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맞다니까요? (1)
[인슐리노마(Insulinoma)! 인슐리노마!]
물론 바루다는 수혁이 입을 열기 전에도 이미 분석을 끝마친 후였다.
다만 수혁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
[백번 말했다! 인슐리노마!]
‘자꾸 들으니까, 욕 같거든? 좀 조용히 해 줄래? 사람보다 느린 깡통아?’
[와……. 와……. 제가 쌓은 데이터 토대로 얼렁뚱땅 때려 맞춘 거면서!]
‘얼렁뚱땅은 개뿔. 그냥 내가 천재인 거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와…….]
수혁은 그렇게 바루다의 입을 틀어막은 후, 마침내 김진용에게 자신이 생각하는 정답을 말했다.
“인슐리노마가 의심됩니다.”
“인……. 뭐?”
“인슐리노마입니다. CT로도 의심할 만한 병변이 있습니다.”
“야…….”
김진용은 ‘야’까지만 말하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어디서 들어보긴 했는데 바로 생각이 나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감히 3년 차, 그것도 악명이 자자한 김진용을 다그칠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바루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실수하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시발……. 어디서 들어 봤더라?’
덕분에 김진용은 제법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렇게 곰곰이 생각을 이어 나가다 보니, 언젠가 한 번 본 기억이 있기는 하다는 걸 깨달았다.
‘존나 드물다고 했는데?’
인슐리노마.
췌장에 생기는 양성 종양 중 하나.
조절되지 않는 인슐린 과다 증세를 보일 때 의심해 볼 수 있으나, 무척 드문 질환이었다.
작은 병원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밟는 사람 중에 3년 내내 단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제법 있을 정도였다.
근데 그걸 응급실에서 냅다 진단을 해 냈다고?
그것도 1년 차가?
김진용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보다도 우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새끼가 사방에서 오냐 오냐 하니까 아주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인데…….’
정말 천재라도 되는 양 행동하고 있지 않은가.
되지도 않는 흙수저라는 게 온 천하에 판명 나기 직전인 주제에.
빅 엿을 먹이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서효석 교수……. 주말에 노티하면 진짜 지랄할 텐데.’
그럴 거면 나가서 개원이나 하지 왜 대학 병원에 남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말에 연락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1년 차 말만 듣고 노티를 하는 건 미친 짓이었다.
즉 병원에 들어가서 직접 환자를 보고 노티를 해야 한다는 건데.
주말에 연락받기 싫은 건 서효석이나 김진용이나 마찬가지였다.
해서 일단 수혁부터 갈구기로 했다.
이게 편하고 쉬운 길이니까.
“야, 인슐리노마가 얼마나 드문 건지는 아냐?”
“아……. 네. 알고 있습니다.”
딱히 인구 10만 명당 유병률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드문 질환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영상 외에도 수많은 증거를 찾아낸 참이었다.
대답에 망설임이 전혀 없었다.
김진용에게는 더없이 거슬리는 말투가 된 셈이었다.
“이 새끼……. 이거 아주 1년 차가 무슨 스탭인 줄 알겠어. 어? 너 뭐가 그렇게 당당하냐?”
“네? 아……. 죄송합니다.”
수혁은 갑작스러운 시비가 무척 당황스러웠다.
[이 새낀 또 왜 이럽니까?]
바루다 또한 당황스러운지 냅다 욕부터 박았다.
하지만 수혁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1년 차였고, 그를 둘러싼 소문을 몰랐으니까.
해서 사과부터 해 댔다.
“죄송? 죄송한 줄 알았으면 이런 개뜬금없는 진단명 가지고 혼자 노티하질 않았겠지.”
“죄송합니다.”
수혁은 다시 한번 사과를 반복하면서 김진용이 왜 개새끼로 통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실력이 달리는 것도 아닌데 아래 연차들의 공공의 적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던 것.
“너 내일 회진 돌 때까지 그 환자를 왜 인슐리노마로 판단했는지 싹 정리해 놔. PPT 열 장 이상, 인슐리노마 자체에 대한 내용까지 해서.”
“아……. 그럼 우선 입원은 시켜 둘까요?”
“미쳤냐? 응급실에서 봐.”
“깔아……두라구요?”
수혁은 저도 모르게 환자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막 안정제 효과에서 벗어난 그는 조금은 멍한 얼굴로 사방을 돌아보고 있었다.
