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야 이거 헷갈리네 (4)
“아니, 이걸 어떻게 생각한 거야.”
조태진 교수의 감탄은 회진을 돌고 나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 아까보다도 오히려 더 커져 있었다.
- 환자분 따로 검사받아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경과 관찰만 하면 됩니다. 한 달 후에 다시 MRI 찍어보시죠.
특히 박상아 환자에게 이 말을 하고 나서는 감동이 막 벅차오르는 모양이었다.
“따라와, 따라와. 아무거나 먹지 말고. 아침 나가서 먹자, 나가서. 어차피 급한 환자도 없는데.”
심지어 수혁과 김인수 둘을 데리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을 지경이었다.
3년 차 김인수야 업무 시간 중간에 한두 번인가 나가 본 경험이 있다지만.
1년 차 수혁으로서는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니, 다른 1년 차들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삐빅.
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차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딱 엠블럼만 봐도 멋이 철철 넘치는 독일제 차량이 한 대 서 있었다.
‘와……. 저거……. 내 드림 칸데.’
[침 떨어지겠습니다, 입 좀 다무시죠.]
‘시끄러워 깡통아. 저게 얼마짜린 줄 아냐?’
[모르긴 해도 저보단 쌀 겁니다.]
‘아…….’
맞는 말이긴 했다.
바루다는 태화 전자의 정수가 담긴 물건이었으니까.
세계 굴지의 대기업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하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업데이트하던 녀석 아니던가.
아마 값을 따질 수도 없는 보물이었을 터였다.
[그러니 저를 소유하고 있는 수혁은 조태진 교수보다 훨씬 부자입니다.]
바루다는 멍하니 서 있는 수혁을 향해 말을 걸어왔다.
어쩐지 잘난 척하는 듯한 말투였고, 수혁은 그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 뭐하냐. 밥 한 끼 사 먹지도 못하는데.’
[길게 보십쇼. 이제 슬슬 보이지 않습니까? 교수로의 길이?]
‘그건 그래.’
[다 제 덕이니까 그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쇼.]
‘하…….’
[잔말 말고 지금은 차에 타십시오. 조태진 교수의 표정 분석 결과, 수혁 지금 상당히 의심을 사고 있습니다. 아마 또라이인가 아닌가 하는…….]
‘알았다, 알았어.’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태진의 차에 올라탔다.
이미 조수석은 김인수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혁의 자리는 자연히 운전자 바로 뒷자리가 되었다.
잠시 수혁을 난감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태진이었지만, 이내 운전대를 잡았다.
가끔 이상한 모습을 보인다는 거야 원래부터 잘 알고 있었으니까.
“미안, 뒤에 골프채 그거 그냥 옆으로 밀어.”
대신 좋은 교수 행세를 이어 나가기로 했다.
“아, 네. 교수님.”
수혁은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이며 골프 백을 옆자리로 옮겼다.
어떻게 된 게 골프 백에도 외제 차의 엠블럼이 떡하니 박혀 있었다.
‘좋은 차 사면 이런 거 사은품으로 준다더니……. 정말 그러네.’
[그만 좀 부러워 하십쇼.]
‘안 부럽게 생겼냐? 나 봐라. 다리 다쳐서 골프는 아무리 돈 많이 벌어도 못 친다고.’
[아.]
‘미안하지?’
[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죠.]
‘이놈은 진짜…….’
수혁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표정을 지을 때쯤, 태진의 차가 지하 주차장을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흔해 빠진 4기통 터보 엔진이 아니라 진짜배기 6기통에 휘발유라 그런지 정말 조용했다.
고급 차들이 그토록 내세우는 정숙함의 표본이라고나 할까.
‘개부럽네…….’
당연하게도 수혁의 마음속엔 부럽다는 감정이 빠르게 차올랐고,
[적당히 좀 하시죠.]
바루다의 빈정거림 또한 계속되었다.
“아, 수혁아.”
그사이 차는 완전히 대로로 빠져나왔다.
이미 출근 시간이 지난 시각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태진은 여유로운 주행을 하다 말고 백미러를 통해 수혁에게 말을 걸어왔다.
감히 교수의 말을 씹을 수 있는 성격은 못 되는 터라 수혁은 즉시 입을 열었다.
“네, 교수님.”
