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육도천 (1)
다음 날 새벽. 언제나처럼 이른 새벽에 일어난
단천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휴대폰에 찍혀 있는 것은 멸겁천에게 받은 육도천이 있는 장소였다.
[칭하이성, 쿤룬, 천산로]
“···좀 어처구니없기는 하군.”
쿤룬 산맥은 곤륜파가 있던 곤륜 산맥이다. 알다시피 곤륜파라고 하면 마교가 발호하면 허구한 날 천마신교에게 가장 먼저 공격받는 사실상 마교의 앞마당 멀티나 다름없는 장소.
그리고 그 중 천산로라고 하면 곤륜 산맥 중에서도 십만태산의 중심에 있는 장소.
그러니까, 원래 천마신교가 있던 장소에 육도천이 있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숨길 생각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천마다운 오만함이라고 해야 할까.
“그럼. 다시 중국을 가야 한다는 말인데···.”
얼마 전에도 중국에 간 터라 딱히 여권은 필요없었다. 그러니 여권 티켓을 발급해 줄 사람만 있으면 된다.
단천은 주저 없이 휴대폰에 있는 이태흠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연결음이 들리고 이태흠의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쿤룬에 가야 할 일이 있다.”
[······그런가.]
‘어쩌라고’라는 말을 목끝까지 삼킨 것 같은 목소리였지만 그래도 지난 번과는 달리 목소리가 침착했다.
[그냥 예의상 물어보는 건데. 가려는 이유는 뭐지?]
“방송 콘텐츠.”
[그래. 잘 가도록.]
“그래. 쿤룬에 가야 하니 표를 끊어 두도록. 네 표와. 내 표. 두 개.”
[그럴 필요 없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지금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것인가. 단천은 허리에 있는 천마검에 손을 올렸다. 하긴. 얼마 전에 하인라인의 시총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서도 손가락에 들어가는 수준으로 커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렇게 덩치가 커졌으니, 한 번 자신에게 이를 들이댈 만한 시점이 온 것이다.
오랜만에 천마검이 피를 보겠군.
“잘 알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길래 살기가 그렇게 뚝뚝 흘러내리는지는 모르겠지만. 표를 끊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뭐라고?”
단천이 이태흠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셨습니까. 이번 비행의 기장을 맡은 서우혁입니다.”
“···개인용 비행기라.”
단천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개인용 경비행기를 바라봤다.
얼마 전부터 해외 출장이 잦아졌다는 이유로 하인라인측이 산 비행기라고 했다.
“해외 출장이 많은데 본좌가 타도 되는 건가? 최소한 임원이나 이태흠은 같이 와야 탈 수 있는 것 아닌가?”
“이태흠 사장님 말씀으로는 회사 임원진들의 인가까지 다 받았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BJ천마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허가도장을 찍어 준 것에 가까웠지만.
“혼자 가다니 아쉽게 됐군. 사장도 쉬는 날이 필요할 텐데 말이야.”
이태흠이 듣는다면 ‘네놈 만나는 게 쉬는 날이냐?’라는 소리와 함께 욕설이 같이 날아왔을 말을 태연하게 하며 단천은 개인 비행기에 올라탔다.
비행기의 움직임은 꽤 쾌적했다. 단천은 의자에 누운 채로 명상에 빠져들었다.
“마실 건?”
“음료수와 와인, 샴페인이 있습니다. 요청하시면 스튜어디스가 가져다 드릴 겁니다.”
이 좋은 비행기에 준비해 놓은 게 고작 와인과 샴페인이라니.
“···그 외에는 몸보신용으로 냉동보관한 한약, 홍삼 추출물의 함량을 높인 특제 홍삼캔디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
단천의 입에서 실로 오랜만에 감탄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한약과 홍삼캔디라면 세상 누구나 좋아하는 최고의 먹거리 아니겠는가.
단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홍삼캔디를 입 안에 털어넣었다.
“···저걸 진짜 먹는 사람이 있네요.”
“저 BJ천마라는 사람 먹으라고 사장이 무조건 상비해두라고 지시했다던데.”
왜인지 뒤에서 이런저런 음모론이 나돌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단천은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자신은 자칫하면 질 수도 있는 전투를 눈 앞에 두고 있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다.
