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9화 (19/1,303)

19화 이건 좀 어려운데? (3)

그 시각 혈액종양내과 조태진 교수는 내과 주니어 스태프, 즉 전임 조교수 회식에 참석 중이었다.

지금이야 햇병아리 교수들이긴 하지만.

장차 이 병원을 끌어나가야 할 인재들이니만큼 병원 차원에서 해당 모임을 지원했다.

덕분에 교수들은 죄다 돈 걱정 없이 술을 들이켜는 중이었다.

물론 다음 날 근무 때문에 대부분은 자제 중이긴 했지만.

“그…… 맨날 자랑하던 천재 1년 차? 걔는 좀 어때?”

그중 술이 전혀 자제가 안 되는 아니, 아예 자제할 생각이 없는 내분비내과 서효석 교수가 조태진 교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입을 열 때마다 여과되지 않은 술 냄새가 훅 끼쳐와 상당히 불쾌했지만.

논문을 하도 안 써서 정작 부교수는 조태진이 먼저 달게 되겠지만.

직함과는 관계없이 서효석에게는 백이 있었다.

어찌 되었건 서 교수는 조 교수보다 한 학번 위였다.

해서 조태진은 최대한 공손하게 대꾸했다.

“오늘 처음 온 거라서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아유, 신 과장님이 요새 걔 얘기만 하잖아. 아주 귀에 딱지가 앉겠어.”

“발표 때 못 보셨어요? 그때 보면 자랑할 만하긴 했는데.”

“야, 나 펠로우 때 안국태 그 새끼한테 개박살 났던 거 기억 안 나냐? 그 이후로 발표 안 가. 내 케이스 아니면.”

서효석이 사뭇 당당하게 말했다.

“아…….”

그때 볼 만했었지.

조태진 교수는 과거를 회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안국태 교수 아니었어도 개박살 나기는 했을걸.’

그렇게 엉망인 발표를 보는 건 정말이지 드문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효석이 교수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더랬다.

그런데 이 서효석이 설마하니 「태화 생명」 전무의 아들일 줄이야.

전형적인 낙하산 인사라고 불만이 치솟았지만.

돈 대 주는 갑 입장의 태화 생명의 의견은 절대적이었다.

부우웅.

그리 유쾌하지 않은 기억인지라 고개를 털어 내고 있으려니 상 위에 올려 둔 전화가 울렸다.

“15……03?”

서효석은 남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조 교수의 핸드폰을 들었다.

1503.

15층 서 병동에 있는 3번째 전화번호였다.

다시 말하면 병원에서 걸려 온 전화라는 소리였고,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너 전화 왔다.”

서 교수는 번호가 병원 번호라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기분 잡쳤다는 듯한 얼굴로 조태진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거의 던지다시피 한 수준이었으나, 술을 거의 먹지 않은 조 교수는 용케 받아 내었다.

“이상하네? 지금 어지간한 환자는 다 괜찮은데?”

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급실 환자라면 병동 전화가 아니라 치프 번호로 왔어야 했으니까.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수혁에게 직접 노티하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다.

‘아. 오늘 당직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나니, 뭔가 좀 재밌는 기분이 들었다.

치프의 노티는 무조건 노련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주로 혼내는 축에 속하는 그였지만.

1년 차의 전화라면 어느 정도는 재롱잔치 본다고 쳐 줄 수 있을 터였다.

“혈액종양내과 조태진입니다.”

해서 조금은 여유로운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 어떤 전화든 자신을 귀찮게 하는 건 죄 싫은 서효석으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반응이라 할 수 있었다.

‘미쳤나?’

이런 얼굴을 하고 조태진을 보고 있으려니, 수화기 너머로 씩씩하다 못해 시끄럽다는 표현을 써야 할 것만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교수님! 1년 차 이수혁입니다! 응급실 환자 노티드릴 일 있어 전화를 드렸습니다!”

“응. 나 지금 다른 사람들이랑 있으니까, 조금만 조용히.”

“아, 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그래, 어떤 환자야?”

군기가 팍 든 1년 차의 모습은 언제나 교수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는 법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두려워한다는 건 퍽 기분 좋은 일이었으니까.

“네, 교수님. 박경원, 남자 53세 비인두암 2기로 3개월 전 교수님께 입원하여 항암 방사선 치료 받은 자로 금일 의식 변화 및 사지 마비를 주소로 응급실 내원하였습니다.”

“응? 박경원……?”

“네. 마지막으로 교수님 외래 본 건 한 달 전입니다. 그날 이비인후과 외래도 보았으며, 해당 외래에서 시행한 내시경 검사에서는 별다른 특이 소견 없었습니다.”

“음…….”

조태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머릿속을 헤집어 박경원이라는 환자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이름과 외래만 들어서 쉬이 생각이 나진 않았지만.

“브레인 메타(Metastasis: 전이) 있는 건 아냐?”

대신 이 경우 가장 범용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을 떠올렸다.

“저도 처음에 그렇게 판단하고 MRI 시행하였으나 머리 쪽 병변은 없었습니다. 신경과 당직에게도 확인받았습니다.”

수혁은 어느 틈엔가 남겨져 있는 신경과 기록을 보며 해당 소견을 읊어 댔다.

주저리주저리 꽤 길게 쓰여 있는데, 요약하면 그냥 아무 이상 없음이었다.

“그래? 그럼 뭐지?”

“검사 도중 경부 쪽으로 검사 범위 확장하여 비인두까지 포함하여 MRI 시행하였습니다.”

“아, 잘했네. 그래서?”

“제가 사진 한 장 보내 드려도 되겠습니까? 보시면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당돌하네.’

태진은 그리 생각하며 그러라고 했다.

