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 자격 (32/40)


32. 자격
2023.07.06.


(이 작품은 12세 이상 감상을 권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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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은 잠가두었던 제 서랍을 열어 가장 끝쪽까지 손을 뻗었다.

손에 날카롭게 깎인 모서리의 질감이 느껴지고, 그것을 잡아당기자 언제나 그렇듯 제 꿈속에 등장하는 대형 짐승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빨 모형의 목걸이가 나타났다.

칸은 그것을 손바닥 안에 꽉 쥐었다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뾰족한 이빨 표면이 손에 닿을 때마다 아찔한 통증이 이어졌다.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는지, 어디서 받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칸은 저릿해지는 손을 다른 손으로 꾹 눌러 만지며 억지로 긴장을 완화시켰다.

어쩌면 칸은 자신이 보통의 인간들과는 다른 존재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이번만큼이나 강렬하게 정체성에 혼란을 느낀 건 처음이었다.

어릴 때부터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성장했고, 흔하지 않은 은색 빛이 간간이 도는 잿빛 머리칼을 지녔으며, 때때로 눈동자가 금빛처럼 찬란하게 빛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괜찮다 여겼다. 나는 그저 모두가 그렇듯 다를 뿐이라고.

하지만 최근의 칸은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할 힘을 썼고, 설명하지 못할 몸의 변화를 그 누구보다 직접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무언가가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변한 게 아니라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칸은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의 몸이 이전의 자신과 다르다는 걸 명백히 느끼고 있었다. 공기도, 촉감도, 모든 것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지고 혈류를 타고 흐르는 신경은 작은 솜털의 움직임까지 읽어내고 있었다.

똑똑.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자, 생각에 잠긴 채 숨소리조차 침묵으로 일관하던 칸이 목걸이를 주머니 안으로 넣곤 방문을 열었다. 그 앞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기리였다.

시원시원한 성격인 기리는 평소와 달리 좀 더 조심스러웠다.

문턱을 앞에 두고 쉽게 그 발을 넘지 않는 모습이 그랬고, 검은 구름처럼 떠다니는 깊은 눈동자로 칸을 일부러 직시하지 않는 눈빛이 또 그러했다.

시몬과 요한나조차 칸을 어쩌지 못하고 슬퍼하는 데다가, 기리는 이상하게도 형제들에게 느끼는 것처럼 칸에게 무한한 책임감과 애정까지 느끼고 있었다.

“칸, 잠깐 괜찮아?”

칸은 대답 없이 상체를 틀어 기리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의 신호를 보냈다.

기리는 칸이 비켜서고 나서야 발을 내디디며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치 친한 동생의 근황을 묻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같은 집에 사는데 요 며칠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고저 없이 떨어지는 칸의 목소리에 기리는 잠시 시간을 두었다.

“무슨 생각?”

“그냥…… 제가 누군지. 어디서 왔는지. 전부 다요.”

그날 일은 형제들에게도 칸에게도 쉽게 잊힐 사건이 아니었다.

칸은 분명 ‘인간답지’ 않은 과격한 실수를 했고, 그것은 늑대인간의 힘으로도 완벽하게 제어하기 힘들 정도의 괴력이었으며, 이성적으로 억누를 수 없었던 명백한 폭주였다.

칸은 정신적으로 노곤한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더니, 이내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 마른세수를 했다. 형제들이 그레이빌에 도착한 후 벌어진 많은 일은, 마음이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이 감당하기엔 벅찼을 것이다.

“그날 애들이 없었다면 전 분명 크록을…….”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네.”

칸은 부정하지 않고 순순히 인정했다.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고, 기리는 그런 칸을 나무라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기리는 섣부르게 옳고 그름을 타인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 그가 물었다.

“그래서. 네가 죽였어?”

반쯤 숙여진 칸의 고개가 그 물음에 느릿하게 위로 떠올랐다.

“묻잖아. 그래서 크록을 네가 죽였냐고.”

기리는 단호했고, 또 명확한 어조로 다시 질문을 반복했다.