저 상태로 응급실에 두라고?
그건 의학적으로도 옳지 않을뿐더러, 도의적으로 옳지 않아 보였다.
“그래, 깔아. 뭔 시발 확실하지도 않은 거로 주말에 3년 차한테 전화질이야, 전화질이. 이게 다 시발 벌당 없어져서 그래.”
하지만 여기서 입원을 재차 주장하는 건 자살 행위일 터였다.
적어도 김진용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는 몇 번인가 더 상스러운 욕을 해 댄 후에야 의미 있는 말을 내뱉었다.
“잘 들어. 너 나한테 노티한 적 없는 거야. 알아?”
“아, 네. 선생님.”
“그리고 내일 가서 봤는데 발표가 미흡하다. 그럼 넌 진짜 뒈지는 거다, 알았어?”
“네.”
어차피 수혁은 증거가 미흡할 거 같진 않았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단호한 답이 김진용을 더 화나게 했다.
열등감을 건드린 까닭이었다.
“CT 찍었다고 했지? 1년 차가 노티도 없이 CT 찍고, 어? 아주 잘하는 짓이다, 잘하는 짓이야.”
해서 본래 처방권은 환자를 본 의사에게 주어지는 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를 부렸다.
“너, 그 CT 영상의학과 가서 판독 받아.”
“네.”
“레지던트 말고, 교수한테 받아.”
“그……. 내일까지요?”
“그래. 딱 진단명 말했잖아. 그럼 레지던트한테 구두 판독 말고, 제대로 받으라고. 그렇게 자신 있으면.”
이 말에 대해선 수혁도 자신 있게 답을 하지 못했다.
환자들이야 영상의학과라고 하면 그게 무슨 과인가 싶겠지만.
적어도 이 대학 병원 내에서 영상의학과는 갑 중의 갑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영상의학과 1년 차 비위를 다른 과 치프들이 맞춰야 한다는 말이 있을까.
그런데 한낱 1년 차가 교수 판독을 받으라고?
주말이라 안 나왔을 가능성이 훨씬 큰데.
이건 그냥 죽으란 말과 같았다.
“야, 왜 대답이 없어. 씹냐?”
“아……. 아닙니다.”
“내일이야. 내일까지 내가 말한 거 다 해 놔.”
김진용은 드디어 말끝을 흐리는 수혁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저열한 미소를 지은 채 전화를 끊었다.
‘어디 흙수저 새끼가……. 남의 발표 자리에서 지랄을 해 지랄을.’
마침내 발표 자리에서 겪었던 수모를 이제야 갚은 기분이 들었다.
“야! 탑 안 지키냐?”
게다가 지금은 하던 게임이 급했다.
해서 김진용은 저열한 미소를 간직한 채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슥.
수혁도 들고 있던 핸드폰을 가운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같은 3년 차인데 김인수와는 천차만별이군요.]
그러자 여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바루다가 말을 걸어왔다.
‘김인수 선생님은 좀 냉담해도……. 자기 일 밑에 안 넘기는 사람이야. 똑똑하기도 하고.’
[하긴 군 펠로우 남을 거라는 소문이 파다하긴 했습니다.]
‘이 인간은……. 진짜 개차반이지.’
[하지만 상급자입니다. 지시한 사항에 대해선 따라야 합니다.]
‘아, 짜증 나네.’
수혁은 고개를 저은 채 환자 쪽을 바라보았다.
CT상에 보이는 덩이가 인슐리노마가 맞다면 지금 즉시 입원해서 수술 일정부터 잡아야 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응급실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는 외과에 협진조차 낼 수 없었다.
조절되지 않는 인슐리노마에 대한 수술은 극히 위험할뿐더러, 그럴 만한 권한도 수혁에게는 없었으니까.
[일단 여기서 할 수 있는 치료를 하십시오, 수혁.]
고민에 빠진 수혁을 향해 바루다가 재차 말을 걸어왔다.
여느 때처럼 별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어조였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옳은 말이기도 했다.
‘그래야겠네.’
[수술이 불가한 상황입니다. 디아족사이드(Diazoxide: 인슐린 분비 억제제) 투여를 추천합니다.]
‘그 약 희귀 약품인데, 여기 있으려나?’
[태화 의료원입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약은 여기 다 있습니다.]
‘하긴.’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전화를 끊고 난 바로 직후보다는 한결 얼굴이 풀려 있었다.