5g 시대이니만큼 사진은 즉시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것은 1달 반쯤 전에 시행했던 MRI 검사 사진이었다.

1달 전 외래에서 확인했던 바로 그 사진이었고, 조태진은 혈액종양내과 교수답게 사진을 보자마자 환자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 있었다.

‘아, 이 환자. 이상하네……. 상태 좋았는데?’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에 반응이 좋으면 소위 ‘치료가 잘 먹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 환자는 정말이지 치료가 잘 먹는 그런 환자였다.

부르르.

곧이어 오늘 시행한 MRI 사진이 전송되었다.

모든 컷을 전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만큼 제일 중요한 비인두 부위가 걸린 컷만 보내 왔다.

‘뭐야, 이거.’

그리고 그 사진은 태진을 경악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전 사진과 동일인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험악하게 변해 있었다.

‘재발……. 인가?’

주변 구조물을 마구 헝클어뜨리고 있는 파괴적인 모습.

급기야 척수를 가리고 있는 척추뼈마저 부수고 들어가 있는 모습은 역시 암을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지금 환자 어딨지?”

비인두암이 재발해서 사지 마비를 일으키다니.

이건 너무 드문 케이스라 할 수 있었다.

조태진 교수는 회식 중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소리쳤다.

아까 수혁에게 다른 사람들이 함께 있으니 조용히 해 달라고 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응급실에 있습니다, 교수님.”

“일단 기다려. 나 병원 앞이니까, 바로 가지.”

“아……. 네, 교수님.”

수혁은 아직 노티할 것이 많아 아쉬웠지만.

감히 교수가 오겠다는데 막을 수도 없었다.

“5분이면 가. 지금 MRI만 된 건가?”

“네. 혈액 검사는 나갔는데 지금 결과 나온 건 CBC(Complete Blood Cell count: 혈구 세포 검사)뿐입니다. 백혈구 수치가…….”

“됐어. CT 검사 예약하고, 내 앞으로 입원장 내놔.”

“네, 교수님.”

수혁은 이번에도 백혈구 수치가 높아 염증을 의심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만 틀어막히고야 말았다.

그렇게 전화를 끊은 수혁이 재차 조태진 교수를 향해 입을 열 수 있게 된 것은, 정말로 5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병원에서 지원하는, 병원 교수들 회식인 만큼 진짜 병원 바로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이수혁. 환자분 어디 계셔.”

“네, 지금 저기 계십니다.”

“안내해.”

“네, 교수님.”

“이상하네, 진짜. 외래에서는 괜찮았는데…….”

조태진 교수가 이토록 서둘러 달려온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혹시 뭐라도 하나 놓쳤을까 봐.

그래서 이 환자가 이렇게 된 것일까 봐.

의사로서 책임감 또한 막중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것 때문에 혹시 창창하기만 해야 할 앞날에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더 컸다.

‘뭐라도……. 어떻게든…….’

그래서일까.

조태진은 평소와 같이 명민한 두뇌 회전이 잘되지 않았다.

‘사지 마비……. 사지 마비…….’

재발한 암에 의해 증상이 발생한 거라면 방사선이라도 빨리 때려야 했다.

그래서 암 덩이의 크기를 줄여야 증상이 어느 정도라도 해소될 터였다.

재발한 암에 대한 근치적(완전한) 치료는 둘째치고서라도.

환자가 사지 마비가 된 상황을 너무 오래 끌면 안 될 테니까.

그렇게 정신없이 걷고 있는 조태진을 향해 수혁이 아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교수님.”

“어. 이따가 하면 안 될까?”

“아직 환자 의심되는 진단명을 말씀 못 드려서요.”

“뭐? 재발한 거지! 여기서 더 뭐가 필요해!”

“그…….”

수혁은 자기 바로 앞에서 소리치고 있는 조태진을 보며 더 입을 놀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조태진 교수는 제정신이 아닙니다. 환자가 크게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바루다의 평소와 같은 평온한 말투를 듣고 있자니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다.

게다가 수혁은 그냥 조태진 교수에게 전화를 건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야말로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신이 있어서였다.

절대로 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교수님, 환자의 사지 마비 정도는 환자의 자세 또는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서서히 발생한 것도 아니고 오늘 갑자기 나타난 증상입니다. 그래서 머리 쪽 병변을 의심했던 거였고요.”

해서 말을 거의 속사포처럼 쏟아 냈다.

조태진 교수는 누가 자신에게 이렇게 다다다 쏟아 내는 것이 퍽 오랜만이기도 했거니와.

사지 마비 상태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해서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만약 비인두 부근에 보이는 병변이 암이었다면 변동은 없었을 겁니다. 암은 누르는 게 아니라 파괴하는 조직이니까요.”

“그럼……. 암이 아니다?”

더 듣다 보니 그럴싸한 주장도 나왔다.

수혁의 말대로 암은 주변 조직을 부수는 녀석이었다.

순진하게 누르기만 하는 건 양성 종양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네.”

“흠.”

정말로 암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 조태진 교수는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사이 수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조태진을 설득하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이어지는 듯한 기색이었다.

“영상에서 저렇게 지저분해 보이지만 암은 아닌 병변은 사실 많습니다. 하지만 감별은 가능합니다. 갑자기 감염병이 생기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 그건 비약이지. 그럼 넌 뭘 의심하지?”

“저는…….”

수혁은 계속 떠드느라 입안에 고였던 침을 꿀꺽 삼켰다. 소매로 입가 주변을 한 번 닦아 내고 매무시를 정리했다.

그리곤 확신에 가득 찬 눈빛으로 조태진 교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답했다.

“방사선성 괴사를 의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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