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환자나 보자 (3)
“아……. 네. 그럼.”
수혁은 마지못해 일어난다는 투로 아주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자신만만한 얼굴로 이현종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았다.
이 역시 남들이 볼 땐 꽤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이현종은 절대로 저런 모습을 보여 줄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저 봐라, 저. 아들 사랑에 아주…… 원장 아빠 안 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이거.”
“‘나는 의학이랑 결혼했다’ 하시더니…… 언제 저렇게 장성한 아들을 두셨대?”
뭣도 모르는 레지던트들이 제멋대로 수군거리는 사이, 수혁은 마이크를 쥔 채 헛기침을 했다.
[시간 끌지 마시고, 바로 시작하시죠.]
어째 수혁보다 수혁 자랑에 목매달고 있는 바루다가 재촉할 정도로 조금은 긴 헛기침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수혁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주 잠시 황선우가 일어나 있던 쪽을 바라본 후였다.
황선우는 차마 그 눈을 바라보고 있기가 그래서 고개를 조금 좌측으로 틀었다.
“환자분은 78세 남자분입니다. 현재 163cm에 62kg이죠. 건장하다고는 못해도 나이치고 그리 나쁜 수치는 아닙니다. 금연한 지도 30년이 지났고, 흉부 엑스레이 소견도 폐암과는 거리가 멉니다. 즉 뭔가 만성 질환일 가능성은 적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의 말에 황선우의 얼굴은 썩어들어갔고, 김진용의 얼굴은 조금 밝아졌다.
요새 태화 의료원 개원 이래 최고의 천재라 평가받고 있는 수혁의 의견이 어쩐지 자신과 동일해 보였으니까.
3년 차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그 상대가 우수하다고 소문이 나 있고 심지어 로열 중의 로열이라고 입소문을 탄 수혁이라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급성 폐렴이라고 보기엔 증상이 조금 이상합니다. 기침도 없으며 숨찬 증상도 없습니다. 그저 전신 쇠약감이 환자분이 표현하는 증상 전부입니다.”
그러나 수혁의 말이 이어지자 김진용의 얼굴 또한 황선우와 비슷해졌다.
“그래. 두 질환이 아니란 거야 알겠어. 아마 여기 모두 대강은 알고 있었을 거야. 그럼 네 진단은 뭐지?”
이현종 원장은 따진다는 느낌보다는 무언가를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재차 수혁을 향해 물었다.
어지간히 애가 닳아 있는 듯이 보였지만, 수혁은 즉시 대답하는 대신 단상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갔다.
“아, 자료가 필요해서 그래? 이걸로 해.”
그러자 당황한 김진용 대신, 좌장 자리에 앉아 있던 신현태 과장이 레이저 포인터를 손수 가져다주었다.
파워포인트를 넘길 수 있는 버튼까지 구비된 제품이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아냐, 아냐. 어서 해 봐.”
신현태 과장 또한 이현종 원장과 매우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새끼 얼른 말해 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김진용과 황선우가 짓고 있는 표정과 딱 반대였는데, 좌중 그 누구도 두 레지던트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저 이상할 정도로 예쁨을 받고 있는 수혁과 내과의 두 실세를 얼떨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완전 편애하네, 편애.”
누군가는 이렇게까지 중얼거릴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수혁에게도 부담이 될 만도 하겠지만.
수혁은 전혀 떨고 있지 않았다.
[역시 태화 내과 증례 발표가 도움이 되었군요.]
‘선순환이라고 하더라, 정신과 용어로.’
이미 이보다 훨씬 큰 무대에서 성공적으로 발표를 해 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경험이 베타 블로커와 같은 약물보다도 더 큰 도움이 되어 주는 중이었다.
중압감보다는 그저 딱 적당할 정도의 활력만 돌았다.
“우선……. 환자의 입원 당시 혈액 검사를 보셔야 합니다.”
수혁은 그리 말하면서 화면을 넘겨 김진용은 슥 훑고 넘어갔던 표를 가리켰다.
대부분 노인치고는 썩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붉은색, 즉 이상하다고 표기된 것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중에서 수혁은 ‘Na’를 가리켰다.
소디움이라고도 하고, 나트륨이라고도 부르는 녀석이었다.
“정상 수치는 135에서 145인데, 이 환자는 127입니다.”
노인의 경우 별다른 이유 없이 떨어지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멀쩡하다가 입원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진 노인이라면 이게 왜 이럴까 한 번쯤 생각을 해 봐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허송세월하다가 환자를 잃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환자는 딱히 부종 등의 증상을 보이지 않으며, 기존에 야뇨증 치료를 목적으로 먹고 있던 약 중 데스모프레신이 이 저나트륨혈증의 원인이 될 수 있으므로. 낮은 나트륨은 환자의 현 증상과 관계가 있지는 않겠습니다. 아, 데스모프레신은 끊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물론 모든 이상이 지금의 증상과 관계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짚어 나가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훌륭한 내과 의사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수혁에게 왜 논점에서 벗어난 얘기를 하느냐고 하진 않았다.
도리어 놀랬다는 표정만 지어 댈 뿐이었다.
“쟤가……. 진짜 1년 차 맞냐.”
“난 뭐 신장내과 교수님이 얘기하는 줄?”
몇몇 레지던트들은 감탄을 내뱉었다.
다만 앉은 자리에서 지금의 수혁과 비교의 대상이 되어 버린 김진용과 황선우는 그렇지 못했다.
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수혁에 대한 원망을 잔뜩 쌓아 가면서.
