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환자나 보자 (2)
“수혁아, 가자.”
3년 차 치프 김인수가 오후 회진을 돌고 잠시 벽에 기대 서 있던 수혁을 불렀다.
[또 이상하게 생각하기 전에 움직이시죠.]
‘알았어.’
수혁은 짜장면을 먹인 후로는 눈에 띄게 고분고분해진 바루다의 말을 따라 김인수를 바라보았다.
김인수는 팔에 서류 뭉치 같은 것을 끼고 있었는데, 수혁도 그와 똑같이 생긴 서류 뭉치를 전달받은 바 있었다.
“주간 증례 토의 가시는 거죠?”
“어, 가야지. 당직 말고는 다 가야 해. 안 그러면…….”
공부 안 하는 놈이라고 찍힐 게 뻔했다.
월말에 열리는 태화 내과 증례 발표회와 비할 정도로 커다란 행사는 아니었지만.
내부 행사 중에서는 그래도 꽤 커다란 행사 중 하나였으니까.
“네, 가시죠. 선생님.”
해서 수혁은 부리나케 크룩스를 끌며, 지팡이를 짚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물론 그가 이렇게 서두르는 데는 뭔가 좀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이상하지? 이번 케이스.’
[네. 뭔가 놓친 부분이 있어 보입니다.]
감염내과 쪽에서 나온 케이스였는데.
신현태 과장 환자는 아니고, 그 밑에 있는 다른 교수의 환자였다.
치료는 진단에 맞추어 잘하고 있었으나 영 결과가 신통치 않았다.
해서 토의를 해 볼 요량으로 주간 증례 토의에 제출한 모양이었다.
‘근데 내가 거기 가서 떠들어도 되려나.’
수혁은 복도를 따라 걷고 있는 수많은 내과 의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2년 차들도 어깨를 움츠리고 있을 정도로 높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3년 차, 펠로우, 조교수, 부교수 그리고 정교수들까지.
지금 시간 되는 내과 사람들은 죄다 모여들고 있었다.
[분위기 봐서 하시죠.]
‘오, 그래도 좀 늘었다?’
[짜장면을 더 많이 먹기 위해서는 더럽고 치사해도 세상과 야합해야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뭘 또 야합이라고까지 할 건…….’
[신현태 과장입니다. 인사하시죠.]
‘아.’
바루다의 말에 정신을 차려 보니, 증례 토의가 열리는 지하 1층 소강당 앞에 서 있는 신현태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거리가 꽤 먼데도 불구하고 오로지 수혁만 바라보고 있었다.
[감염내과로 꾈 생각이라더니, 노골적이군요.]
‘그러게.’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전에 전해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 신 교수님은 뭐 벌써 그렇게 이수혁한테 공을 들이냐?
- 로열이잖아, 똑똑하고. 감염내과로 와 주면 땡큐지.
대강 이런 내용이었는데.
수혁 앞에서 대놓고 떠들어 댄 게 아니라, 저들끼리 얘기하는 걸 의국에서 엿들은 것이었다.
도리어 더 정확한 정보일 수 있다, 뭐 이런 뜻이었다.
[그런데 감염내과는 돈을 잘 법니까?]
‘응?’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어…….’
[왜 그러십니까?]
‘아니, 좀 변한 거 같아서.’
맨날 돈 얘기 한다고 세속적이라고 깔 때는 언제고.
짜장면 하나에 이렇게 돌변할 줄이야.
수혁은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껄껄 웃었다.
그리고 바루다의 말에 대답해 주는 대신 아까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신 과장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어, 그래. 우리 수혁이. 혈종도 끝내주게 돌고 있다며?”
“아……. 아닙니다.”
“오늘 증례 토의에서도 뭐 좀 이상한 거 있으면 기탄없이 얘기해 보라고. 정 뭐하면 기회를 줄 테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그래. 그러려면 맨 앞자리 앉아야겠지? 다른 놈들처럼 뒤부터 채우지 말고, 맨 앞으로 가라. 그래야 위 연차들도 이뻐해.”
“네, 교수님.”
수혁은 그리 답하고는 실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영화관 형태로 생긴 소강당은 이미 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신현태 교수의 말처럼 뒤부터 차 들어가고 있었다.
눈치 없는 1년 차도 끼어 있었는데, 3년 차들의 구박을 받고 있었다.
‘역시 앞으로 가긴 가야겠구만.’
