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37화 (37/1,303)

37화 이 1년 차는 격이 다릅니다 (1)

[뭘까요?]

갑작스러운 과장의 부름.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뭐지?’

[뭐가 됐든 돌아보긴 해야 합니다. 상대는 과장입니다. 김진용이 아니라.]

3년 차 정도는.

그것도 김진용처럼 애초에 교수들에게 예쁨을 받는 녀석이 아닌 경우에는.

수혁이 얼마든지 엿을 먹일 수 있었다.

이것만 해도 황당한 일이긴 한데.

워낙에 실력이 좋으니까 그게 됐다.

하지만 과장은 어떨까.

무조건 납작 엎드려야만 했다.

“네, 교수님.”

해서 수혁은 지팡이를 부지런히 놀려 뒤로 돌아섰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옆에 있던 김진실 교수가 팔을 잡아 준 덕에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아, 감사합니다.”

“아니야. 앉아요.”

“네, 교수님.”

신현태는 수혁이 완전히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손에 뭔가를 쥐고 있군요.]

바루다는 신 과장 손에 들린 서류를 가리켰다.

뭔가 도톰해 보이는 것이 한두 장이 아닌 듯 보였다.

그는 그 서류를 수혁에게 건네주면서 입을 열었다.

“알고는 있지? 태화 의료원에서 각 과에서 우수 전공의 하나씩 뽑아서 한 달 연수 보내 주는 거.”

“아……. 네. 3년 차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맞아. 원래는 3년 차나 4년 차들이 가게 되어 있지.”

1, 2년 차는 굳이 말하자면 그 과의 노예들이었다.

환자 보는 일부터 하잘것없는 잡일까지 도맡아서 해야 하는.

때문에 1, 2년 차가 자리 비우는 것을 좋아하는 위 연차들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 잡일을 자신들이 대신해야 하니 얼마나 짜증 나겠는가.

때문에 예전에는 1년 차 휴가는 3일씩 두 번 줬는데 그게 금, 토, 일일 정도였다.

[왜 이걸 수혁에게 건네줬을까요? 수혁은 쓰……. 아니, 1년 차인데.]

‘나도 모르지. 뭐야 이게.’

수혁은 잠시 받아든 서류를 떠들어 보았다.

뭔가 기입해야 할 자료들이 아주 많이 있었다.

누가 미국 병원 가는 거 아니랄까 봐 영어 성적도 적어 넣어야 했다.

토익 아니면 토플.

한 가지 특이한 게 있다면 바로 논문 항목이었다.

‘아, 논문도 있어야 갈 수 있구나.’

하고 있으려니, 신현태가 딱 그 항목을 가리켰다.

“넌 2년 차면 가도 될 거 같아서 말이야.”

신현태는 이현종의 얼굴을 떠올렸다.

- 야, 우리가 걔 자랑할 곳이 국내뿐이냐? 해외로 나가자! 해외로!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좀 곤란했다.

일단 상대 병원에 예의가 아니었다.

수혁이 우수하다는 건 물론 이제 누구나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뭔가 더 객관적인 지표였으니까.

연차라든가.

논문이라든가.

아니면 학회 발표 실적이라든가 하는.

“2년 차에……. 연수를요?”

“그래.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알지? 과에 딱 하나 가는 거야. 네가 가면 다른 애는 못가.”

신현태는 그 말을 하면서 내년에 3년 차가 되는, 지금의 2년 차들을 떠올렸다.

미안한 말이었지만 끼인 연차라고 보면 되었다.

3년 차에는 김인수가 있고, 1년 차에는 이수혁이 있는데 유독 2년 차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 황선우가 있지.’

2년 차가 되었는데 어찌 된 게 1년 차보다도 못한 녀석.

그런 연차에게 귀한 연수권을 주느니 그냥 지금 똘똘한 1년 차를 주자는 것이 이현종의 의견이었다.

그렇게 되면 같은 사람이 두 번 가게 될 수도 있다는 신현태의 말에 이현종을 껄껄 웃어 버렸다.

- 뭐가 문제야? 원래 승자 독식이야. 몰라?

확실히 젊은 나이에 NEJM에 논문 싣고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아서 그런가, 사람이 싸가지가 없었다.