“아니요.”

“…….”

“전 크록을 죽이지 않았어요.”

단정하게 돌아오는 칸의 대답에 기리는 놀라지 않았다.

크록을 죽이지 않았다는 건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칸의 입을 통해 확실하게 들을 필요가 있었다. 조금이라도 미심쩍은 건 단 하나도 놓치고 지나갈 수 없었다.

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해야 했고, 동시에 나타난 적에 대해 분개해야 했으며, 하루라도 빨리 태세를 전환해 앞으로 닥쳐올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했다.

“그런데 경찰에겐 왜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지?”

다시 침묵이다.

칸은 분명 기리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기리는 그게 무엇이든 칸이 크록의 죽음이나 실종자들과 관계가 없다면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그의 입을 열게 할 수도 있었지만, 기리의 마음 안에는 칸에 대한 믿음이 이미 생기고 난 후였다.

“좋아. 더는 묻지 않을게. 우린 지금부터 범인을 찾을 거야.”

“……!”

기리의 선언은 칸이 예상하지 못한 범주의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그 범인은 네가 상상할 수도 없는 존재지. 그건 이 도시의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고. 최대한 조심하겠지만 어쩌지 못하고 우린 아주 위험해질 거야.”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렇게 겁을 줘서라도 자신을 떼어놓으려는 걸까. 칸은 기리의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드는 의문이라곤, 경찰에 맡기고 물러나도 될 일에 기리가 왜 매달리는지였다.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제 형제들을 끌어들이는 건 좀처럼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경솔한 선택 같아 보였다.

“그런 위험한 일을 왜 하려고 하죠?”

“해야 할 일이니까.”

단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기리의 답이 딱 떨어졌다.

“우리들은 해야만 해. 그 일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기리는 입안에 맴돌던 말을 결국 뱉기로 마음먹은 듯,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칸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칸, 함께 갈래?”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위험할 테지만. 그래도 함께할래? 우리와.”

칸은 심장이 뻣뻣해지는 것 같았다.

어렸던 그때, 썩고 병든 창고에서 시몬과 요한나를 만난 그 기적 같은 순간만큼이나 벅찬 감정이 휘몰아쳤다. 하지만 칸은 신중했다. 그는 말의 무게를 알았다.

어떤 말도 쉽게 내놓지 않은 채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낸 칸이 겨우 내뱉은 건 꽤 아픈 질문이었다.

“……저에게 자격이 있을까요.”

“자격?”

“누군가를 구하고, 해칠 누군가를 찾아내 응징하고, 그 모든 것에 대한 자격이요. 전 스스로를 제어조차 하지 못하고, 내가 누군지…… 어떤 상황인지조차 가족에게도 형에게도 말하지 못하는데. 그런 제가 뭔갈 할 수 있는 걸까요.”

“칸. 누군가를 구해내는 일에 자격은 필요 없어.”

한때는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여겼던 적도 있었다. 분노와 복수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종족을 제외하곤 모든 것을 멸하리라 그렇게 마음먹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리는 언젠가부터 본능적으로 칸의 존재감을 느끼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이 자신을 압도하는 두텁고 무거운 기류까지, 모든 오감이 그를 향해 칸을 곁에 두라 말하고 있었다.

소년이 뱀파이어가 아니라면 그때부턴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하는 건 어차피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난 지금 한 명이 아쉬운 쪽이라서.”

기리가 미소를 띠며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칸은 더 이상 생각하기를 멈췄다.

그의 말대로 누군가를 구해내는 데 자격은 필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존재라고 해도.

**

‘함께 갈 거야. 너희와.’

‘함께’라는 단어만큼 늑대인간에게 익숙하고 또 낯선 말이 또 있을까.

그것도 자신의 무리로부터 정체를 알 수 없어 의심을 받는 칸을, 그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만큼 어색하고 또 불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엔지는 기리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송곳 같은 말들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칸의 앞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밝힐 수가 없어, 그는 그저 번뜩이는 눈으로 기리와 칸을 번갈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없어.”

