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사사 (2)
[결승전의 맵은 「천공 격투장」입니다!]
천공 격투장은 적 전부가 사라질 때까지 격투장 안에서 1:1을 벌이는 맵이다. 밸런스가 엄청나게 좋은 맵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캐릭터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
풀창고의 말에 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대다의 싸움이 중심이 되는 AOS는 1:1이 중심이 되는 다른 게임에 비해서 주목도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대회는 이벤트성 대회. 공정성보다는 주목성에 중심을 둔 상태다. 그런 점에서 익숙치 않은 캐릭터의 화려한 스킬을 모두 볼 수 있는 천공 격투장을 결승전 장소로 택한 것은 제작진의 안목이 정확하다고 볼 수 있었다.
[픽이 시작됩니다.]
픽이 시작되자마자 단천은 언제나처럼 「야수도 박정」을 가장 먼저 픽 창에 올려넣고 준비 완료를 눌렀다.
한 손으로는 야수도 박정의 위치를 찾아내 누르고, 반대쪽 손으로는 준비 완료 버튼을 누르는 과정.
아주 짧은 딜레이가 있을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중원에는 이런 상황을 위한 무공또한 존재한다.
파아앗!
BJ천마의 손놀림이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픽까지 채 0.1초도 걸리지 않는 신속한 움직임.
> 픽 속도 실화냐 진짜 ㅋㅋㅋ
> 무슨 프로그램 돌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임 ㅋㅋㅋ
> 지난 번에 측정해 봤는데 0.01초도 안 걸리더라
이토록 빠른 픽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천이 픽을 할 때마다 양의심공을 시전하는 덕분이었다.
양의심공. 한 명의 뇌로 두 가지 행동을 동시에 해결하는 무당파의 절공 중의 절공이다.
그런 양의심공을 가지고 하는 짓거리가 영웅의 픽을 빠르게 하다니. 무당파의 장문인이 봤다면 단천에게 생사결을 걸었을 게 분명했지만, 아쉽게도 무당파의 장문인은 이 세상에 없었다.
무당파의 장문인이 이 세상에 있었더라도 단천을 생사결로 이길 수 없는 노릇이긴 했지만.
그렇게 박정을 선택하고 게임 시작을 기다리려는 단천의 눈에 특이한 것이 들어왔다.
[영웅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스킨을 선택해 주세요!]
언제나처럼의 스킨 화면이다. 그리고 단천은 여러 스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스킨을 고수해왔다.
구태여 다른 스킨을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화면에는. 단천이 지금까지는 보지 못한 스킨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박정’ MODE 기계공룡-프로토타입」
> 뭐냐 저거
> 못 본 스킨인데???
> ?????
[오오! 새 스킨이로군요!]
채팅창과 중계진에서 반응이 터져나왔다. BJ천마가 첫 솔로랭크 1위를 찍으면서 요청한 ‘스킨’이 지금 등장한 것이다.
단천의 손이 처음으로 다른 스킨을 향해 움직였다.
스킨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철컹거리는 기계음과 함께 위에서 묵직한 컨테이너 하나가 떨어져내렸다.
콰아앙!
기계적 장치로 가득한 컨테이너가 증기음을 뿜어내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기계음.
「Warning - 다수의 적이 감지됩니다. 적의 박멸을 시작합니다.」
「MODE : Dinosaur」
콰지지지직!
컨테이너 박스에서 연록빛의 섬광 한 줄기가 터져나왔다. 터져나온 일직선의 섬광이 컨테이너 박스를 잘라냈다.
서걱!
“···광선검이로군.”
컨테이너 박스를 완전히 갈라내고 등장한 박정의 몸은 완전히 기계화가 끝난 몸이었다.
컨테이너 박스를 갈라낸 박정이 몸을 위로 튕겨오르듯 뛰어올랐다.
[모드 변환 : 공룡화]
그리고 바닥에 착지하기도 전에 공룡으로의 모드 변환이 완료되었다.
“······.”
단천은 변환이 완료된 박정을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박정이 지금 하고 있는 모습 때문이었다.
