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발표까지? (3)
“야, 고생 많았다.”
으레 학술회들이 다들 그러하듯.
태화 내과 증례 발표회 후에도 회식이 있었다.
그냥 작은 회식이 아니라 발표회에 참석했던 모든 병원 교수들과 전공의 그리고 펠로우들이 참석하는 대회식이었다.
때문에 어디 맛집에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병원 뒷골목에 있는 널찍한 맥줏집으로 그 회식 장소가 고정되어 있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덕분에 떨지 않고 잘할 수 있었습니다.”
수혁은 그 넓은 회식 장소 중에서도 가장 중앙에 위치한 테이블에 있었다.
위치상으로 보면 아주 정확히 한가운데는 아니긴 했지만.
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중앙이라는 말에 감히 토를 달지 못할 터였다.
[태화 의료원 신현태 교수, 이현종 교수. 칠성 병원 박국진 교수, 「아선 병원」 우창윤 교수. 전원 과장입니다.]
동시에 대한민국 빅 3 병원의 교수들이기도 했다.
또한, 각 분과별 학회장들이기도 했고.
이현종 교수는 이제 학회장 하기에도 너무 높으신 어른이라 논외로 쳐야 하긴 했지만.
아무튼, 여기 앉은 네 명의 교수가 현재 대한민국의 내과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란 뜻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안 떨고 있지?’
[지금까지는 그렇습니다만, 알코올 섭취가 더 이어지면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혈중 알코올 농도는 0.08%입니다. 더 이상의 섭취는 금할 것을 권유합니다.]
바루다의 말대로 지금 그만 마시면 딱 기분 좋게 마셨다 하고 병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 일이 어디 그렇게만 돌아가겠는가.
‘지금은 마셔야 해.’
정신만 차리면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산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수혁은 다소 지금 이 상황과는 맞지 않는 고사를 떠올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어때? 우리 1년 차.”
그사이 이현종 원장이 얼굴이 불그스름해진 채로 수혁을 가리켰다.
그러자 칠성 병원 박국진 교수가 허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까 안 교수님 된통 당하는 거 다 봤죠. 대단하던데요?”
안국태는 딱히 다른 병원에서만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던지라 박 교수도 고소해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에 더불어 이수혁이라고 하는 1년 차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진짜 뭐……. 뒤에서 불러 주고 그런 건 아니죠?”
해서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불이나 뻥뻥 차야 할 것 같은 썰렁한 농담을 던져 댔다.
“말이 되나? 우리 태화 내과 증례 발표회를 뭐로 보고.”
당연하게도 이현종 원장이 역정을 냈다.
덕분에 박국진 교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너무 잘하니까……. 그래서 그랬죠. 이런 제자 하나 가르쳐 보면 소원이 없겠는데.”
“어, 이놈 봐, 이놈 이거. 너 쓸 만해 보이니까 펠로우로 빼 가려고 수 쓰는 거지?”
“네? 에이……. 뭘 빼 가요. 그냥 부럽다, 오면 잘 가르칠 거 같다. 뭐 이런 소리 하는 거죠.”
박 교수는 이 말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수혁과 눈을 마주쳤다.
[이런 게 유혹입니까?]
요새 한창 오감을 통한 데이터 수집에 맛 들인 바루다가 박국진 교수의 표정을 분석해 답을 내놓았다.
신기한 것은 대강 맞아떨어지는 거 같다는 점이었다.
‘대충은?’
[묘하군요.]
‘뭐가 묘해.’
[한낱 수혁을 두고 내로라하는 교수들이 기 싸움을 벌이고 있다니.]
‘한낱? 한낱이라고 했냐, 지금?’
[저 없이 오늘 발표할 수 있었겠습니까? 저 없었으면 안국태 교수라는 자에게 박살 나서 지금쯤 질질 짜고 있었을 겁니다.]
바루다는 성을 내는 수혁을 향해 일침을 날렸다.
뭐라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할 말을 찾는 데는 실패한 수혁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사실 테이블 위에서 벌어지는 대화를 따라가는 것만 해도 바쁘긴 했다.
