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J천마-169화 (169/212)

39. 낙진이 끝나고 (2)

문을 열고 나오자 설국이었다. 하얀 눈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종말 ‘빙하기’가 시작됩니다.]

[체온 하락이 상승합니다.]

[동상을 입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방호복의 눈쪽에 순식간에 얼음꽃이 폈다. 단천은 시야를 가리는 얼음을 닦아냈다.

“준비를 혼자 시켜드린 것 같아서 죄송하네요. 가방 다 싸 놓기까지 하고.”

“알면 됐다.”

“그보다 꽤 오래 잠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몸이 잘 움직이네요.”

“근육의 긴장이 유지되도록 몸을 계속 움직여 줬으니까.”

동면에 들었다 일어나는 생물중 30%정도는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 다시 일어났을 때 제대로 몸이 움직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단천은 꽤 노력을 기울였다. 매일같이 혈도를 자극하고, 근육을 풀어 주고, 음식의 배합에 신경썼다.

그 결과로 일행은 잘 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컨디션으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원에서 눈썰미가 있는 의원이 봤다면 무릎을 꿇고 배움을 청할 것이 분명한 세심한 준비였다.

그러나 이곳은 중원이 아니었다. 단천도 딱히 이런 것이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눈이 온 건가.”

“너무 추운데. 날씨가 갑자기 이렇게 되는 거에요?”

“딱히 더 추운 것 같지는 않은데.”

단천은 손끝을 들어서 기온을 가늠했다. 한국에서는 이례적인 수준의 한기. 북해빙궁과 비슷한 정도 수준의 냉기다.

아마 단천이 종말중에 선택한 ‘폭설’과 ‘혹한’의 영향일 터였다.

> 결국 이 꼬라지가 된 게 다 천마님 때문이란 거네

> 당신이 죽였어!!!

“아무튼 내 잘못은 아니다.”

소복히 쌓인 눈을 바라보던 이중한이 입을 열었다.

“핵겨울이군요.”

“핵겨울?”

“핵무기 사용으로 온난화가 극한에 치달으며 전 지구적인 빙하기가 촉발되는 겁니다.”

“그렇군.”

설명을 들은 단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천도 핵전쟁이 일어난 후에 대해서 읽었던 적이 있었다. 단순히 단천이 옵션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개연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 ?? 이게 이렇게 이어진다고?

> 종말들을 죄다 고르는 게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냐?

> 좀비 발생->좀비 죽이려고 핵 발사->핵겨울 발생 대충 이런 식인 거냐

> 단순히 종말이 연이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종말이 다음 종말을 촉발하는 형태였네

> 그러니까 지금 종말 죄다 선택한 모드가 사실은 ‘스토리 모드’란 거지?

> 제작사 ㅁㅊㄷ ㅋㅋㅋ

> 이런 빌드업이 된다고??

채팅창에서는 종말 생존자의 스토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충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호평은 옆에서 송출되고 있는 생존투쟁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 생존투쟁은 이런 시나리오 없음?

> 없어

> 없어도 상관없지 외견이 훨씬 더 좋은데

> 외견 좋으면 뭐함 ㅋㅋㅋ 지금 와서 돌아보면 걍 아포칼립스 게임 1인데

> 게임 그냥 베껴놓기만 했으니 이런 진짜 스토리모드 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생존투쟁에서는 이런 스토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종말이 발생하고 그 종말에서 계속해서 파밍하고 살아남는 것이 목적인 게임인 것이다.

물론 이것이 게임의 핵심적인 재미 요소인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추가적인 ‘스토리’의 존재는 게임에 새로운 맛을 추가로 부여한다. 단순한 아포칼립스류 게임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여론은 ‘종말 생존자’ 쪽이 훨씬 재밌어 보인다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단천 입장에서는 종말이 연이어지는 것이 자신 탓이 아니게 됐다는 것 정도면 충분했다.

단천은 눈을 헤치며 걸어나갔다. 학교 내부에 있는 건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채였다.

[눈이 높게 쌓여 있습니다. 스테미너가 빠르게 소모됩니다.]

“이 정도 추위에 장시간 움직이는 건 불가능해 보이네요.”

“이 정도 눈이면 오토바이로 움직이기도 힘들어요. 트럭 같은 거면 모를까.”

“저희 생물학관에 운송용으로 쓰던 트럭이 있습니다.”

“운송용?”

“이것저것 옮길 일이 많거든요. 실험용 쥐라거나, 원숭이라거나.”

“그럼 생물학관으로 가도록 하지.”

쌓여버린 눈을 헤치고 걷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단천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일행이 헉헉거리며 걷는 와중에도 단천은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묘하게 편해 보이시네요.”

“요령이지.”

“눈 위에서 쉽게 걷는 요령도 있나요?”