[그렇게 하시죠. 기회가 오면 질러 보는 겁니다.]
‘지르긴 뭘 질러. 말씀드려도 나중에 조용히 말씀드려야지.’
[뭐……. 알겠습니다.]
‘너 또 네가 목소리 내고 그러려고 그러지? 시발. 하지 마, 그거. 진짜 큰일 나.’
[아뇨? 제가 미쳤습니까? 안 그럽니다. 다만 신현태 과장 표정 분석 결과…….]
‘백날 틀리는 분석은 하지도 말고.’
수혁은 지난번 일이 떠올라 고개를 휘휘 털어 대고는 맨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 수혁이.”
앉고 보니 하필 이현종 원장 옆자리였다.
어지간하면 교수들도 찾아가지 않는 자리인지라 여태 비어 있었던 것을 수혁이 채운 참이었다.
이제 와서 다시 일어나기도 뭐한 상황인지라 수혁은 마지못해 웃어 보였다.
“워,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그래, 그래. 편히 앉아. 원래 공부는 마음 편히 해야 해.”
“네.”
“그런데 오늘 케이스 미리 읽어 오긴 했어? 당연히 읽어 봤지?”
방금 편안하니 어쩌니, 떠들어 놓고선.
바로 불편하게 만드는 질문은 던지는 이현종이었다.
‘이러니까 신 과장님 말고는 아무도 안 앉지…….’
수혁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을 쉬진 않았다.
상대는 다른 교수도 아니고 원장이었으니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미래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었다.
“네? 네. 읽어 봤습니다.”
“뭐 좀 이상한 점은 없고?”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좀 이상한 점을 찾긴 찾은 모양이었다.
‘야, 뭐라고 하냐. 그 잘난 분석 좀 해 봐.’
[백날 틀리는 분석 하면 뭐 합니까?]
‘설마 삐졌어? 난 네가 맨날 개소리해도 다 참는데?’
[흠.]
바루다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식의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부터 분석에 토 달지 않는 겁니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차였는데…….’
[그럼 뭐 이대로 입 다물까요?]
‘알았어, 알았어. 하, 이놈은 진짜…….’
[그냥 이상한 게 있기는 한데, 발표는 들어봐야 알겠다. 이런 식으로 발언하십시오. 분석 결과 이현종 원장은 재미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벌써 답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아……. 알았어.’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던지라 수혁은 홀랑 넘어가고야 말았다.
“네, 원장님.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발표 들어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 좋네. 재밌어. 아, 다들 들어오는구만. 일단 듣자고. 남 발표하는 데 떠드는 건 예의가 아니야.”
“네, 원장님.”
수혁은 ‘먼저 말 건 사람은 원장님이 아닌가요’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 입 밖에 내진 않았다.
대신 좌장 자리에 앉은 신현태 과장과 그 바로 옆에 자리한 이번 케이스의 담당 교수 장덕수 그리고 발표를 맡게 된 3년 차 김진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진용…….’
약국장 김진용.
옛날 옛적 리베이트가 횡행하던 시절 약국장의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였다고 했다.
의국에 유통되는 약을 저 약국장이 어느 정도 결정을 했으니 당연한 얘기.
하지만 리베이트가 없어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실 유명무실한 직함일 뿐이었다.
부치프라고나 할까.
[성깔 더럽다던데.]
‘진짜 더럽지.’
알게 모르게 정강이 깐 거 다 합치면 지금쯤 구속당해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거기에 이런저런 명목으로 의국비 까먹고 다니고, 법인 카드 사적으로 유용하고.
1, 2년 차는 더러워서 참고, 3년 차는 쪽팔려서 참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의국에서 방출당했어야 할 사람이었다.
“안녕하십니까, 3년 차 김진용입니다.”
그런 김진용이 단상 위에 놓인 마이크를 잡고 인사를 건넸다.
1, 2년 차들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허리를 세웠다.
수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들 저 인간에게는 한 번쯤 당해 본 경험이 있었으니까.
김진용은 그런 변화가 뿌듯하기라도 한 듯, 여유 있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늘 제가 발표해 드릴 케이스는 6주 전 시작된, 식욕 부진을 주소로 내원한 78세 남자 환자입니다.”
그리곤 화면을 넘겨 환자의 지금까지의 병력을 띄웠다.
“환자는 내원 5년 전부터 척추관 협착증으로 인한 허리 통증이 있었으나, 혼자 옷 입기 및 식사하기가 가능하였습니다.”