“다음으로 환자의 헤모글로빈을 보시면 9.1입니다. 정상인 13에서 17이니 상당히 낮죠. 빈혈입니다.”
빈혈 또한 노인에게서는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소견이었다.
특히 지금 환자처럼 혼자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흔하다는 말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영양이 부족한 경우가 너무도 많았으니까.
하지만 역시나 증상이 있다면 이게 왜 이런지 한 번쯤은 짚어 봐야 했다.
노인이니까 그렇지 하는 생각만큼 위험한 것은 없었다.
특히 환자로 온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레티큘로사이트, 즉 미성숙 적혈구 생산 지수 또한 1.03으로 떨어져 있습니다. 이건 적혈구가 어디서 파괴되고 있는 게 아니라, 생성이 잘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조혈 작용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죠.”
이 또한 노인에게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소견이었다.
즉 지금까지 수혁이 언급한 것은 모두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아직 입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다.
“마지막으로 기본 혈구 검사에서 백혈구 성분을 보시면……. 일단 전체 수가 26100(정상 수치: 4000~10000)으로 크게 증가해 있습니다. 급성 감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성분에서 단핵구가 무려 31%입니다.”
“음!”
아주 결정적인 단서라는 듯 이현종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뿐만 아니라 현재 수혁의 지정의를 맡고 있는 조태진 교수 또한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그는 너무 바쁘단 핑계로 미리 배포되었던 케이스 자료를 아예 떠들어보지도 않았던 터라 놀라움의 정도는 이현종 원장보다 더더욱 컸다.
“아까 정상적인 조혈 작용이 떨어졌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까지 단핵구가 많이 생성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할까요?”
수혁은 이제 제법 여유로운 얼굴이 되어 좌중을 돌아보았다.
그럴수록 김진용과 황선우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여기까지 듣고 보니 의심되는 질환이 하나 있기는 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공부를 덜 했다 해도 태화 의료원에서 수련을 받다 보면 강제로라도 배우는 게 있는 법이었으니까.
‘아, 망했네……. 하…… 저걸 왜 생각 못 했지…….’
특히 3년 차면서, 그것도 발표까지 맡은 주제에 아무것도 떠올리지 못했던 김진용은 깊은 탄식까지 내뱉고 있었다.
물론 수혁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 답을 내놓지 않았으니까.
그가 좌중을 이렇게까지 몰입시킨 것은 그저 과정이었을 뿐이었으니까.
“네, 바로 혈액암. 그중에서도 이 진행 속도와 환자 나이를 감안한다면 다발성 골수종일 가능성이 가장 크겠습니다.”
그가 진단명을 내놓기가 무섭게 좌장 자리에 앉아 있던 신현태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현종 원장도 입을 열긴 했는데, 그는 마이크가 없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한 연고로 발언권은 신현태에게 넘어갔다.
“좋아. 그럼 어떤 검사를 해야 하지?”
“척추 MRI, CT 그리고 말초혈액 도말 검사 및 혈장 면역 전기영동법 등을 제안합니다.”
“그래. 장덕수 교수님 생각은 어떠하신지.”
누가 봐도 정답이었다.
여기서 더 뭔가를 추가하긴 어려울 정도로.
해서 신현태는 현재 환자의 담당 교수를 맡고 있는 장덕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장덕수는 이미 발표 전 혈액종양내과 교수들과 토의를 마친 후였기 때문에 답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그들이 토의했던 내용을 거의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말하고 있는 사람이 1년 차라는 사실이 무척 놀랍고도 당황스러웠다.
어찌나 당황스러운지 즉각 답을 내놓지 못할 지경이었다.
“생각이 어떠하신지?”
덕분에 신현태 과장이 한 번 더 채근한 후에야.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려 다리를 몰래 툭 하고 찬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아, 아. 네. 아……. 이것 참. 훌륭한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장덕수 교수님 계획이 어떠냐고요.”
교수가 하기엔 좀 격 떨어지는 답이 아니던가.
때문에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새꺄, 똑바로 해.’
같은 교수라고 하기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심지어 장덕수가 레지던트 시절부터 교수였던 신현태는 다시 한번 장덕수의 다리를 걷어찼다.
이번에는 감정이 실려 있어서 제법 아팠다.
“악. 아, 네. 그……. 동의합니다. 다만 감염 여부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 흉부 CT와 혈액 배양 검사 및 객담 배양 검사 정도는 추가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행히 또 맞는 일은 없었다.
이번 답은 제법 교수다웠으니까.
“좋군요. 그럼 그냥 이 자리에서 일단 전과를 할까요? 혈종으로?”
신현태 교수나 장덕수나 다른 교수들이나 이 환자가 더 감염내과에 있을 환자라고 생각지는 않고 있었다.
수혁의 말대로 이 환자는 암 환자였으니까.
그것도 최대한 빨리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가 필요한.
그렇지 않으면 속절없이 죽어 갈.
“네, 제가 받겠습니다.”
해서 조태진 교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곤 그 손을 그대로 뻗어 아직도 단상 앞에 서 있는 수혁을 가리켰다.
“주치의는 1년 차 이수혁 선생에게 맡기겠습니다. 괜찮겠죠?”
당연하게도 반대는 없었다.
여기 모인 모든 레지던트, 지금까지 이 환자의 주치의를 맡았던 황선우와 그 치프를 맡았던 김진용까지 통틀어서 이수혁이 이 환자에 대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수준이 다르단 것을 보여 주었으니까.
‘얘는 진짜 천재네!’
거의 모든 교수의 머리에 수혁의 이름이 깊이 각인되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