있는 모양이었다.
‘···왜 사무실에 와서는 원래 설정으로 되돌리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전력 공급의 경우에는 거의 조정하지 않는 설정이다. 그러니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전력 공급 조절을 깜빡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설치기사는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캡슐의 미세 조정을 불러와 신규 캡슐로 불러넣었다.
“이제 세부 조정 프로그램 실행 하겠습니다. 캡슐 안으로 들어와 주세요.”
“세부 조정 프로그램이라면 어떤 겁니까?”
“그냥 반응 속도 측정하는 간단한 게임들을 몇 개 해 주시면 됩니다.”
“호오.”
보통의 게이머라면 그냥 짧게 테스팅을 하고 말았겠지만 단천 자신은 스트리머.
이런 방송거리를 놓친다면 스트리머가 아닌 것이다.
“이거. 방송해도 괜찮습니까?”
***
[On Air]
[신규 VR캡슐 세부조정방송]
> 천-하
> 아니 뭐 오늘 방송은 늦는다더니 왜케 빨리켬
> 새 캡슐 설치 벌써 끝남?
> 아직 설치 세부조정 중인 것 같은데?
“설치 세부조정 중에 방송할 만한 컨텐츠가 있기에 방송을 시작했다.”
> 이걸 방송각을 안 놓치네
> 기가 막힌 방송각 ㄷㄷ
> 옆에 계신 설치기사님 얼어붙은거 봐 ㅋㅋㅋ
“바, 반갑습니다! TG게임즈의 설치 및 AS, 세부조정 등을 맡고 있는 김인하입,니,다!”
“이번 캡슐은 테크니컬 지니어스에서 지원해 줬다.”
> TG면 꽤 잘나가는 캡슐사 아닌가
> 그보다 캡슐 모양이 왜저래 ㅋㅋㅋㅋㅋ
> 캡슐이 아니라 탱크인데??
> 넣을 수 있는 옵션 죄다 갖다박았나 ㅋㅋㅋㅋㅋ
“꼭 필요한 설정만 넣었는데도 저렇게 되더군. 괜찮은 설정이 참 많으니 한 번 찾아보는 것을 권하지.”
> 그, 그렇군요··· 꼭 필요한 것만 넣었는데 저 크기인 거군요···
> 캡슐 들고 핵전쟁 대비라도 하는 겁니까?
> 조용히 하지 않으면 천마펀치를 먹여주겠다
> 그래서 방송은 왜 켬?
“말했듯이 현재는 캡슐 세부 조정 중이다. 세부 조정에서 간단한 게임으로 세부 조정을 하는 모양이더군.”
> 오
> 스테이터스 컨텐츠네
세부 조정 테스팅은 조정 테스팅 프로그램인 ‘오버파워’를 사용한다. 이 오버파워 테스팅은 장르를 막론하고 최상위권의 게이머들이라면 모두 거쳐가는 과정중 하나다.
그리고, 최상위권 게이머라면 모조리 거쳐가는 과정인 만큼 그 안에서의 서열 경쟁또한 존재한다.
> 오버파워 스택 몇점 정도 생각함?
> 1만점 정도 아닐까?
> BJ천마 플레이 보면 모르냐 최소 1.5는 되겠지 ㅋㅋㅋㅋ
반응속도, 시야각, 초점이동, 신경반응 등 측정 가능한 대부분의 스텟을 수치화해서 총계를 나타내는 ‘오버파워 스택’.
이 오버파워 스택이 바로 스트리머들의 서열을 나누는 기준이다.
보통 1만점이 넘어가면 최상위권의 플레이어. 1만5천점이 넘어가면 프로권에 근접한 플레이어라고 불린다.
“그럼. 측정을 시작하도록 하지.”
[캡슐 동기화를 시작합니다.]
이전에 비해서 훨씬 기계음이 줄어든 자연스러운 목소리가 단천의 귀로 들려왔다.
‘확실히 좋은 게임기라 그런지 목소리부터가 다르군.’
[프로그램 ‘오버파워’를 실행합니다.]
오버파워가 실행되자 단천은 흰 공간 사이에 서 있었다.
단천은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확실히. 좋은 캡슐이라 그런지 신체 반응이 조금 더 빨라졌군.”
풀창고의 캡슐을 사용했을 때나, 하인라인에 가서 핵 검증을 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의 캡슐이 반응이 조금 더 빠르기는 했지만.
> 아니 ㅋㅋㅋㅋ 사람이 그런걸 어떻게 느낌 ㅋㅋㅋ
> 신체 감도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못 느껴요 천마님
> 다들 조용히 하셈 ‘광고’를 위한 천마님의 반응이니까
> ㅇㅈ;; 이럴때는 자본주의식 반응을 해줘야 되는 거임
> 역시 TG의 캡슐 시스템! 완벽한 반응을 자랑하는군요!
> 고급스럽게 멕이네 ㅋㅋㅋㅋ
‘이 자식들이.’
솔직하게 말을 했더니 단천의 반응을 거짓으로 몰아간다.
[아. 반응이 조금 빨라진걸 느끼실 수도 있을 겁니다. 이전 기기에서 걸려 있던 전력 제한을 해제했거든요. 연산시간 차이가 50ms 이상 줄어들었으니 민감한 분들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차이입니다.]
