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맞다니까요? (3)
“너……. 이런 매너가 어딨어?”
조금 전 친 드라이버 샷을 보기 좋게 해저드로 날려 버린 이현종 원장이 씩씩거렸다.
상당히 흥분한 상태인지 여전히 드라이버를 쥐고 있었다.
“어어. 이 형 이러다 사람 치겠어.”
“오늘 한번 쳐 보려고. 어떻게 되나.”
“에헤이. 겨우 공놀이 가지고 뭘.”
“겨우 공놀이? 이 자식아! 평생 처음으로 지금 72타가 눈앞에 보이는 상황이었는데!”
본래 원장은 완숙한 싱글 플레이어로 대개 78에서 79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아마추어 중에서는 상당한 솜씨를 지니고 있는 위인이었다.
그에 반해 신현태는 마의 80 벽에 부딪힌 채 수년을 허송세월 하고 있는, 최상위 플레이어였고.
해서 둘이 내기를 할 때는 늘 이현종이 페널티 샷을 서너 개쯤 먹고 했는데.
오늘은 무려 열 개를 먹지 않았던가.
헌데도 비등비등한 상황이었다.
그걸 깨 먹게 생겼으니 이현종 원장으로서는 열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72타고 나발이고 그건 스크린 가면 깨는 거니까…… 지금 우리 내과의 기강이 무너졌단 말입니다.”
하지만 이미 판을 엎기로 마음먹은 신현태에게는 아무 감흥이 없었다.
“이……. 이……. 억.”
이현종은 막 드라이버를 휘두르려다 말고 허리를 붙잡았다.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채를 뒤로 가져가려다 보니 삐끗한 탓이었다.
“골프장에서 돌아가시겠네, 이러다. 석좌 교수 괜히 줬다고 총장님이 우시겠어.”
“이……. 이 새끼가 정말.”
“아무튼, 지금 급하다니까요? 과의 기강이! 무너졌다고!”
“야, 야! 어디가!”
“기강 세우러요!”
“나, 나부터 일으켜 세워 줘! 야! 야! 이 개새끼야!”
“이전의 복수요, 형님!”
“저, 저…….”
신현태는 낄낄거리며 냅다 달렸다.
그리곤 원래는 채만 실어 두는 용도로 쓰는, 스페어 카트에 타고는 라운지로 향했다.
한참 뒤에서 이현종의 고함이 들려오기는 했지만.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카트가 제아무리 느리다 해도 사람 발걸음보다는 빨랐으니까.
‘아니, 근데……. 김진용 이 새끼는 환자도 안 보고…… 내일 보겠다고 했다는 거야? 이게 실화야?’
한참 낄낄거리며 웃던 신현태의 얼굴이 잔뜩 굳어졌다.
대학 병원에는 다양한 형태의 의사들이 근무하지만, 대개 환자가 오면 제대로 봐야 한다는 생각은 있기 마련이었다.
여기 신현태는 그 수준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고.
내과라면 모름지기 다들 그래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니 김진용의 행태에 열이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 이건 파투가 아니라.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물론 그렇다고 해서 원장과 했던 골프 약속을 파하는 것을 정당화할 정도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신현태는 겸사겸사라는 마음으로 차를 몰고 골프장을 빠져나왔다.
흔히 18홀을 돌고 난 후 즐기는 사우나도 생략한 상황이었다.
‘이 새끼 죽었다.’
그 때문에 발생한 찝찝함에 어쩐지 김진용을 탓하며 액셀을 세게 밟았다.
경기도 가평 인근에서 출발한 차는 어느덧 병원을 향해 들어서고 있었다.
“아니, 왜 교수님이 날 병원에서 보자고 하냐고. 그것도 내분비도 아니고 과장님이.”
그리고 그 시각 김진용은 차량 출발 직전, 신현태가 건 전화를 받고 병원에 와 있었다.
상당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저지른 일이 있었으니.
“너 뭐 아는 거 없어? 어? 이른 거 아냐?”
해서 김진용은 얼굴을 붉힌 채 수혁을 향해 소리쳤다.
수혁은 지팡이를 짚은 채,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야, 말 안 하냐? 치프 말이 시발 우습냐?”
“아, 아닙니다.”