“등평도수의 요령과 비슷하다.”

“등평도···뭐요?”

“균형을 잘 잡고, 바닥에 발을 디딜 때 깊게 빠지지 않도록 하는 거다.”

청연이 단천의 걸음걸이를 바라봤다. 실제로 단천의 발은 그리 깊게 빠지지 않고 있었다. 단천이 매고 있는 짐의 크기가 다른 사람들의 두어배는 되는데도 그랬다.

“그런 요령은 어디서 배우는 거에요? 국대 감독은 그런 것도 배워요?”

“이런 것도 못 배우면 못 살아남지.”

“어디서요.”

“북해빙궁.”

“북해빙궁이 어딘데요?”

“쪼잔한 곳.”

저 인간에게서 뭔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들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챈 청연은 단천의 발걸음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몇 번 시도한 끝에 어설프긴 하지만 걸음걸이를 비슷하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고 나자 걷는 것이 좀 더 편해졌다.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싶었는지 청연은 뒤에 있는 이중한과 김용태에게 요령을 설명했다.

“그, 두 분도 이렇게 걸어 보세요. 발 모양을 좀더 안으로 하고, 한 발이 떨어지는 시간을 최대한 짧게 한다는 느낌으로.”

[일행이 눈길에서 걷는 걸음걸이가 숙련됩니다.]

[일행의 체력 소모도가 줄어듭니다.]

‘꽤 잘 배우는군.’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쉬이 배운다. 그리고 그것을 주저 없이 남에게 가르쳐준다. 남에게 가르쳐준다고 돌아올만한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청연은 이중한이 발을 계속 헛디디자 짐 일부를 자신이 나눠받았다.

“그렇게 살면 오래 못 산다.”

단천은 가볍게 충고했다. 대협이라는 소리를 놈들 중에 오래 살아남은 꼬라지를 많이 못 봤던 탓이다.

“지금 세상 망했는데도 살아남아 있거든요?”

“그냥 운이 좋았던 거지.”

“당장 천마 감독님도 짐이 그렇게 크잖아요.”

“본좌는 너희가 없어도 살아남아야 하니까 짐이 큰 것 뿐이다.”

> 짐이 큰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냐 ㅋㅋㅋㅋㅋㅋ

> 어째 혼자 짐이 커다랗다 싶었더니 ㅋㅋㅋㅋ

> 희생정신때문인줄 알았네;;

> 극한의 이기심은 이타심과 다르지 않다 ㄷㄷㄷ;

단천이 그렇게 말하거나 말거나 청연은 이중한의 짐을 옮겨받은 채 걸음을 옮겼다.

***

“이쪽은 그리 운이 좋지 못했군.”

생물학관은 반 정도는 부서져 있는 상태였다. 핵폭탄을 제대로 직격한 모양이었다. 학관에 도착하자마자 이중한과 김용태는 부리나케 사무실로 달려올라갔다.

한참이 지나서 나온 두 명의 손에는 트럭 열쇠 외에도 양 손 가득히 뭔가가 들려 있었다.

“그건 뭐지?”

“저희가 쓴 책과 논문들입니다. 그리고 실험 샘플도···.”

“이건 뭐에요?”

“모아놓은 자료와 논문이 들어있는 하드 디스크입니다.”

“···다른 건 몰라도 USB랑 하드 디스크는 쓸모없지 않나?”

컴퓨터가 작동하기 위한 전력조차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판이다. 그런데도 둘은 USB와 하드 디스크까지 바리바리 챙겨나왔다.

하긴. 그들 입장에서는 평생 연구한 물건들이다. 세상이 망했다고 해서, 그리고 연구가 아무 의미없어졌다고 해서 쉬이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그보다 샘플이라니.”

“저희가 연구하던 바이러스를 배양한 앰플들입니다.”

“···지금 핵무기 쏜 게 좀비들 때문이고, 좀비가 생겨난 게 좀비 바이러스 때문이라는 건 기억하고 있지?”

“쉿. 이러스가 들으니까 조용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러스?”

“저희가 연구하던 바이러스의 애칭입니다.”

애칭이고 자시고 바이러스가 사람 말을 들을리가 있나. 단천의 표정이 썩거나 말거나 이중한과 김용태는 진지하게 앰플들의 귀를 막고 있었다.

물론 앰플에게 귀가 존재할 턱이 없었지만 행동이 그랬다는 말이다.

> 야 쟤들 버리고 가

> 돌겠네 진짜 ㅋㅋㅋㅋㅋ

> 박사학위 있는 애들 치고 정상적인 애들을 본 적이 없음;;

둘을 머리통을 후려쳐서 정신교육을 할 지 망설이던 단천은 혀를 쯧 찼다. 애초에 트럭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두 명의 덕분이니. 이 정도는 허용해 줘야 할 터였다.

