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Lv.99 흑염의 프린세스 (42)화 (42/306)

#42

‘혹시 마에스트로를 아십니까?’

새까만 눈이 노트북 화면을 응시한다. 은하는 홀린 듯이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올렸다.

‘선배는, 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까?’

타다닥.

검색창에 ‘마에스’까지만 입력해도, 자동 완성 기능으로 인해 아래로 주르륵 연관 검색어들이 긴 줄을 섰다.

마에스16610497931296.jpg

마에스트로 방한

마에스트로 인성

마에스트로 직찍

마에스트로 매국노

마에스트로 재산

키보드 위에 올라간 두 손이 멈칫했다.

째깍째깍, 몇 번의 초침 소리가 흐른 뒤 은하는 천천히 아래로 손을 내렸다.

‘……관두자.’

그래, 신경 쓰지 않기로 했잖아.

그와 다시 만난다고 해도 아무런 플러스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백이준도 나와의 재회를 바라고 있다는 가정은 하지 못해.’

한때 동료였던 그가 지금도 버젓이 살아 있고, 또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위치까지 갔다면 그걸로 된 것이다. 유약한 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상처를 들추는 것은 그에게 가혹한 일일 터.

그렇게 하면서까지 정작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그날의 내 선택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단순히 안심하고 싶은 걸까. 아니, 어쩌면 막연하게만 생각하고 있던 과거와의 재회에 잠시 흔들린 것뿐일지도.

삭제 키를 꾹 눌러 ‘마에스’마저 지워 버린 은하는 침대에 털썩 누웠다.

어느 쪽이든 이기적인 일이다.

오늘따라 유독 높아 보이는 천장을 응시하다 이윽고 천천히 눈꺼풀을 닫았다.

이미 그녀에게 과거는 없었다.

아주 오래전 엄마의 잘린 팔을 보았을 때 은하의 과거 역시 댕강 잘려 나갔다. 지금에서야 그 사실에 허무함을 느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마치 어딘가에 이끌리기라도 한 양 은하는 꼭 감았던 눈을 스르륵 떴다.

불 꺼진 방 안, 어둠에 녹은 까만 시선이 정처 없이 천장을 떠돌았다.

정말 만에 하나 그와 만나게 된다면. 그럼 그때는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혹시 날 기억하고 있느냐고?

윌리엄은…… 죽었냐고?

‘……잘 모르겠어.’

은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밤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오직 그녀게만 찾아온 듯한 까만 밤이었다.

***

헌터 관할 협회 최상층의 응접실.

모든 창에는 블라인드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햇빛을 차단하기 위함은 아니리라.

달그락.

유리 찻잔이 받침에 부딪히는 소리에 유독 고요했던 실내 공기가 조금이나마 흔들렸다.

“우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겠군요.”

찻잔을 내려 둔 이준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맞은편에는 한국 헌터 관할 협회의 현 우두머리, 고대윤이 앉아 있었다.

“덕분에 조용히 입국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마에스트로의 방한에 대해 방송국, 신문사 할 것 없이 떠들고 있긴 했으나 공항에서나마 편안히 차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은 협회의 공이 컸다.

“당연한 배려일 뿐이네.”

흐뭇한 미소를 지은 대윤이 고개를 들어 맞은편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백이준. 비록 지금은 미국으로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그는 격변의 태동기를 겪고도 버젓이 살아남은 한국의 1세대 헌터였다. 동시에 한국 출신 헌터 중 최초의 S급 헌터이기도 했다.

현재 그가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살아 있는 전설을 이리 직접 만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내게도 영광인 일이지.”

“과찬이십니다.”

“과찬은. 아. 자네가 말한 것 준비해 두었네. 김윤례 할매 국밥이라고 했던가?”

대윤이 테이블의 벨을 누르자, 머지않아 문이 열렸다. 협회 직원으로 보이는 여성이 커다란 봉지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힐끗, 이준을 훔쳐보았다.

‘이 사람이 마에스트로…….’

백열등 아래 요요하게 빛나는 금발. 혼혈이라기에는 단아한 이목구비가 시선을 단번에 앗아 갔다.