워낙 높은 양반들의 대화인 데다가, 그 대화 주제가 무려 수혁 자신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야야. 현태야. 조심해라. 칠성 병원 놈들은 하나 같이 속이 시커메.”
“무슨 소리세요, 선배.”
“너 기억 안 나냐?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그래 임진혁이. 걔 빼 갔잖아.”
“아, 그거요…….”
“아, 그거요?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대체 얼마 주고 뺀 거야? 걔 태화 의료원에 충성하겠다고 호언장담한 지 일주일 만에 나갔다고.”
“그…….”
“뭐, 10억? 이런 시발놈들이 진짜.”
“에헤이. 너무 큰 소리 내지는 마시고요.”
그사이에도 이현종 원장과 박국진 교수의 티격태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신현태나 우창윤 교수나 그저 그런 둘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 말릴 생각을 하지는 않고 있었다.
원래 이 둘은 서로 간의 반가움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러했다.
반면 수혁은 방금 들은 충격적인 액수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진짜 그런 경우가 있구나…….’
[무슨 경우를 말하는 겁니까?]
‘실력 좋은 교수들은 병원에서 따로 연봉이나 계약금을 제시한다고 했었거든. 근데 10억이라니…….’
10억.
천애 고아로 살아온 수혁에게 그 돈은 너무 낯설게만 느껴질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그 돈만 있으면 가지고 싶은 차, 입고 싶던 옷 등등 뭐든지 가능할 거 같았다.
[한결같이 세속적이시군요, 수혁은.]
‘뭐, 그게 어때서 인마.’
[아닙니다, 응원합니다. 세계 최고의 내과 의사가 되면 더 큰 돈도 벌 수 있으시겠죠.]
‘그래…….’
다행히 오늘 그 길로 향하는 첫 단추를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끼운 참이었다.
덕분에 수혁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 얼굴을 내내 바라보고 있던 우창윤 교수는 수혁의 미소가 퍽 이쁘단 생각이 들었다.
‘똑똑하지……. 순박하지……. 흠.’
물론 이제 겨우 한 번 발표한 거 가지고 너무 호들갑을 떠는 걸 수도 있었다.
하지만 과연 이 발표를 우연히 하게 되었을까?
신현태는 그렇다 치지만, 이현종 원장이 어떤 사람인데.
대한민국 의사로는 처음으로 노벨상에 근접했던 사람이었다.
‘괜히 고른 게 아니야. 얘는 진짜 자랑하려고 내보인 거야.’
그리고 그 의도는 완전히 들어먹힌 셈이었다.
박국진 교수면 그래도 꽤 자존심 강한 사람인데 벌써 3년이나 남은 펠로우 얘기를 들먹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지금 머리를 맹렬하게 굴리고 있는 우창윤 교수 또한 어떻게 하면 수혁을 꾈 수 있을까를 궁리하는 중이었다.
“아, 그런데 이수혁 선생. 말 놔도 되려나? 사석이니까, 괜찮을 거 같은데.”
그렇게 고심하던 우창윤 교수가 입을 연 것은 이현종 교수와 박국진 교수가 티격태격하다 지쳐서 담배 피우러 나간 직후였다.
‘아, 이 사람이 있었지, 참.’
하필 혼자 남았을 때 입을 열 줄이야.
신현태 교수는 적잖이 긴장한 얼굴이 되어 우창윤 교수와 수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물론입니다, 교수님.”
이미 적잖이 술을 먹은 후였지만 수혁의 발음은 또랑또랑하기만 했다.
정신력 또한 합격점이란 뜻으로 여긴 우 교수의 미소가 짙어졌다.
“좋아. 혹시 요새 뭐……. 만나는 사람 있나?”
“네?”
“여자친구 있냐고.”
“아, 아뇨. 없습니다.”
여자친구란 말에 신현태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이 양반이 미쳤나?’
그가 알기로 우창윤 교수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 딸은 지금 태화대학교 의과대학 본과 4학년이었고.
원래는 바로 이게 아선대학교보다 태화대학교가 위라는 증거라는 식의 놀림거리가 되던 주제였지만.
지금은 너무도 큰 위협으로만 느껴졌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어어. 잠깐만요. 우 교수님. 뭐 누구 소개해 주려고 그럽니까?”