“일렀냐고. 일렀냐고, 개념 없는 새끼야.”
“그…….”
수혁은 여전히 지팡이를 짚은 채 고개를 들었다.
성난 얼굴의 김진용과 그와 비슷한 얼굴의 황선우가 보였다.
혼자 죽기 싫은 김진용이 황선우까지 불러들였기에 다 같이 주말에 의국에 있게 된 참이었다.
당연히 이 상황이 달가울 리는 없었다.
“그 뭐.”
“그…….”
“이 새끼는 갑자기 벙어리가 됐나. 왜…….”
김진용은 머리라도 때릴 기세로 수혁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더 다가가지는 못했다.
그의 가운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다른 알람 소리로 해 둔 번호였다.
“아, 네. 과장님. 3년 차 김진용입니다. 지금 의국에 있습니다.”
해서 부리나케 받아, 또박또박한 말투로 인사부터 했다.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었고, 또 말투였다.
“내 방으로 와.”
“아……. 네. 교수님.”
차디찬 말투로 미루어 볼 때, 신 과장은 어지간히 화난 것으로 보였다.
김진용은 이게 다 수혁 때문이라고 결정한 후, 수혁을 노려보았다.
“너 이따가 보자.”
그냥 노려보기만 한 게 아니라 두고 보자는 말까지 남겼다.
그리곤 곧장 신 과장 방으로 달려갔다.
평소와는 달리 문이 열려 있었다.
똑똑.
그래도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기에 일단 벽이라도 두드렸다.
“들어와.”
“네, 교수님. 저 김…….”
김진용은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신현태 과장의 방에 김진실 교수도 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설마 김진실 교수 통해서 귀에 들어간 건가?’
영상의학과 복부 파트 김진실이라면 이미 임상 강사 시절부터 꽤 유명했던 위인이었다.
그 까다롭다는 이하언 교수의 수제자이자, 이하언 못지않게 무서운 사람으로.
더 무서운 점은 무턱대고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일일이 레퍼런스를 든다는 점이었다.
김진용도 인턴 때인가 1년 차일 때 무지막지하게 혼난 기억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앉아, 일단.”
신현태 과장은 손도 내밀지 않고 턱으로 구석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거부할 입장이 못 되는 김진용은 고개를 숙인 채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신 과장은 비로소 자신이 보고 있던 모니터를 돌려 그에게 보여 주었다.
“이거, 잘 봐. 오전에 온 환자고. 저혈당으로 내분비내과 당직한테 노티됐어. 이 환자에 대해 들은 적 있어?”
이름이 양재원이었던가.
수혁이 인슐리노마라는 얼토당토않은 진단명을 붙였던 바로 그 환자였다.
당연히 들어본 정도가 아니라 정식으로 노티까지 받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일단 잡아떼야 했기 때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 아뇨.”
“그래? 그건 이따가 확인해 보면 될 일이고.”
신 과장은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통화한 게 비단 김진용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핸드폰에는 수혁이 전송해 준, 최근 통화 목록 캡처 사진까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모니터를 가리켰다.
“여기 잘 보면 환자 저혈당 수치가 어때.”
“48입니다.”
“그래, 오전 평균이 이래. 응급이지? 근데 너한테 당직이 노티를 안 했다고?”
“어…….”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상한 상황이었다.
지금 당직은 2년 차 백당 없이 1년 차들이 보고 있었으니까.
사고를 대비해서 3년 차들과 2년 차들이 번갈아 콜당은 서고 있었고.
전화가 오면 늦어도 30분 안에 들어와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아무튼, 연락을 못 받았다 이거지? 더 봐 봐.”
이번에 모니터에 뜬 것은 CT였다.
복부 CT.
“제가 판독을 했는데요. 췌장 두부에 3cm가량의 주변과 잘 구분되는 덩이가 있습니다. 동맥기에 조영 증강되는 것과 다른 임상 소견을 종합해서 보면 인슐리노마에 합당합니다.”
이번엔 김진실 교수가 자신의 판독 소견을 주르륵 읊었다.
그 말을 듣고 있는 김진용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 새끼……. 어떻게 흙수저 새끼가 김진실 교수한테 다이렉트로 콘택트를 했지?’