이 말은 곧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었단 뜻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사전에 배포된 자료에 나와 있던 것들이라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내원 6주 전부터는 점차 피로감을 호소하며 하루에 침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12시간 이상 유지되었습니다. 내원 2주 전부터는 식욕 부진 및 구역감이 동반되면서 식사량이 절반으로 감소하였습니다.”
이 말은 곧 전신 쇠약이 발생했다는 뜻이었고, 그 정도가 상당히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환자의 나이가 젊다면 그냥 요즘 좀 피곤한가 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 케이스는 78세.
노인이었다.
“더불어 혼자 옷을 갈아입을 수 없을 정도로 전신 위약감이 악화하여 본원 외래 내원하였고, 입원하였습니다.”
노인이 생활 수행 능력이 떨어진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다가 ‘어?’ 하는 순간에 돌아가시는 경우도 왕왕 있었으니까.
즉 진단이 안 된 상태에서라도 입원을 결정한 것은 매우 잘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생긴 건 산도적인데, 의외로 세심해.”
아니나 다를까 원장도 이 면에 대해서는 칭찬을 해 대었다.
그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화면이 또 넘어갔다.
환자의 흉부 엑스레이 사진이었다.
“보시면 양측 폐 하엽 기관지 부근에 음영이 증가해 있습니다. 다음 혈액 검사를 보시면 CRP 증가해 있어 지역사회 감염으로 인한 폐렴으로 진단, 노인이며 중증도를 감안하여 처음부터 레보플록사신(Levofloxacin: 항생제) 투약하였습니다.”
레보플록사신이면 내성 균주에 대한 항생제들을 제외하면 거의 끝판왕이라고 보면 되었다.
“투여 5일 후 증세 호전 보이는 듯하였으나, 지금은 다시 악화한 상황입니다.”
그러니 폐렴이었다면 호전되는 것은 당연했을 터였다.
하지만 환자는 불과 3일 만에 증상이 다시 악화한 상황이었다.
즉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환자의 과거력이었고, 이제부터 해야 할 것이 바로 토의였다.
“다시 촬영한 흉부 엑스레이에서는 이전 소견과 변화 없었습니다. 이에 원인 불명의 전신 위약감이라고 판단, 증례 토의에 제출하였습니다.”
진용이 말을 마치자마자, 이현종이 손을 들었다.
그리곤 진용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그래. 이 케이스의 발표자로서, 김진용 선생의 생각은 뭐 같아요?”
쉽게 말해 묻지만 말고 스스로 생각을 해 보란 뜻이었다.
김진용은 잠시 당황했지만 3년 차답게 곧 답을 할 수 있었다.
“레보플록사신에 내성이 있는 폐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현종의 마음에 드는 대답은 아니었다.
“폐렴의 가장 흔한 증상이 전신 위약감인가?”
“그건……. 아닙니다.”
“근데 왜 폐렴에 집착하지?”
“엑스레이 사진상…….”
“이 환자 78세잖아. 오래된 병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
“명색이 3년 차인데, 그 정도밖에 생각을 못 해? 또 다른 사람 없어? 이 환자 주치의는 누구야.”
이현종의 말에 뒤쪽에 있던 누군가가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2년 차 황선우였다.
“자네 생각은 뭐지?”
가뜩이나 무식하기로 소문난 것이 황선우 아니었던가.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눈치는 있어서 폐렴이라고 하진 않았다.
“폐, 폐암.”
“뭐, 폐암?”
하지만 그 말은 더 웃음거리가 되고야 말았다.
“넌 여기서 뭐 보이는 게 있어? 뭘 보고 폐암이라는 거야. 나 좀 가르쳐 줘 봐.”
“그…… 죄송합니다.”
“허이구……. 2년 차란 녀석이……. 더 없어? 이거 말해 볼 사람.”
이현종은 혀를 끌끌 차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모두 숨을 죽인 채, 심지어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다.
“이거…… 태화 의료원 내과라는 사람들이…….”
이현종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정말이지 실망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저어 댔다.
그러다 문득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수혁을 발견하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야야, 웃는다……. 역시 숨겨 둔 아들.”
“서러워서 살겠냐.”
뭔가 오해를 잔뜩 자아내는 미소였지만.
아무튼, 이현종은 기분이 좋았다.
“이수혁. 너 생각은 어때?”
얜 알 거 같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