아주 머나먼 고대. 무림이 존재하기도 훨씬 이전에. 이 세계에 처음으로 존재했던 위대한 전사가 있었다.
인류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태초에 이 땅을 누볐던 그 존재는. 이 세상을 고고하게 탐험하고, 사냥했다.
언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 하지만 이 위대한 존재는 단언컨데 천마天魔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캬오오오오!
학명 ‘티라노사우르스’이. 단천의 앞에서 기계화된 몸을 뽐내고 있었다.
> 와
> 미쳤다
> 등장 이펙트 뭐냐고 ㅋㅋㅋㅋㅋㅋ
> 영혼을 갈아넣은 이펙트 ㅋㅋㅋㅋㅋㅋㅋㅋ
“스킨이 벌써 뜬다고?”
“그게 말이 돼?”
“와. 형. 스킨 만들고, 등장 이펙트 만들고, 며칠 되지도 않는 사이에 스킨팀이 영혼까지 다 부어만든 모양인데요?”
“꽤 잘 만들었군.”
칭찬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캡슐 밖에서 엄청난 살기가 단천의 등을 콕콕 찍었다.
‘이놈의 살기 감지는 어떻게 줄일 수가 없는 건지.’
상단전이 열리면 열릴수록 다른 신체능력은 계속 올라가는데, 어째 살기를 감지하는 능력만은 계속 퇴보한다.
이 시점에 자신에게 살기를 드러낼 사람이 있을 리가 없는데도 계속해서 살기가 몸을 찔러대고 있다.
“그런데 굳이 지금 스킨을 보여줄 필요가 있나?”
단천의 물음에 대한 답변은 바로 화면에 나왔다.
[야수도 박정의 새 스킨. ‘기계공룡’의 일반형 모델은 대회가 끝나는 즉시 판매를 시작합니다!]
“와아아아아!”
“미쳤다!”
“이것 때문이었군.”
단천은 혀를 짧게 찼다. 확실히 이 프로토타입 모델은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스킨이어야 했다.
하지만 현재 BJ천마가 보여주는 압도적인 인기와 퍼포먼스를 생각한다면. 그가 만들어낸 스킨을 단지 1회성으로만 끝내는 것은 아무래도 아쉽다.
그러니 우회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프로토타입’이라는 이름을 단천의 스킨에 부여하는 것일 터.
아마 새로 나오는 스킨은 도색이나 세부적인 형태가 바뀌어서 나올 것이다.
“그래도 좀 아쉬운데.”
그리고 퀄리티로 보건데 스킨 판매량이 꽤 많이 나올 게 분명했다. 광선검, 기계 몸체, 티라노사우르스라니.
스킨 판매량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세상이 잘못된 것일 터다.
[이 판매로 얻어지는 수익의 일부는 첫 랭크 1위. BJ천마에게 돌아갑니다!]
“···흐음.”
그제서야 단천의 고개가 위아래로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단천도 이 탑에서 서식하는 기계공룡이 늘어난다는 것이 사실은 기꺼웠다. 그런 상황에서 돈까지 준다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무혼이여. 내 몸이 마음에 드는가?”
“매우 마음에 든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단천은 박정의 동체를 바라봤다. 붉은 빛을 띄는 도색이 멋들어지게 찍혀 있는 몸이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붉은 색 도색은 양산형 기체에서 못 쓰도록 만들어야겠다고 단천은 생각했다.
“그보다 공룡 변신은 유지되는 건가?”
“이 몸은 이동할 때에만 유지된다. 전투를 들어가면 평소의 몸으로 돌아가서 싸우게 되지.”
“······.”
“그, 무혼이여. 왜인지 심각할 정도로 못마땅해 보이는 표정이로군.”
단천은 당연한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박정의 진짜 몸을 최대한 머릿속에 많이 담아놓으려고 노력했다.
게임이 시작되면 당분간 보지 못하게 될 터였으므로.
***
[게임이 시작됩니다!]
[대기실로 입장합니다!]
게임이 시작된다는 메시지와 함께 나온 곳은 자그마한 방이었다.
