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당직도 잘 서? (1)
‘잘했다, 이거지?’
현 태화 의료원 내과학 교실 과장 신현태는 상당히 힘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본인 능력도 출중하긴 했지만, 장가를 심하게 잘 가 버렸다.
아내가 태화 전자 사장 딸인 동시에 현 부장이었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신현태가 태화 의료원 원장을 하게 되리란 건 기정사실이라는 뜻이었다.
‘이거 진짜 나 팍팍 밀어주는 거 아냐? 그럼 진짜…….’
[왜 입꼬리를 하나만 올리십니까?]
‘보이냐?’
[느껴집니다.]
‘거, 묘하게 기분 나쁜 워딩인데…….’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수혁의 입꼬리는 여전히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었다.
차기 기조실장에 원장이라는 신현태의 눈에 들었으니까.
‘어쩌면 진짜 교수 될지도 모르겠네.’
물론 이건 너무 김칫국이긴 했지만.
아무튼, 희망이 보이긴 했다.
흙수저 이수혁에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그건 응원합니다.]
‘그건이란 말은 좀 빼지.’
[이건 응원합니다.]
‘말을 말자…….’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오진경 환자 차트에 입원 오더를 넣었다.
지정의는 당연히 신현태였고, 주치의는 수혁 본인이었다.
항생제는 김진철, 오진경 모두 독시사이클린을 처방했다.
이게 정말 효과가 있다면 주말이 지나기 전에 증상에 호전을 보이게 될 터였다.
앵무새병이라는 건 좀 특이한 병이긴 하지만, 일단 진단만 되면 치료가 어려운 건 아니었으니까.
“네, 그럼 푹 쉬시고, 내일 아침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수혁은 그렇게 오진경 환자까지 병실로 안내한 후, 의국으로 들어갔다.
의국 안에 있던 몇몇이 참으로 어색하게 그에게 인사를 하더니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마치 높은 사람이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가 갸웃거려질 정도로 의아하게만 느껴졌다.
‘다들 엄청 바쁘신가.’
수혁 입장에서는 딱히 나쁠 것 없는 일이었다.
널찍한 의국을 혼자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아직 10시도 안 됐으니까……. 기록만 좀 쓰고 바로 자야겠다.’
[공부는 안 합니까?]
바루다는 수혁에게 또다시 공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어필해 댔다.
‘인마……. 나 내일 당직이야……. 그것도 응급실 첫 당직.’
무려 2년 차 황선우와 페어를 이룬 당직이었다.
‘하……. 진짜……. 한숨만 나오네. 넌 이 기분 모를 거다. 잠도 안 오고.’
황선우와 함께 응급실로 내려갈 생각만 하면 벌써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 더러운 인간인데, 당직 날에는 어떻겠는가.
천사도 악마로 변하는 날인데.
[그럼 더더욱 공부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바루다 또한 악마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일단 이거 빨리 끝내면 그때 생각해 보지 뭐.’
수혁은 차트를 켜서 경과 기록을 기입하기 시작했다.
학생 때도 모의 차트를 몇 번 인가 써 봤고, 곧잘 쓴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있었지만.
지금처럼 수월했던 적은 단연코 없었다.
‘진단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하고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왜 이런 검사를 냈고, 왜 이런 질문을 했고, 왜 이렇게 약을 바꿨는지.
학생 땐 솔직히 개뿔 아는 것도 없이 레지던트가 쓴 입원 기록하고 경과 기록 대충 따다가 만들었었는데.
이번에는 그 이유를 죄 꿰고 있다 보니 물 흐르듯 기록이 훅훅 써졌다.
그 결과는 불과 쓰기 시작한 지 불과 20분 만에 기입이 끝났는데, 바루다 또한 그 퀄리티에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을 정도였다.
도리어 우쭐거리며 잘난 체를 할 지경이었다.
[제 도움이 지대했군요.]