“너 그……. 우하윤이라고 지금 본과 4학년 알아?”
“아, 알죠, 압니다. 교수님.”
“우창윤이라고 저기 아선 병원 교수님이 한번 만나 보라고 했던 거 기억하지?”
이걸 기억 못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하윤 자체도 유명했지만, 우창윤도 엄청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닥터 프렌즈라고……. 엄청 잘나가는 의학 유튜브 채널 이낙준 선생님 절친…….’
그래서 그런지 간혹 유튜브에 출연하기도 했다.
너무 노잼이라 나올 때마다 조회 수가 바닥을 치긴 했지만.
아무튼, 유명한 사람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네, 교수님. 기억합니다. 번호도 받긴 했는데……. 아직 연락은 못 해 봤습니다.”
“아, 그래서 나한테 연락이 왔구나. 내일 당직 아니지? 어차피 지금 급한 환자도 없으니까. 내일 한번 봐 봐. 부담 갖지 말고. 후배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고.”
“어…….”
이렇게 교수 주선으로 만나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빨리 ‘예’라고 하십시오. 제 분석 결과 조태진 교수는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알았어.’
하지만 바루다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네’라고 해야 할 것만 같았다.
“네, 교수님.”
“뭐……. 만나는 김에 잘되면 좋긴 할 거야. 내가 하윤이 어릴 때부터 봤는데, 걔 진짜 착해.”
어찌나 순했는지 갓난쟁이일 때부터 속을 한 번도 안 썩였을 지경이었다.
만나면 맨날 농담조로 ‘형님이 아니라 형수님 닮아서 그렇다’ 하고 놀려도 그 자존심 센 우창윤이 허허 웃을 정도였다.
끼이익.
그렇게 달리고 달린 차는 24시간 설렁탕 집 앞에 멈추었다.
‘아니, 이게 뭐여.’
내심 한우라도 구울 줄 알았던 수혁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진하게 새겨졌다.
“와, 저 설렁탕 진짜 좋아하는데. 교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3년간 단련된 김인수의 아부를 듣고 나니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난 아직 멀었구만…….’
해서 짧은 자책을 마친 후 김인수와 합세해 조태진의 비위를 맞춰 주었다.
대개는 불과 일주일 남짓한 시간 돌았을 뿐이었지만 교수님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워 감사하다는 말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에 더해 김인수는 역시 진짜 내과는 혈액종양내과라는 얘기를 했고.
이수혁은 다시 한번 감탄을 터뜨렸다.
‘이건 진짜 배워야겠다.’
[쓸데없어 보이지만……. 상급자가 수혁에 비해 확실히 더 숙련된 것으로 볼 때, 필요하다고 판단할 수도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칭찬 반 아부 반으로 이루어진 식사를 마친 수혁은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일단 병원을 빠져나왔다.
3월에도 잠깐잠깐 나왔던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일찍 본격적으로 나온 건 1년 차가 된 이후 처음이었다.
[약속은 세 신데. 왜 이렇게 일찍 나갑니까? 공부 안 합니까?]
‘인마……. 공부만 성공의 길이 아니야.’
수혁은 그 말을 하면서 창가 앞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얼굴은 썩 괜찮은 편이었지만, 통 자르지 못한 머리카락 때문에 거지꼴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지팡이까지 들고 있었다.
‘뭐……. 기대는 안 하지만.’
수혁이라고 해서 왜 생각이 없겠는가.
우창윤이야 워낙에 괴짜로 소문난 사람이니만큼 수혁의 결점을 크게 생각지 않을는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이 볼 때 수혁은 결코 일등 신랑감은 아니었다.
아니, 아예 신랑감이 아닐 수도 있었다.
고아에 다리까지.
[근데 왜 머리카락은 자르는 겁니까?]
바루다는 기대 안 한다고 해 놓고선 무려 헤어 커트 가격만 2만 원이 훌쩍 넘는 미용실에 들어온 수혁을 향해 빈정거렸다.
‘뭐. 노력도 못 해?’
[설마 어제 온 문자 때문에 이러는 겁니까?]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재차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수혁 선배님. 아빠도 그렇고, 신현태 과장님도 그렇고 얘기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어떤 얘기를 해 주실지 벌써 기대가 많이 됩니다. 내일 3시에 병원 앞 카페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벌써 몇 번이나 읽어서 아예 외워 버린 문자가 떠 있었다.