“와.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팀랭크 안 하고 솔로랭크 하는 건데.”
“솔로랭크 해서 뭐 하게?”
“나도 스킨 받았으면 엄청 대박나는 거잖아.”
“그러려면 천마 형 이겨야 되는데?”
“······아.”
그제서야 제로콜이 아쉬움을 깔끔하게 접었다. 다른 건 꿈이라도 꿔 보겠는데. 자신 옆에 있는 BJ천마를 이겨서 1위를 쟁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보다. 대진 순서는 어떻게 할 거야?”
천공 격투장은 한 팀이 전멸하기 전까지 1:1의 경기를 연달아서 치루는 맵이다.
“처음 시작부터 최대 레벨로 시작하는 맵이라. 우리 입장에서는 좀 불리해.”
“그래. 최소한 천마 형 버스는 타더라도 없었어도 이길만했다는 소리 정도는 듣고 싶어.”
팀 천마신교가 많은 시간을 들여서 준비한 것은 초반의 라인전이다. 이렇게 레벨이 높은 상태에서의 1:1은 그리 많이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단천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뭘 그렇게 웃어?”
“이전이라면 못 이길 것이라고 단언했을 텐데. 지금은 이길 생각부터 하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웃었다.”
“그러고보니 그렇네.”
자신들의 상대는 프로게이머다. 아마추어 게이머가 이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대. 하지만 지금 천마신교는 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이길 방법부터 찾고 있었다.
깔끔하게 지거나, 잘 지는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마음가짐.
무인으로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인 마음가짐이 그들의 안에 있는 것이다.
“이길 방법은 있나?”
“···1:1은 상성이 제일 중요해.”
“그런 상성같은 건 느껴본 적 없는데.”
‘그건 너니까 그런 거고.’
풀창고는 단천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한 다음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의 상황은 가위바위보와 비슷해. 상대가 프로이니만큼 상성이 밀리면 거의 확실하게 진다. 아마 상성이 비슷한 상태라면 이길 가능성이 낮고, 상성이 유리하다면 반반 정도는 해 볼 만해.”
“2/3 확률로 지는 가위바위보네?”
“···대충 그렇지.”
심지어 가위바위보를 이기더라도 반반인 수준의 가위바위보다.
“가위바위보 비유는 적절하기 그지없었다.”
“왜?”
“가위바위보는 상대가 뭘 내는지 보고 바꾸면 반드시 이길 수 있으니까.”
‘그게 뭔 개소리야.’
말만 보면 상대의 엔트리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풀창고가 어처구니없어하는 모습과 달리 단천에게는 정말로 상대의 엔트리를 확신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바로 상단전이 그것이다. 천기를 읽고 앞일을 예측할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
천기를 읽는 능력을 이딴 데다 쓴다면 상단전을 뚫기 위해서 입산수도하는 수많은 수도자들이 게거품을 물었을 게 확실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단전을 뚫은 본인이 그렇게 쓰고 싶다는데.
단천은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를 띄웠다.
사실 처음에는 상대 팀에서 마음에 드는 ‘셔벗’과 자신이 만나기 위해서 대진표를 짜려고 했었다. 하지만 풀창고들이 저렇게까지 전의를 불태우는 것을 보니 조금 뒤를 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자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절벽으로 밀어 주는 것이 스승 아니던가.
“엔트리는 본좌가 짜도록 하지. 다만 조건이 있다.”
“조건?”
“최상의 엔트리가 나왔는데도 상대에게서 승리를 못 한다면. 한달간 특훈을 하는 거다.”
“······.”
“그냥 하늘에 맡기고 경기하고 싶어졌어.”
“이미 늦었다.”
“왜! 방금은 뭔 선택지가 있는 것처럼 말했잖아!”
“정정하지. 조건이 아니라 통보였다.”
풀창고가 절벽에서 밀려나는 새끼 사자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인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측은지심에 한 걸음이라도 물러날 수밖에 없는 표정이었다.
인간의 마음이 남아 있는 사람에게나 통하는 표정이라
단천에게는 조금도 들어먹히지 않았다는 사소한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