“혹시 가시는 데 필요하시다면 휴대용 VR기기도 구비되어 있습니다. 최신 영화와 드라마도 완비되어 있으니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단천은 손짓으로 거절의 의사를 나타낸 다음 눈을 감았다. VR도 나쁘진 않지만. 지금은 명상이 필요하다.
눈을 감고 기나긴 호흡을 몇 번 내뿜어내던 단천의 숨이 서서히 길어졌다.
***
“오랜만이군.”
단천은 검게 물들어있는 주변을 돌아본 다음 짧게 말했다. 자신의 심상心像을 돌아보는 것은 지난 번 종말 생존자의 가수면 상태에 빠진 이후 처음이다.
심상에 가라앉는 것은 무인으로서 자주 하면 할수록 좋은 것이지만. 단천은 자신의 심상에 빠지는 것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그 시간에 수련이나 더 하는 게 낫다는 실사구시적인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단천이 심상에 침잠하는 것을 그만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저놈의 벽은 언제쯤 무너지나.”
단천의 눈 앞에 서 있는 거대한 벽. 자신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벽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야만 저 벽 너머로 갈 수 있을 것이다.
이 벽에 단천이 도달한지 몇십 년이 지났다. 다른 자들의 대답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답은 언제나 자신만의 답이 존재하는 법이다. 제로콜이 총으로 자신의 무를 갈고닦는 것이나 풀창고가 끝끝내 팬티만 입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아니. 그건 자신만의 답이 아니라 오답이지.”
팬티쯤이야 입고 돌아다닐 순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대로 무인이 총을 쓴다는 건 선을 좀 많이 넘었다.
단천은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서 떠다니는 잡념들을 지운 다음 눈 앞에 있는 벽을 다시금 바라봤다.
─ 시주는 왜 사시는 게요?
“나는 왜 사는가.”
무의 끝에 다다르기 위해? 영원제일인이 되기 위해? 둘 다 뻔한 대답이었고 틀린 대답이었다.
“이게 땡중 놈의 쓸데없는 선문답이었다면 그냥 대충 흘려버릴 수 있을 텐데.”
─ ···지금까지 빈승과의 선문답을 죄다 그런 식으로 넘겨오신 게요?
정 맘에 안 들면 힘으로라도 제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벽은 단천 안에 있는 벽이다.
남에게 납득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납득해야만 나아갈 수 있는 벽 말이다.
“···그래도 조금은 얇아진 것 같기도 하고.”
중원에 있는 내내 저 벽은 조금도 줄어들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돌아오고 나서. 저 벽의 크기는 눈에 띌 정도로 줄어들어 있었다.
단천 자신이 정답을 향해 다가가고는 있다는 증거다.
단천은 벽을 톡톡 두들겨 얇아진 벽을 확인했다.
“이 정도면 그냥 내공으로 부숴버릴 수 있는 수준 아닌가?”
─ 심득을 가로막는 벽을 내공으로 뚫어 버리겠다는 것이 말이오 방구요? 그 말대로 심득을 무공으로 얻을 수 있으면 무공 강한 순으로 성인成人을 나누고 말지!
“그것 꽤 괜찮은 생각이로군. 달마의 무공은 인정하지만 석가불은 무공으로 성취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성인 취급 받는 게 이해가 안 갔거든.”
─ ······.
고승중의 고승인 무명승도 한순간 말을 잊게 만든 단천은 혀를 끌끌 찬 다음 돌아섰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내공으로 심득의 벽을 부술 수 있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단천은 멍청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우우웅! 단천의 손에 어느 새 들린 검에서 수백 장 길이의 검강이 뻗쳐올랐다.
─ 시, 시주? 진짜로 심상의 벽에 내공을 부딪혀 볼 생각이오?
“그러고 보니 내공으로 벽을 두들겨 보지는 않았던 것 같아서.”
단천의 검강이 벽 위를 후려갈겼다.
꽈아아아아앙!
세계 전체가 뒤집히는 소리가 났다. 단천의 심상, 그리고 현실에서 동시에 단천의 입에서 기침이 터져나왔다.
쿨럭! 쿨럭!