‘뭔 소리야 인마. 나 혼자 썼는데.’
[진단 과정은 저한테 의지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솔직히 말해 아까와 같은 발상의 전환은 아직 수혁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바루다의 존재가 수혁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도움보다는 귀찮은 게 더 크긴 했지만.
‘아, 몰라. 일단 잘래. 너무 힘들다.’
아직 왼쪽 다리 다친 게 익숙지 않다 보니 꼬박꼬박 지팡이를 써야 했는데 그래서 너무 힘들었다.
언젠가 익숙해지면 절름발이는 될지언정 지팡이 없이도 다닐 수 있겠지만.
지금은 무리였다.
[띠띠띠띠.]
해서 막 몸을 일으키려는데 이상한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이지 딱 듣자마자 기분 확 잡치는 그런 소리였다.
‘무슨 짓이야, 이 미친놈이.’
[이수혁의 기억을 토대로 제일 싫어하는 소리를 재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그런 짓을 하냐고!’
[공부.]
‘이 미친놈아.’
[공부.]
‘하…….’
수혁은 두 번인가 더 알람을 듣고 나서야 시계를 바라보았다.
아직 10시가 채 되지 않은 상황이라, 꽤 이른 시간으로 느껴지긴 했다.
어차피 내일 아침 7시부터 당직 시작이라 밤에 그를 깨울 전화가 올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 시발 공부하자. 공부.’
[공부하는 게 욕 나올 만큼 싫습니까? 오늘 공부할 내용이 어떤 사람을 살리는 데 있어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는데?]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넌……. 넌 왜 이렇게 말을 싸가지 없게 하냐.’
[저는 딥러닝을 통해 행동 양식을 개선하는 A.I. 바루다입니다.]
‘여기서 뜬금없이 자기소개를 왜 하지?’
[제 발화 습관은 유일한 입력자인 이수혁의 영향만을 받았다는 걸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시발.’
할 말이 없어진 수혁은 욕설과 함께 의국에 비치된 책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명색이 태화 의료원 내과 의국이니만큼 책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꽂혀 있었다.
아무도 읽지 않은 것 같은 책도 있긴 했지만.
그런데도 의국에서는 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그래……. 공부해서 남 주냐…….’
원래도 맞는 말이었지만.
바루다와 함께하게 된 지금은 더더욱 그러했다.
읽은 족족 뇌 어딘가에 저장이 되어 바로바로 출력 가능했으니까.
이렇게 지식을 쌓아 나가다 보면 진짜 언젠가는 세계 최고의 내과 의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아직 타 보지도 못한 비행기를 일등석으로 타고.
스테이크도 좀 썰어 보고.
명품 옷이라는 것도 입어 보고.
외제 차도 타 볼 수 있을 테지.
[동기가 너무 불순하지만, 공부만 한다면 응원합니다.]
‘불순하긴,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혁은 그리 말한 후, 천천히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온통 영어로 된 원서였지만 읽는 데 큰 문제가 느껴지진 않았다.
이래 봬도 수혁은 국내 최고라 불리는 태화대학교 의대를 4등으로 졸업한 인재였으니까.
회화는 완전 별개의 영역이겠으나, 읽는 건 자신 있었다.
[그런데, 수혁.]
‘왜. 공부하라더니 왜 방해야.’
[왜 그렇게 공부를 하기 싫어하십니까? 기억 속의 수혁은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바루다의 말에 수혁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까와 비슷한 표정이었지만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너한테 이런 소리 해서 뭐하나 싶긴 하지만…….’
[정신건강 의학적으로 본인의 생각을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딴 식으로 말하는 놈한테 뭔 소용이 있나 싶은데.’
막상 바루다에 의해 옛 기억이 떠오르니 누구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뭐 그렇게까지 거창한 얘기도 아니었다.
그저 동아리 선배들과의 대화였더랬다.