> ?
> 전력 제한을 걸고 게임을 하는 사람이 아직 있음??
>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딨어 ㅋㅋㅋㅋ
[원래 사용하시던 환경이 전력을 최대로 사용하기에 문제가 있는 환경이었다고 하더군요.]
> 하긴 처음 방송하던 방이 엄청 낡긴 했었지
> 아니 말이 되냐 그래도 피지컬이 그 모양인데
> 지금까지 봐 온게 전력 제한 모드일 리가 없잖아 ㅋㅋㅋㅋㅋ
> 그게 진짜면 내 팔에 달린건 뭐임
> 그거 발임
> 발이었구나
> 아직도 몰랐냐?
> 어째 젓가락질이 잘 안되더라고. 발이었구나
채팅창에서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이어졌다. 안 그래도 BJ천마의 피지컬은 인간을 초월한 수준이라는 총평이 자자하다.
그런데 이 피지컬이 ‘제한’이 걸린 피지컬이었다고?
[독일축구못함님이 15,000원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이게 뭐 팔다리에 무게추 달고 하는 수련인가 그거냐]
단천은 팔다리를 기분 좋게 움직였다.
“이 정도라면 본좌의 생각보다도 좋은 점수가 나올 지도 모르겠군.”
[동체시력 테스팅을 시작합니다.]
[눈으로 지나가는 물체를 직시해 주세요!]
BJ천마의 눈 앞에서 조그마한 점이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했다. 고개는 돌릴 수 없고, 눈의 움직임만으로 점의 움직임을 쫓아야 하는 테스트였다.
BJ천마의 동공이 눈 앞에서 흔들거리는 점을 쫓아 움직였다.
점차 빨라지는 점의 움직임은 빠르게 움직이다 급격하게 멈추거나, 갑자기 방향전환을 하는 등의 움직임을 계속 보여줬다.
> ㅅㅂ 눈 아파
> 걍 3인칭으로 보셈 1인칭으론 어지러워
자칫 잘못하면 눈에서 아예 점을 잃어버릴 정도의 난해한 난이도까지 올라갔는데도 BJ천마의 눈은 단 한 번도 점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동체시력 테스팅이 완료되었습니다.]
[반응속도 : 98/100]
[시야각 : 100/100]
[초점이동 : 95/100]
[방향전환 : 95/100]
[예측능력 : 97/100]
[총계 : 485 (상위 0.00000014%)]
그렇게 BJ천마가 얻은 동체시력 테스팅 점수는 485점.
> 485점? 이거 점수 맞냐???
> 동체시력에서 저런 점수는 살면서 처음 보네 ㅋㅋㅋㅋ
> 상위 0···.뭐? 저거 공이 몇 개냐?
> 대충 10억분의 1인데?
> 10억분의 1의 재능 ㅁㅊㄷ ㅋㅋㅋㅋㅋㅋ
485점이라는 점수는 말랑튜브와 트인낭의 스트리머들을 통틀어서도 거의 나오지 않는 최상위권중의 최상위권의 점수였다.
하지만, 단천의 고개는 불만스럽게 한쪽으로 젖혀질 뿐이었다.
“···10억분의 1이라고?”
[와우. 485점이면 거의 탈인간계의 점수네요. 거의 한계치의 점수에요.]
“10억분의 1?”
[네. 10억분의 1입니다.]
“고작 10억분의 1?”
[고작이라뇨. 세계의 인구가 70억명인데요?]
“세계 인구가 70억인데, 고작 10억분의 1이라.”
이 세계의 인구는 70억명이다. 그렇다는 건 단순 계산으로 자신의 위에 7명이 더 있을수도 있다는 말 아니던가.
단천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심상에 가라앉았다. 간단한 테스트라고 해서 너무나도 쉽게 생각한 모양이다.
‘많이 무뎌졌군.’
평화가 자신의 마음을 무디게 만든 것이던가.
아니, 타인의 탓을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상황은 오롯이 자신의 문제였다. 하다하다 이런 개망신을 당하다니. 방심은 죽음을 부른다는 것을 그리도 오래 체득해 놓고서 이런 결과를 맞이하다니.
이곳이 전장이었다면 큰 화를 불렀을 상황이다.
···하지만, 더는 방심하지 않는다.
깊게 가라앉았던 단천의 눈이 다시 뜨여졌다.
“다시. 하도록 하지.”
[다시 한다고요?]
설치기사의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하지만 단천의 눈은 전혀 농담을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혹시, 지금 테스팅하는 상황에서 팔다리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나?”
[가능은 합니다만. 테스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행동을 하실 수는 없습니다.]
상관없었다. 지금 자신이 하려는 것은 테스팅과는 완전히 무관한 것이었으므로.
단천은 발도 자세를 취하며 눈을 감았다. 자신의 안으로 깊게 정신이 침잠했다.
깊고 깊게 가라앉은 심상의 가장 끝에.
단천의 안에 항상 존재했던 검 한 자루가 있었다.
단천은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심검心劍의 칼자루를 쥐고.
눈을 떴다.
“됐다. 다시 테스트를 시작하도록 하지.”
이번의 테스트는 이전과는 전혀 다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