“뭐. 그리 무거운 것도 아니고. 챙겨두도록.”

“감사합니다! 트럭은 뒤쪽 주차장에 있습니다! 가시죠!”

단천이 의외로 간단하게 허락해주는 것을 본 청연이 가방에서 열쇠를 꺼내들었다.

“···나도 바이티랑 같이 하고 싶었는데.”

“바이티는 또 누구야.”

“제 오토바이 이름이요.”

“방금 지어낸 거지. 헛짓거리 하지 말고 타라.”

“···칫.”

생물학과의 트럭은 방한대책이 굉장히 잘 되어 있었다. 짐칸을 튼튼하게 덮고 있는 천부터, 안쪽은 스티로폼이 꼼꼼하게 둘러쌓여 있었다.

“생물학과에서는 동물 말고도 식물같은 것들을 옮길 때가 많거든요. 열대 식물의 경우에는 추운 데 잠깐만 있어도 죽어버리니까. 이런 트럭이 필요한거죠.”

“운이 좋군. 짐칸에 타는 사람이 얼어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될 테니.”

“왜 본인이 뒤에 탈 생각은 안 하시는 거죠? 가위바위보에서 감독님이 질 수도 있는데.”

“가위바위보를 왜 하지? 본좌가 가장 강한데.”

“······.”

> 공정은 힘이 약한 자들이나 말하는 것

> 공정 그게뭐냐 본좌에게는 힘이 있다!!

> 힘이 있는데 왜 공평하게 게임함??

> 공정무역 vs 공정무력

트럭에 짐을 싣고, 앉을만한 자리를 만들고 난 일행은 출발을 준비했다. 물론 단천은 조수석이었다. 선탑자로서 주변을 확인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천마님.”

“왜?”

“이제 어디로 나갈 생각이십니까?”

“아마 식량이 많은 시내로 먼저 가야겠지.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할 거다.”

혹한 외에도 해일 등의 종말이 아직 한참 남아있다. 다른 데 쓸 만한 시간이 딱히 없는 것이다.

“혹시 학교 뒤쪽을 경유해서 가면 안 되겠습니까?”

“뒤쪽?”

“네.”

학교는 산에 위치해 있다. 학교 뒤쪽을 경유해서 간다는 것은 그만큼 시간을 손해보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핵폭탄으로 인해 지반이 약해졌을 테니 산사태가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위험 가득한 선택지다.

“왜지?”

“종자보관소가 거기에 있습니다.”

종자보관소. 세계 멸망 등 극한의 상황을 대비해서 씨앗들을 보관해 놓는 장소다.

거대한 겨울이 찾아왔으니 종자보관소의 종자들을 꺼내야만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은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걸 구태여 우리가 꺼내 써야 하나?”

지금은 당장 눈 앞을 챙기기도 급급한 순간이다. 종자보관소를 들르는 것은 트럭을 찾는 김에 연구자료를 트럭에 쌓는 것과는 아예 다르다.

그런데도 이중한은 구태여 종자보관소를 가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단천은 이중한의 눈을 바라봤다. 청연을 구할 때와 비슷한 눈빛이다. 협객의 눈. 누군가가 해야 한다면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인간의 눈.

평소의 단천이라면 방금의 말을 들은 순간 이중한을 옆차기로 트럭 밖으로 밀어낸 다음 버려 놓고 출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단천은 그러지 않았다.

“얼마 전에 본좌는 AOS를 했었다.”

“AOS··· 아. 저희 대학원생들도 많이 하는 게임이죠.”

“그 AOS에서 본좌의 포지션은 언제나 탑이었지.”

“탑이면 그 정신병자들 많다는 포지션···. 아, 아닙니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정신병자들 많은 포지션이긴 해

> 그 정신병자들의 정점이 바로 눈 앞에 있는 인간입니다

“본좌가 왜 항상 탑에 올라갔는지 아느냐?”

“모르겠습니다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 뭔 개소리야 ㅋㅋㅋㅋㅋㅋㅋㅋ

> 누군가 해야 되는 일은 맞긴 한데

> 남이 하려고 하면 강제로 뺏어서 탑 갔잖아 ㅋㅋㅋ

> 누군가 해야 하는 일(맞음) 항상 탑 간거(맞음)

> 거짓말은 안 했다(거짓말만 안 했다)

“네 신념 어린 눈에서 본좌는 탑솔러의 모습을 봤다.”

이중한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단천을 바라봤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슨 헛소리인진 모르겠지만 그 뜻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요약하면··· 종자 보관소로 가도 된다는 말이죠?”

“그래. 가도록 하지.”

단천의 고개가 끄덕였다.

띠링!

"?"

단천이 고개를 끄덕이지마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히든 메시지]

[선택지 : ‘종말에서도 살아남는 것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생존 포인트가 가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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