나자크가 한숨을 흘리며 기리의 말을 대신했다.

당황스럽긴 타헬과 나자크 또한 마찬가지였다. 단지 엔지처럼 직접적으로 제 감정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었다.

엔지는 지끈해지는 제 이마를 손으로 짚으며 이능력을 썼다.

-니들은 형 안 말리고 뭐 했냐?

-우리 말 들을 인사였음 애초에 칸을 받아들이지도 않았겠지.

-받아들였다고? 대체 무슨 근거로.

굳이 그걸 말로 해야 알겠냐는 듯 나자크는 턱 끝으로 칸의 옆에 찰싹 붙어 서 있는 기리를 가리켰다.

-야. 다 들리거든? 내 욕 할 거면 딴 데 가서 해, 자식들아.

기리가 헛웃음을 뱉으며 대놓고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말하는 형제들을 향해 장난스럽게 일침을 놓았다.

-칸 앞에선 우리 능력을 맘껏 쓰지도 못하잖아. 대체 어쩌려고 그래?

늑대인간은 오로지 감각과 서로에 대한 신뢰로 철저히 움직인다. 그런 관계 속에서 대체 인간인 칸을 무슨 수로 써먹는단 말인가. 엔지는 이토록이나 비효율적이고 감상적인 선택이 곧 후회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엔지의 말에 형제들이 모인 정중앙으로 걸어 나온 기리가 차분하게 설명했다.

“알다시피 칸은 그저 그런 ‘보통’ 인간과는 달라. 그건 너희들이 더 잘 알겠지. 도움이 됐으면 됐지, 피해가 될 일은 없을 거야. 그건 내가 책임져.”

기리는 기꺼이 칸을 제 등에 이고 질 생각이었다. 물론 이건 오래 지켜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칸이 제 등에 업힐지, 자신이 칸의 등에 업힐지는 그 누구도 모르는 거니까.

“타헬과 엔지, 나자크와 칸. 그리고 나까지 이렇게 세 팀으로 움직인다. 주변에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은 샅샅이 살피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있으면 연락을 주고받는 걸로. 그리고 앞으로 해가 지고 난 후엔 마을 일대를 순찰할 거야. 범인은 주로 밤에 움직이니까.”

‘밤’에 움직인다는 말이 칸과 형제들에게는 다르게 들릴 것이 분명했지만, 누구도 그 말에 대해 말을 꺼내진 않았다.

“나자크. 칸을 도와줘.”

기리가 나자크와 칸을 한 조로 붙인 이유는 명백했다.

나자크는 적어도 스스로의 감정을 누를 줄 알았고, 형제들을 지키기 위한 대의가 있다면 작은 불편함이나 어려움 같은 건 기꺼이 감수했다. 그러니 그만큼 적임자는 없었다.

엔지는 까칠하고 신경질적이긴 해도 모든 행동을 계산하고 철저히 이성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아직 뭣 모르고 달려드는 타헬을 제어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나더러 이제 베이비시터 역할까지 하라고? 아주 물로 보는구만.”

역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신의 역할을 꿰뚫은 엔지가 타헬의 목에 헤드록을 걸며 투덜댔다.

“으앗, 형! 아프잖아!”

인간이었다면 벌써 목이 으스러지고도 남았을 압력이었지만 타헬은 엄살을 피우며 소리만 빽 지를 뿐이었다. 그런 타헬을 보며 희미하게 웃음 짓던 나자크는, 이내 소란스러운 상황을 뒤로하고 칸에게로 다가갔다.

“어떤 순간에도 내가 널 버릴 일은 없을 거야.”

잘 부탁한다도 아니고, 내 발목을 잡지 말라도 아닌, 예상조차 할 수 없었기에 더 당황스러운 약속이었다. 나자크는 웃지 않는 선선한 눈을 하고서 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 개의 뜨거운 손이 맞잡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기리가 먼저 걸음을 뗐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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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HYBE
-공동기획: HYBE / NAVER WEBT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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