이전 액티노마이코시스를 노티할 때 옆에 우연히 김진실 교수가 있었고.
워낙 뛰어난 노티였던지라 김진실 교수가 수혁의 이름을 기억했다, 하는 숨겨진 사실까지는 생각이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
그저 식은땀만 줄줄 흐를 따름이었다.
“인슐리노마라고 당직의한테도 전달하신 거죠?”
“애초에 그거 의심하고 CT 찍고 진단까지 다 해서 왔던데요, 뭐. 저는 그냥 확인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노티를 안 했다? 인슐리노마를 진단하고도?”
신현태 과장은 재차 김진용을 노려보았다.
이쯤 되면 눈치를 채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지만.
김진용은 현실을 외면하기로 했다.
‘어차피…… 좀 있으면 나간다…….’
전문의만 따고 나면 의국하고는 영영 이별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대학 병원에 남을 생각도 없었고.
“네.”
해서 될 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게 신현태 과장에게는 역린을 건드린 셈이 되었다.
‘환자를 안 보고 내깔겨 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거짓말까지 해? 과장 앞에서? 그것도 세 번이나?’
무슨 베드로도 아니고.
뭔 놈의 부인을 세 번이나 한단 말인가.
완전히 열이 뻗친 신현태는 김진용을 향해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야. 오늘 당직의 불러.”
“여, 여기로요?”
“그래. 이렇게 노티 안 하는 새끼가 대체 누군지 좀 보자.”
“그…….”
“뭐 하고 있어? 빨리 안 불러? 내가 부를까?”
“아, 아닙니다. 제가 전화하겠습니다.”
김진용은 마지 못해 신현태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최근 기록에 신현태가 이수혁에게 발신한 기록이 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엿됐네…….’
이수혁이 걸었으면야 열은 뻗쳐도 조금은 여지가 있었으련만.
이건 가망이 없어 보였다.
신현태 교수가 김진실 교수에게 듣고 이수혁에게 전화를 걸었단 뜻이었으니까.
‘아니…… 무슨 흙수저 놈한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냐고…….’
될 수 있으면 지금쯤 확 도망가고 싶었지만.
그건 안타깝게도 불가능한 옵션이었다.
“야, 안 걸어?”
“거, 걸겠습니다.”
그렇게 진용이 죽지 못해 건 전화는 곧 수혁의 핸드폰을 울렸다.
“넌 시발 뭔 짓을 했길래, 우리가 다 불려 와. 내가 너 아주 어? 원장님 숨겨 둔 아들 행세했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어쭈? 전화를 받아? 야, 누구 전화……. 아, 과장님. 그래 일단 받아.”
황선우에게 갈굼을 당하고 있던 터라 수혁은 아주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그리곤 신현태 과장 방으로 향했다.
과장은 이수혁을 보자마자 헤벌쭉 웃을 뻔했으나 용케 참긴 참았다.
“네가 당직이야? 너 이 환자 진단하고 노티 안 했다는 게 사실이야?”
수혁 또한 웃음을 참았다.
벌써 다 알고 온 주제에 이런 연기라니.
하지만 교수의 연기라면 장단을 맞춰 주는 것이 예의였다.
“아, 아닙니다. 교수님. 노티했습니다.”
“증거 있어?”
“여기…….”
수혁은 즉시 김진용 이름이 새겨진 최근 통화 기록을 건네주었다.
그냥 신호만 간 게 아니라 2분도 넘게 통화를 한 기록이 떡하니 있었다.
“걸었네?”
“그게, 그…….”
김진용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신현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 같은 놈은 치프 자격 없어. 약국장 다른 애한테 인계하고, 내일부터 당장 환자 받아서 직접 주치의 해.”
“네? 그, 그건 너무…….”
“억울해? 그럼 나갈래? 노티 받고도 환자 보러 오지도 않고, 입원장도 안 내고. 징계위원회 열까?”
“아, 아닙니다…….”
“그럼 주치의 해. 서효석 교수한테는 내가 직접 얘기할 거야. 나가.”
“아……. 네. 교수님.”
김진용은 어깨가 축 처진 채 방을 나섰다.
수혁도 그를 따라 나가려는데, 신현태가 불렀다.
“아, 수혁이. 너는 잠깐 남아. 할 얘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