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1화 (31/1,303)

31화 이제 또 다른 곳 (3)

타닥.

타닥.

수혁은 어렵사리 지팡이를 짚은 채 1층으로 올라갔다.

예전에도 몸이 날랜 편은 아니어서 재빠르게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좌측 다리가 불편해진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아, 이거 빨리 낫고 싶은데.’

[지금까지 습득한 데이터상으로는 방법이 없습니다.]

‘나도 알지. 그래도…….’

[의학 발전은 무척 빠른 편이고, 보조 기구 쪽의 발전은 더더욱 빠른 편이니 죽기 전에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위로는 안 되네.’

[위로하려고 한 말이 아닌데요?]

‘에이, 시발.’

수혁은 나지막이 식빵을 찾으면서 응급실 내부로 들어섰다.

예전과는 달리 보안이 강화되면서 카드를 찍어야 내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삐빅.

수혁이 문을 열자마자 긴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응급실에서 쓰는 각종 기구와 물품들이 놓인 창고가 복도의 좌우로 자리했다.

타닥.

타닥.

그 복도를 한참을 해치고 지나가야 응급실 스테이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 이수혁 선생님.”

병원 내에서 지팡이 짚고 다니는 의사는 수혁 하나였다.

그래서 그에게 노티한 인턴은 수혁을 보는 즉시 알아볼 수 있었다.

딱히 태화대학교 의대 출신이 아니었음에도 그러했다.

“인턴 샘?”

“네. 아까 노티드렸던 노영태입니다.”

노영태라고 하는 인턴은 인턴이라고 하기엔 너무 늙수그레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하마터면 형이라고 부를 뻔했다.

수혁보다 대략 5, 6년은 더 위로 보일 지경이었다.

‘뭐 다른 곳 다니다 오셨나?’

[그랬을 가능성이 큽니다. 내과 레지던트 중에도 마흔이 넘는 사람이 하나 있으시더군요.]

‘그분은 유급을 당하다, 당하다 군대 다녀오고 재입학까지 한 분이셔.’

[허어.]

수혁은 바루다의 바람 빠지는 소리를 뒤로하고 인턴을 따라 부지런히 걸었다.

환자는 일반 응급실 병동에 있는 게 아니라 처치실 안에 있었다.

‘이상한데? 외상 환자가 아닌데 왜…….’

보통 처치실이라는 곳은 진짜 급한 환자들에게 배정되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응급실 내의 인력이나 장비가 집중된 곳이기도 했으니까.

“으아아아!”

수혁은 딱 처치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왜 이 환자에게 처치실이 배정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환자는 조금 전까지 면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정신과 레지던트의 멱살을 잡은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새끼들아! 나는 이상이 없다고! 신내림만 받으면 된다고!”

“어어. 이거 놓으시고요, 환자분!”

수혁 앞에 있던 인턴이 부지런히 달려가 환자를 떼어 내었다. 환자는 정신과 레지던트와 격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는지 둘 다 만신창이였다. 특히 레지던트의 얼굴은 말이 아니었다.

덕분에 겨우겨우 환자 손에서 벗어난 정신과 레지던트가 바닥에 떨어진 안경을 집어 들었다.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니, 아는 얼굴이었다.

“오진승 선생님?”

“아, 수혁아. 네가 오늘 내분비 당직이구나.”

오진승은 방금 환자에게 멱살을 잡혔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차분해 보였다.

심지어 보조개가 인상적인, 푸근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과연 세간에서 ‘정신과를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고 부를 법한 사람이었다.

“네, 선생님. 근데 조금 전에 그건…….”

“환자분이 약간 정신 착란이 있으셔. 여기가 병원이 아니라…… 뭔가 다른 곳이라고 믿고 있어.”

“망상인가요?”

“망상……. 응. 근데 좀……. 달라.”

오진승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환자를 돌아보았다.

그사이 환자는 다른 의료진들에 의해 제압되어 눕혀져 있었다.

특히 노영태라고 하는 인턴의 힘이 아주 대단한 듯했다. 순식간에 환자를 떼어놓는 기술이 돋보였다.

수혁은 저대로 두어도 한동안은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진승을 돌아보았다.

“달라요?”

“응. 병력이나 이런 게…… 망상하고는 달라. 보니까 원래 다니던 병원에서 약도 쓴 모양인데, 반응이 거의 없어. 급성기에 쓰는 약만 들을 뿐이고.”

“급성기라면 안정제?”

“그래. 이런 발작만 가라앉혔을 뿐, 실제로 발작의 빈도를 줄인 적은 한 번도 없어.”

안정제야 어떤 이유든 간에 관계없이 모든 발작에 듣는 약이니 논외로 쳐야 했다.

그러니 진승의 말을 종합해 보면 정신과적 증상에 관해 쓴 정신과 약이 별로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좀 이상하군요. 최근 정신과 약물 치료는 비약적인 발전을 했는데요.]

예전엔 마음의 병이라고 불렀던 것이 바로 정신과 질환들이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단지 마음의 병이라고 부르기에는 실재하는 다른 이상이 있다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었다.

뇌 신경 전달 물질이 너무 부족하거나 너무 과해서 생기는 증상들이라는 얘기다.

그 말은 즉 약으로 그 전달 물질을 조절하면 증상이 좋아진다는 뜻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한 효과를 많이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이 아예 안 듣는다라.’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다른 병원에서 가지고 온 지금 이 양재원 환자에 대한 차트를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순서는 역순이었다.

최근부터 과거까지.

‘혼수상태로 온 적이 있어……. 이때 혈당이 50이 안 되었구나.’

[당에 반응해서 회복되었군요.]

‘당시 진료한 의사는 조증 삽화 또는 조현병 증상으로 인한 영양 부족으로 판단했어.’