단지 같은 공간에 있던 사람들이 실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
- 수혁이야 모르겠지만, 나도 그렇고, 얘도 그렇고 집에서 지원받을 수 있거든. 요새 교수 되려면 뭐 1, 2년으로 되냐. 4, 5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지. 나는 그냥 그렇게 해서라도 교수 하려고.
그들이 교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으로 뽑은 건.
연구에 대한 열정도 아니었고, 이마 쌓아 올린 지식도 아니었다.
그저 교수가 되기 위해 기다리는 세월 동안 버틸 수 있는 돈.
대학원 학비를 낼 수 있는 돈.
돈이었다.
‘그래, 돈 없는 놈은 교수도 못 되는 세상이 된 거지. 나는 그 돈이 없는 놈이고.’
[그래서 돈이라도 벌기로 한 거군요.]
‘그랬지. 근데 이젠 아냐.’
수혁이 생각하기에 자기 학번에서 아니, 위아래 수년을 통틀어 봐도 자기처럼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없었다.
시험 전날까지 과외 수업하고 밤새워 공부하는 일정을 소화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교수가 못 된다는 현실에 무너졌던 꿈이.
이제 다시 약동하려 하고 있었다.
돈이고 나발이고 다 씹어 먹을 수 있는 실력.
그걸 손안에 쥘 수도 있었으니.
[…….]
바루다는 점점 빨라지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가 흐뭇한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다음 날 새벽 6시였다.
[띠띠띠띠.]
예의 그 끔찍한 알람.
“으아.”
수혁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몸을 일으켰다.
여느 당직 방처럼 그가 잠든 곳도 2층 침대였기에 하마터면 머리를 위에 부딪칠 뻔했다.
[효과 좋군요.]
‘아침부터 이게 무슨 지랄이야……. 알람 맞추고 잤는데!’
[6시 50분 말입니까? 너무 촉박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새끼야……. 당직이잖아……. 잠이라도 잘 잤어야지.’
[어차피 환자 많아지면 못 잡니다.]
‘아오…….’
말이라도 못 하면 모르겠는데.
바루다는 늘 맞는 말만 골라 하니 반박할 수도 없어 더더욱 열불이 뻗쳤다.
‘에이.’
마음 같아서는 더 자고 싶은데.
머릿속에서 나는 알람 소리가 너무 충격인지라 잠도 오지 않을 거 같았다.
해서 기왕 일어난 김에 회진이나 돌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오전에 한 번 돌기는 해야 했으니까.
“좀 어떠세요?”
“훨씬 나은 거 같습니다. 기분이 그래서 그런가는 몰라도…….”
다행히 김진철, 오진경 모두 극적으로 상태가 좋아져 있었다.
덕분에 약간은 기운을 차린 수혁은 병원 식당에서 아침까지 먹을 수 있었다.
[일찍 일어나니까 좋지 않습니까?]
하지만 바루다의 말엔 대답하지 않았다.
인정하면 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일일이 대답해 줄 시간도 없었다.
따르르릉!
딱 7시가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전화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기가 막힌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렇듯 정시에 맞춰서 전화를 거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6시 40분 넘어서 온 환자를 전날 당직에게 알리는 건 좀 애매했으니까.
“내과 1년 차 이수혁입니다.”
“네, 선생님. 이지은, 45세 여자, 복부 덩이와 체중 감소로 타 병원에서 상급 기관 전원 온 환자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복부의 덩이와 체중 감소.
딱 봐도 암이었다.
수혁은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지금 내려갈게요.”
“네, 선생님.”
해서 수혁도 자신 있게 황선우에게 연락을 돌렸다.
“암이네. 내려가서 환자 얼굴 보고 혈종으로 올리자.”
“네, 선생님.”
황선우 또한 당연히 암이겠거니 생각하며 응급실로 내려갔다.
그리고 타 병원에서 찍었다던 복부 CT를 보고 있는데, 바루다가 입을 열었다.
[암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