디아족사이드라면 시간을 꽤 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췌장의 베타 세포에서 인슐린이 분비되는 것을 막는 약인데, 지금처럼 수술이 당장 불가능할 때 최적의 치료법이라고 되어 있었다.
“어떻게 됐어?”
환자를 향해 몸을 옮기고 있으려니, 오진승이 다가와 물었다.
얼굴엔 걱정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어느 정도는 엿들은 모양이었다.
“1년 차가 너무 희귀한 진단명을 말씀드린 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나 봐요. 혼났어요.”
“진용이가 원래 좀 그래. 나는 동긴데도 그런다니까? 그러니까 너무 마음 쓰지 마.”
“네, 근데……. 입원을 못 시키게 하니까 그게 좀 그렇네요.”
“여기서 보면 위험한 상황이야? 정신과에라도 잠깐 입원시킬까?”
수혁은 진승의 말에 순간 혹함을 느꼈다.
하지만 이 환자를 생각하니 고개가 저어졌다.
정신과 병동보다는 이곳이 오히려 더 안전할 것 같았다.
이곳의 간호사들은 내분비내과 응급 상황에 특화된 사람들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응급 상황에 관해 베테랑이었으니까.
“아니에요, 형. 어차피 제가 당직이라…… 여기서 보면 돼요.”
“그래……. 혹시 환자분 면담이나 보호자 상담 필요하면 나 불러.”
“네, 형. 감사합니다.”
“그래. 난 또 다른 콜 있어서. 이따 보자.”
“네.”
김진용과 방금 통화를 해서 그런가 멀어져 가는 오진승의 등에 후광이라도 비쳐 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이 삭막한 대학 병원에 저런 인격자라니.
성자가 따로 없었다.
[일단 치료나 좀 하시죠.]
하지만 계속 이렇게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었다.
해서 수혁은 바루다의 말을 쫓아 디아족사이드를 처방했다.
역시나 익숙지 않은 처방인지 간호사가 와서 확인을 받은 후에야 환자에게 투약할 수 있었다.
환자는 여전히 어리둥절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일단 주는 약을 마다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약이 꽤 효과가 있는지 투약한 지 무려 서너 시간이 지날 때까지 별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환자는 안정된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 혈당 검사한 결과도 90을 상회합니다.]
‘그럼……. 영상의학과로 가야겠네.’
[주말에 교수가 있을까요?]
‘있긴 할 거야. 태화 의료원이니까.’
큰 병원 좋은 게 뭐란 말인가.
다른 것도 있겠지만.
역시 인력이 풍부하다는 게 최고 좋은 점이었다.
다른 병원이라면 주말에 텅텅 비어 있겠지만.
여긴 달랐다.
“교수님한테…… 직접 의뢰를 드리겠다고?”
그렇게 찾아간 영상의학과 당직의, 즉 3년 차 레지던트는 수혁을 ‘이게 미쳤나’ 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당장 레지던트한테 의뢰할 때도 죽을 만큼 탈 각오를 해야 할 텐데 교수라니.
“네, 선생님. 그럴 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혹시 오늘 복부 당직 교수님 원내에 계시나요?”
“잠깐만……. 아, 아까 김진실 교수님……. 엘티(Liver Transplantation: 간이식) 환자 초음파 보러 오시긴 했네. 저기 오시네.”
레지던트는 죽는 게 너지 나겠냐 하는 심정으로 멀리서 다가오는 교수를 가리켰다.
질근 묶은 머리가 인상적인, 전체적으로 날카로워 보이는 교수였다.
성격도 그러한지 레지던트는 남몰래 묵념까지 했다.
하지만 수혁은 김진용의 말을 거역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해서 김진실 교수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십니까, 김진실 교수님. 내과 1년 차 이수혁이라고 합니다.”
“이수혁? 아, 그 액티노마이코시스. 무슨 일이지?”
그런데 김진실 교수의 반응이 퍽 놀라웠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주 친근했다.
자리까지 내어 줄 정도였다.
“아, 네. 감사합니다. 계속되는 저혈당 및 동반되는 신경 증세 있어 복부 CT 시행한 환자 판독 의뢰드려도 괜찮을지요.”
“음. 영상 띄워 봐. 뭐 의심하는데?”
“인슐리노마입니다.”
“오, 그거 되게 드문 건데. 어디……. 맞는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