[환자 진술이랑은 다르군요.]

환자는 분명 밥을 먹었다고 진술한 바 있었다.

하지만 혼자 사는 환자인 데다가, 진료 당시에는 워낙 횡설수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요하게 생각하진 않은 듯했다.

‘물건이 두 개로 보인다고 한 적도 있고…… 실제로 경련이 있어서 입에 거품을 문 적도 있어.’

[입원 당시 기록을 보면……. 아주 골치 아픈 환자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신경학적 증상이 너무 많군요.]

‘확실히 오 선생님 말대로 전형적이진 않아. 보면 약은 거의 다 들어가고 있잖아?’

[그렇군요. 약물에 반응하지 않는 정신병도 있기는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합니다.]

그런 것 치고는 또 환자가 멀쩡할 때는 지나칠 정도로 멀쩡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간단한 업무까지 가능한 수준까지 회복되기도 했고.

모든 것이 일반적인 정신병하고는 많이 달랐다.

‘약이 안 듣는데……. 이런 식으로 회복이 된다?’

[이상하군요. 지금까지 환자를 데리고 있던 병원에서 쓴 약은…… 안정제 말고는 들은 게 없습니다.]

‘그래서 신내림이라는 주술적인 방법을 떠올린 건가?’

수혁이 계속 차트를 넘기고 있으려니 오진승이 다시 한번 말을 걸어왔다.

“수혁아. 뭐 좀 보이니?”

“네? 아뇨.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정신과 질환이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근데 일단은…… 환자가 저혈당이 좀 심해서 말이야. 이것부터 좀 해결해 줄래?”

“아, 네.”

그제야 수혁은 자신에게 온 노티가 이 환자에 대해 전반적으로 봐 달라는 게 아니라, 저혈당에 대해 봐 달라는 것이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혈액 검사, 한 거 다 볼 수 있을까요?”

“어, 그래. 저기 떠 있을 거야.”

“네, 형.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오진승은 병원을 넘어 대학 전체 최고의 신사로 통하는 만큼,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빈 컴퓨터를 가리켰다.

‘저런 사람이, 같이 술만 마시면…….’

호날두가 되어 술자리를 진행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개가 되거나 했으면 차라리 더 이해가 되었을 텐데.

그런 사람은 생전 처음이었다.

저렇게 젠틀한 사람이 실은 술자리를 주도하는 인간이라니.

[일이나 하십쇼. 잡생각 하지 마시고.]

‘알았다, 알았어.’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진승과의 옛 추억에서 벗어나 지금 눈앞에 있는 환자의 검사 결과를 들여다보았다.

‘저혈당……. 흠. 꽤 심하네.’

아까 노티 올 때만 해도 66이라고 들었는데.

지금은 40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환자는 아직도 횡설수설 중이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의식 변화를 일으켜도 시원찮을 수치인 것을 감안하면 꽤 대단하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에 비하면 다른 검사 결과들은 상당히 괜찮군요.]

‘아……. 그렇네.’

정신병력이 오래되면 딱히 그 정신병 때문이 아니라, 그 증상들 때문에라도 생활 습관이 망가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망가진 생활 습관은 곧 혈액 수치의 이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고.

하지만 이 환자의 검사 결과는 거의 깨끗하기만 했다.

적어도 응급실에서 일반적으로 시행하는 검사에서는 이상 소견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확실히 이상해.’

[고민은 이따 하시고, 일단 당을 주시죠. 더 내려가면 위험합니다.]

‘그래야겠지?’

[네.]

수혁은 일단 바루다의 말에 따라 당을 주었다.

환자는 딱 당이 들어가자마자, 입을 다물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헛소리를 중단했다.

“흐음.”

대신 고개를 두리번거림으로써 여기가 어디인지 파악했다.

“병원…… 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오진승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갔다.

본래 면담이라는 건 정신이 온전할 때 해야 효과적인 법이었으니까.

수혁은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 당을 주니까…… 의식만 돌아온 게 아니라…….’

[정신도 차린 거 같아 보이는군요.]

‘아까 차트 좀…… 다시 봐 보자. 뭔가 좀 이상해.’

[네.]

하여 수혁은 내려놓았던 차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것 좀 봐. 환자 증상이 시간에 따라 달라.’

[그렇군요. 아주 규칙적이군요.]

증상의 양상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간호 기록상 환자가 액팅 아웃 즉, 증상 발작을 보이는 시간은 거의 한결같았다.

오전 11시, 오후 4시, 저녁 9시.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모르겠습니다. 좀 더 정보가 필요합니다.]

‘흐음……. 어, 아냐. 이 시간이……. 변했어.’

[그렇군요. 이젠 오전 9시, 오후 2시, 저녁 7시부터 증상이 발현하는군요.]

‘뭐야 이거?’

수혁은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차트를 톡톡 두드렸다.

“어어! 환자분! 이거 놓으세요!”

“여기가 어디냐고, 이 새끼야!”

그사이 환자는 또다시 증상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당이 들어가고 의식을 찾은 지 꼭 3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환자분!”

인턴 노영태가 또다시 달려들어 환자를 뒤로 눕혔다. 의사가 아니라 레슬러를 했어도 소질이 있겠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움직임이었다.

그사이 수혁이 지팡이를 짚고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이 환자 혈당 체크 바로 좀 해 볼까요?”

그리곤 옆에 있던 간호사에게 구두 처방을 내렸다.

어차피 혈당은 계속 봐야 하는 일이었기에 간호사는 별말 없이 환자의 손가락 혈액을 이용해 검사를 시행했다.

“48입니다.”

“네?”

“48…… 맞습니다.”

“방금…… 당이 들어갔는데, 또 48이라고요?”

“네.”

“흐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