문득 시선이 마주치자 잿빛 눈동자가 상냥하게 휘어진다. 덜컥 숨이 멎은 그녀 뒤로 협회장 대윤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 이만 나가 보게.”

“앗, 실례했습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직원이 후다닥 문을 닫고 빠져나갔다.

“늦은 시간이지만 괜찮다면 한 숟가락 하게나. 데워 두라 일렀으니 차갑지는 않을 걸세.”

“감사합니다.”

대윤은 직접 봉지를 뜯어 일회용 용기들을 주르륵 책상 위에 나열했다.

“그런데 참 의외군. 자네가 국밥 같은 걸 먹고 싶어 할 줄이야. 그래도 한국의 맛이 그립긴 했던 모양이야.”

대윤은 허허 웃으며 이준에게 수저를 내밀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 식사를 하기에는 늦은 감이었지만 이준은 군말 없이 수저를 들었다.

“이런 맛이었군요.”

국밥을 먹은 이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했나?”

“아닙니다. 맛이 참 좋네요.”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라고 하네. 나도 처음 알았지만 말이야. 원래 국밥을 좋아하나?”

“아뇨. 딱히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 그런가.”

용기에 담긴 국밥을 내려다보는 잿빛 눈동자가 어쩐지 낮게 가라앉은 듯 보이기도 했다.

딱히 좋아하지는 않는다면서 왜 먹고 싶다고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바닥이 보일 때까지 묵묵히 숟가락을 드는 것을 보면, 정말 좋아하지 않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어느새 텅 비어 버린 국밥 용기를 앞에 두고, 대윤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요새 이런저런 걱정이 많은 참이야. 아무래도 힘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이 만만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수저를 놓은 이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전 세계 헌터 협회의 과제라고도 할 수 있겠죠. 나날이 헌터들의 능력이 비상하고 있으니까요. 참 믿음직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 그렇지.”

물티슈로 손을 닦은 대윤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미국 헌터 협회의 경우에는 상급 헌터들을 협회 요원으로 다수 채용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네만, 사실 우리의 경우엔 그것도 쉽지 않아서 말이야.”

대윤은 녹차가 담긴 잔을 들어 올렸다. 타는 속을 잠재우기 위해 따듯한 찻물을 한 모금 머금고, 다시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장에 버스트 게이트 수색 요원을 보내는 것도 벅찬 마당이야.”

A급 이상의 상급 헌터들이 뭐가 아쉬워서 월급을 받으며 협회에 있고자 하겠는가.

길드보다 협회가 나은 점은 사대 보험 유무밖에 없다. 즉 사익보다 공익을 우선시하는 자가 아닌 이상 협회에 들어올 이유가 전무하다는 소리다.

덧붙이자면 현대 헌터들 사이에서 정의감이 넘치는 이는 영웅이라기보다 괴짜 혹은 호구라고 불렸다.

참 암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자네 같은 헌터가 협회에 있다면 정말 큰 힘이 될 텐데 말이지.”

대윤이 힐끔 그를 바라보았다. 넌지시 던진 시선에 깃든 기대감. 이준은 아무 말 없이 싱긋 웃을 뿐이었다.

한국 헌터 협회의 우두머리라는 위치를 감안했을 때, 지금 대윤은 단순히 입을 나불거리는 것이 아닐 터.

‘속내를 숨길 생각이 없는 것인가.’

언제든 한국 헌터 협회의 문은 열려 있다. 그런 어필의 한 종류이리라.

“하하. 농담일세.”

농담이긴. 그리 생각하면서도 이준은 모른 척 미소를 유지할 뿐이었다. 대윤은 헛기침과 함께 슬그머니 화제를 돌렸다.

“체이서 길드의 활약은 전해 듣고 있네. 이번에 플로리다주의 S급 게이트를 토벌했다지? 그것도 4일 만에.”

“S급 게이트 토벌이라고 해도 체이서만의 업적은 아닙니다. 북미 길드 연합이 없었다면 불가능했겠죠.”

이준은 미소가 걸린 입매에 찻잔을 가져갔다. 쌉싸름한 찻물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무심코 돌린 시선 끝에 사진 한 장이 들어온다.