가만히 누워 있던 VVVIP의 입에서 핏줄기가 터져오르는 것을 본 스튜어디스가 기겁을 했다.
“피, 피가 나요!”
“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아무 일 아니니 정상운행하도록.”
입에서 생피가 줄줄 흐르는데요?
VVVIP가 피를 토한다? 당장이라도 기장에게 이야기해서 회항을 해야 하는 긴급 상황이다.
하지만 VVVIP의 입에서 생피가 흘러내리는 것을 본 스튜어디스의 눈이 흔들렸다.
이태흠에게서 수십 번은 언질받은 VVVIP에 대한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스친 탓이다.
‘저 인간이 하고 싶다면 뭐든지 하게 해 줘. 그게 뭐가 됐건. 얼마나 비이성적이건. 그러려니 하도록.’
머릿속에서 수천 번을 고민한 스튜어디스는 침을 꼴딱 삼켰다. 출혈량으로 보건데 결코 멀쩡할 수는 없다.
지금이라도 정신을 잃고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데···.
“휴지.”
“아,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이 VVVIP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해 보였다. 피만 여기저기 흩어졌다 뿐이지 전혀 몸에는 이상이 없는 태도에 스튜어디스는 잠시 당황했다.
저 보라. 피를 아무렇지 않게 닦아내고. 아까 받았던 녹용을 쫍쫍거리면서 마시는 모습을.
쪼옵!
탁!
쪼옵!
탁!
쪼옵!
탁!
약포를 앉은 자리에서 네다섯 포를 집어삼키는 단천을 바라보던 스튜어디스가 믿지 못한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거 한 포에 백만원씩은 한다던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떡하죠? 회항할까요?”
“아니. 회항 없이 그냥 가는 걸로.”
“문제가 생기면요?”
“하는 모습 봐. 멀쩡하잖아. 문제 안 생겨. 그리고 만에 하나 문제가 생겨도, 저사람 관련해서는 하인라인이 모조리 다 뒤집어써준다고 했었잖아.”
“···그야 그렇죠.”
“그러니 괜찮아.”
하인라인의 현재 한국에서의 이미지는 한국을 대표하는 차세대 기업이다.
복지정책도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퇴사자도 전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완벽 그 자체인 기업 아닌가.
그런 화이트기업의 총수의 말은 무겁디무겁다. 그 이태흠이 책임진다고 했으니. 그 말대로일 것이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두 스튜어디스의 말을 듣고 있던 단천의 고개가 끄덕였다.
‘보아하니 회항을 막을 필요는 없어 보이는군.’
단천은 품에서 꺼내려던 침을 다시 집어넣었다.
회항을 막겠다고 설친다면 다소 귀찮은 일이 생겼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다행이였다.
역시 이태흠이 선정한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까. 이태흠의 일처리는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앞으로도 무슨 일이 있으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이태흠에게 적극 요청해야겠어.’
그 완벽한 인선과 일처리 때문에 이태흠의 기나긴 삶에 가면 갈수록 어두운 구름이 끼어 가고 있었다.
이태흠의 능력을 인정한 단천은 심상에 있는 벽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겨우 금 좀 간 게 전부군.”
단천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여러 번 두드린다면 부서지긴 할 테지만 그러려면 아무리 단천이라도 생사의 기로를 몇십 번은 오가야 했다.
그렇게 심상의 벽을 두드리면서 듣게 될 무명승의 잔소리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귀가 아플 지경.
심상의 벽을 내공을 써서 뚫는다는 게 말이나 되냐. 절대 안 되는데 이게 왜 되냐. 무공으로 다 해결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거 아니냐. 같은 잔소리를 계속 쫑알거리겠지.
그러기는 귀찮았다. 역시 벽을 넘는 방법은 가장 단순한 게 최고다.
“···거의 도착했군.”
“···그렇긴 합니다만. 어떻게 아신 거죠?”
“아는 방식이 있다.”
수십 리가 떨어져 있을 텐데도 느껴질 정도의 아찔하기 그지없는 살기.
이 살기를 마주하고도 모른다면. 천마 실격이다.
심상의 벽을 마주하고 넘는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
생사를 걸어야 하는 적을 마주하고. 이기는 것.
“한 번. 붙어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