“응? 아뇨. 1년 차 바쁜 거 다 아는데요. 소개해 줬다가 욕 들어먹게?”
“그럼……. 그건 왜 물어봅니까?”
“왜 그렇게 날이 섰어요? 이수혁 선생 아빠예요?”
“그……. 그건……. 아니긴 하지만.”
“그럼 상관할 일은 아니죠. 아무튼, 이수혁 선생.”
우창윤 교수는 신현태 교수의 반응이 적잖이 마음에 들었는지 껄껄 웃고는 수혁을 재차 바라보았다.
‘다리가 좀 불편해 보이긴 하지만…….’
어쩌면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었다.
군 면제를 받을 테니까.
대학 병원 의사로서는 탄탄대로를 걸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네, 교수님.”
“너무 부담 갖지 말고 들어.”
“네.”
“그, 태화대 의대 본과 4학년에 우하윤이라고 있어. 혹시 아나?”
“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었다.
로열인데 얼굴도 이쁘고 공부까지 잘한다고 했던가.
“걔가 내 딸이거든.”
“아, 그렇습니까? 몰랐습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우하윤도 우하윤이지만 우창윤 교수도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절친 중 하나가 ‘닥터 프렌즈’라는 전무후무한 의학 유튜브를 운영 중인데, 그 덕에 거기 몇 번인가 얼굴도 비추고 그랬더랬다.
“소개팅 같은 건 아니고……. 걔도 내과 하고 싶어 해. 근데 아선 병원은 죽어도 안 온대. 아빠 있어서 부담스럽다나 뭐라나.”
“네.”
“주말 시간 날 때, 한번 보지 그래. 선배로서 내과에 관해 얘기도 해 주고. 간만에 영화 같은 것도 좀 보고.”
“아…….”
수혁은 감히 즉답하지 못하고 신현태 과장을 돌아보았다.
아직 1년 차인 주제에 나가 논다는 말을 해도 되나 싶어서였다.
“신 과장. 어때? 일 잘하고 똑똑한 1년 차, 상도 줄줄 알아야지.”
하지만 눈치 빠른 우창윤 교수가 툭 끼어드는 바람에 신 과장은 반대할 기회조차 잃고 말았다.
“그……. 그렇긴 한데…….”
“소개팅 같은 거 아니고. 에이, 내가 우리 딸 무서워서 어떻게 1년 차를 소개해 줘.”
신현태 교수는 너스레를 떨고 있는 우창윤 교수의 인중에 주먹을 꽂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아, 근데. 수혁이 다음 달 스케줄이 뭐더라?”
대신 공을 다른 교수에게 넘기기로 했다.
‘혈액종양내과였지, 아마?’
빡세기로 따지면 내과 중에서 최고를 달리는 과였다.
그런 과에 4월 1년 차가 주치의로 오는 것도 짜증 나는데 벌써 주말 약속을 해?
혈종내과 교수 성격상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 터였다.
“혈액종양내과입니다.”
“아, 태진이 밑에서 도나?”
하지만 신현태 과장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조태진 교수가 우창윤 교수 후배라는 것.
그것도 그냥 아선대학교 후배가 아니라 목포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하다는 것.
“야, 태진아!”
“네, 형. 말씀하십쇼.”
조태진 교수는 한달음에 달려와 우 교수 앞에 섰다.
“이 친구 다음 달에 너 밑에서 돈다던데, 맞아?”
“어……. 그렇게 전달받았습니다.”
“그래. 주말 하루만 비워 줘. 알잖아, 하윤이. 걔 내과 하고 싶다고 하는데, 태화 의료원 내과는 어떤가 1년 차한테 들으면 좋지 않겠어?”
“아, 물론이죠. 비워 줘야죠. 대신…….”
“대신?”
조태진 교수는 이제 우창윤 교수 대신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다.
“감염내과 때처럼 잘하면요. 거의 전설적으로 돌았는데, 여기서는 개판 치면 제가 너무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수혁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교수님.”
자신감이 물씬 묻어나는 답이었다.
아니, 감염내과보다 잘 돌았으면 잘 돌았지, 더 못 돌 자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