손님맞이용 테이블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그 사진에, 그의 잿빛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저건.”

“아. 최근 활동을 시작한 신예 헌터라네.”

대윤은 힐끗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옆모습. 최근 예의 주시 중인 흑염의 프린세스, 이유라 헌터였다.

“조금 수상한 점이 있어 조사를 하고 있어.”

치우는 걸 깜빡했군. 대윤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사진을 반대로 뒤집었다. 그러나 이준의 시선은 사진 뒷면에 여전히 고정된 채였다.

“수상한 점?”

“F급으로 측정이 되었는데 그렇다고 하기에는 실력이 상당하더군. 자네도 알다시피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측정기가 오류를 일으킬 리는 없고. 여러모로 신경 쓰이는 점이 많아.”

이준의 눈매에 머무르던 웃음이 한순간이나마 사라졌다.

“……그렇습니까.”

그러나 정말 한순간일 뿐이었다. 입을 다문 이준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아뇨.”

즉답.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저, 복장이 특이하다 싶어서.”

서둘러 접힌 눈매 사이로 무언가 머물렀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지. 1세대 헌터인 데다가 지난 수십 년간 미국에 있었던 그가 어떻게 흑염의 프린세스를 알겠나.

이준은 더 이상 흑염의 프린세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대윤도 마찬가지였다.

화제는 자연스레 흑염의 프린세스로부터 언노운 게이트로 옮겨 갔다.

“그렇군요. 언노운 게이트가 아직도…….”

이준은 짐짓 진지한 얼굴로 턱을 쓸었다.

모든 게이트는 인간의 현대 기술로 파악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지만 그중 언노운 게이트는 유독 그랬다.

게이트 자체는 전 세계적 현상이었으나 언노운 게이트는 동아시아, 그것도 한국에만 유독 자주 등장했다.

난이도는 예측 불가. 그만큼 일반 게이트에서 얻을 수 없는 귀한 전리품을 얻을 때도 있었지만, 출현 원인도 파훼 방법도 미지수인 이상 득보다 실이 많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쩌면 언노운 게이트야말로 한국 헌터 협회의 최대 과제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드네.”

찻물 위로 대윤의 흐린 얼굴이 떠올랐다.

언노운 게이트에 관한 연구는 한국을 중심으로 이웃 국가들과 함께 지난 20년간 계속해 왔지만 애초에 원인조차 알 수 없는 일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무거운 이야기만 하게 되는군.”

“아닙니다.”

“백 헌터가 워낙 듬직하니 나도 모르게 자꾸 한탄을 늘어놓는 모양이야. 정말이지, 자네 같은 헌터가 협회에도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떨치려야 떨칠 수가 없군그래. 하하.”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긍정적으로─.”

응? 찻잔을 입에 가져가던 대윤이 석상처럼 굳었다.

휘둥그레 뜬 눈으로 고개를 번쩍 쳐들자, 소파에 걸쳐 두었던 슈트 상의를 챙기는 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바, 방금…… 뭐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진심인가?”

“네.”

세상에. 대윤은 그만 쥐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놀라움에 굳어 버린 대윤과는 달리 이준은 차분하게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새벽 1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창가로 다가간 이준은 드리워진 블라인드 사이를 손가락으로 들추며 바깥을 살펴보았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겠습니다. 아직 시차 적응이 완벽하지 않아 피로하네요.”

“어어…… 그래. 그렇게 하게.”

“자세한 이야기는 제 수행인을 통해 또다시 나누도록 하죠. 괜찮겠습니까?”

“무, 물론이네. 언제든지.”

대윤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국밥, 잘 먹었습니다.”

달칵.

문이 닫혔다.

그럼에도 대윤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뻣뻣하게 굳은 채 움직일 수 없었다.

백이준이…… 그 마에스트로가 협회에?

그것도 미국 헌터 협회가 아닌 한국 헌터 협회에?

물론 아직 확정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도대체 왜?’

협회장인 그조차도 그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의문과는 별개로,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대윤은 성큼성큼 걸어 책상 위의 전화기에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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