[이건 그냥 예의가 바른 거지 호감의 표시는 아닙니다.]
‘알아, 나도.’
[근데 왜 옷은 사는 겁니까?]
‘노력도 못 해? 너도 인마 하윤이 한번 보면 이해는 갈 거다.’
우하윤이 입학했을 때가 떠올랐다.
다들 어찌나 설레발을 떨어 댔는지.
하지만 그녀는 얼굴만 보고 껄떡대는 사람에게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 이전에 너무 훌륭한 인간이었던지라 그 누구도 쉽사리 접근조차 못 했더랬다.
물론 바루다에게 어필하기엔 턱도 없는 발언이었다.
[언제 봤다고 성을 생략하는 겁니까?]
‘몰라, 나도.’
수혁은 구경도 못 해 봤던 3월 달 월급으로 옷에 신발까지 산 후 카페로 향했다.
늘 보던 그냥 그 카페였지만 오늘은 어쩐지 좀 달라 보였다.
밝아 보인다고 해야 할까.
[주접떨지 마시고, 내과에 대해서나 말씀해 주시죠.]
‘초 좀 그만 칠래?’
[아, 저기 있군요. 흠.]
‘왜 네가 보기에도 너무 이뻐?’
[아뇨. 커피가 반쯤 비어 있습니다. 바닥에 흐른 물기로 미루어 볼 때, 여기 온 지 30분은 더 된 것 같군요.]
‘셜록 흉내 내지 마.’
[오 제 레퍼런스를 어떻게 아셨죠?]
‘잘 때마다 내 기억 들춰내는 거 다 알아. 자꾸 이상한 꿈 꾼다고 너 때문에.’
수혁은 더 얘기를 이어 나가려다가 이내 고개를 털어 대고는 하윤에게 다가갔다.
아무리 선후배 사이로 만나는 거라지만 일단 첫 만남 아니던가.
남들에게 그러하듯 미친놈으로 불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으흠, 흠.”
“아, 선배님!”
“언제 온 거예요? 많이 기다린 거 아니에요?”
수혁은 자기도 일찍 온 주제에 너스레를 떨었다.
하윤은 자신의 커피잔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어차피 공부할 거 있어서 겸사겸사 온 거예요.”
듣던 대로 참 좋은 사람이었다.
수혁은 자신도 모르게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하윤의 반대편에 앉았다.
[지금 표정 병신 같습니다. 수정할 것을 요청드립니다.]
물론 바루다의 깐죽거림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수혁 또한 느낄 정도로 좀 이상하긴 했기에 말을 듣기는 했다.
“그래, 내과에 대해서 궁금한 게 있다고요?”
수혁은 커피를 시켜 놓고 나오기 전까지의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하윤은 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가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금세 수혁의 말을 받아 주었다.
“네. 공부하다 보면 내과가 제일 재밌거든요. 근데 아빠는 다른 과가 더 편하고 좋다고 해서요.”
남들 앞에서는 맨날 내과 최고라고 하더니.
결국, 자기 딸은 시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수혁은 내과를 온 게 잘한 짓인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공부가 재밌으면 후회할 거 같진 않은데요? 머리에만 들어 있던 지식을 환자한테 대입시키는 과정이 되게 재밌어요.”
“그래요? 역시 그럴 거 같았는데.”
다행히 하윤은 대화를 참 잘 맞춰 주는 편이었다.
내과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기도 했고.
덕분에 무려 2시간이 훌쩍 지나도록 둘은 입을 쉬지 않고 놀려 댈 수 있었다.
[수혁.]
이제 슬슬 자리를 옮길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바루다가 말을 걸어왔다.
‘응?’
[손 잡아도 될 거 같습니다.]
‘뭔 미친 소리야 새꺄.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저 못 믿습니까? 바루다는 세계 최고의 진단 목적 인공지능입니다. 최근 감정 분석 데이터를 쌓기도 했고요.]
‘하…….’
그냥 개소리라고 치부하고 싶은데.
어쩐지 혹하는 개소리이기도 했다.
‘너, 진짜야?’
[물론이죠.]
‘음…….’
[망설이지 마십쇼. 우하윤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언제 틀리는 거 봤습니까?]
‘못 봤지.’
[그럼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