하지만 승승장구해 온 건 신현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 사람도 어느 정도는 싸가지가 없었다.

“아…….”

“뭐 어차피 나나 원장님이나 너 아니면 보낼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다른 애들이 알게 되면 질투할 거 아냐.”

“그럴 거 같긴 합니다.”

사실 요즘 뭔가 심상찮은 기류가 있긴 있었다.

워낙 이현종과 신현태가 티를 팍팍 내면서 수혁을 싸고돌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조태진까지 끼어들어서 수혁이는 평생 우리 과만 돌았으면 좋겠단 소리를 해 대고 있으니 다른 애들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들 또한 고등학교 때까지 1등 밥 먹듯이 하다가 국내 제일이라는 태화대 의대에 온 인재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비밀로 하자고.”

“네, 교수님.”

“이게 얼마나 좋은 프로그램인지는 알고 있지?”

“아……. 그냥 있다고만 들었지, 자세히는 모릅니다.”

“거참. 이렇다니까. 우리 병원 홍보팀은,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신현태 과장은 너스레를 떨면서 아까 수혁에게 건네주었던 서류 맨 뒤를 펴 주었다.

뭔가 특전 같은 것들이 잔뜩 있었는데, 신 과장은 딱히 그곳을 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하도 자랑스러운 나머지 다 외운 모양이었다.

“태화 생명에서 직접 후원하는 프로그램이라, 진짜 풍족해.”

“아…….”

“일단 왕복 비행기. 이코노미석이긴 한데 전액 지원돼.”

“와…… 미국……!”

“뭐야, 너 미국 안 가 봤냐?”

미국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 본 기억이 없었다.

신현태 과장은 수혁의 어두워진 얼굴을 보고 나서야, 이 녀석이 고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맞아.’

그래서 다쳤을 때 하마터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는 사실까지도.

‘좀 미안하네.’

그때만 해도 골칫덩이 그 자체였던 것이 수혁이었거늘.

이젠 과에서 심혈을 기울여 키워 줘야 할 존재가 되어 있었다.

사람 일이란 게 참 알 수 없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뭐 안 가 볼 수도 있지. 아무튼, 그래. 비행기 삯 다 나오고. 가서 체류하는 동안 호텔비도 다 나와.”

“와…….”

“생활비도 줘. 하루 10만 원. 후하지?”

“네, 네. 그럼 거의…….”

“월급이랑 비슷하지. 월급 외로 나오는 거라, 이달은 돈깨나 남을 거야.”

“진, 진짜 좋네요.”

수혁은 왜 이걸 비밀로 해야 한다는 건지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좋을 줄이야.

다만 영어가 좀 걱정이긴 했지만.

[그건 걱정 마십시오, 수혁. 제가 듣고 해석하고 말까지 책임지겠습니다.]

바루다가 호언장담을 해 대었다.

의학 외에는 좀 신뢰가 가지 않는 녀석이긴 한데.

그래도 영어는 어쩐지 잘할 거 같기는 했다.

파파고니 뭐니 하는 인공지능들 실력이 아주 급성장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

신현태 과장은 환하게 웃고 있는 수혁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까와는 달리 약간은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네, 교수님.”

“논문이 있어야 해. 너 실력이면 뭐 어려울 거 같지 않은데……. 그래도 이게 가기 전에 퍼블리싱까지 되어야 한단 말이지.”

“아…….”

논문이 어딘가에 게재가 되는 과정은 지극히 복잡했다.

일단 지원하면 그쪽에서 받을지 말지를 결정했다.

문제는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가 한 번에 오케이 하는 경우가 없다는 점이었다.

꼭 한 번쯤은 아주 사소한 거라도 수정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겨우겨우 다시 논문을 집어넣으면 이제 하염없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만약 2년 뒤에 갈 거라면야 시간 여유가 차고 넘쳤지만.

당장 내년이라면 상당히 급했다.

“내가 논문거리를 주면 제일 좋은데. 감염내과는…… 요새 거의 실험 논문이라서, 좀 오래 걸려. 결과가 꽝 나오는 경우도 있고.”

의사들이 쓰는 논문은 크게 임상 논문과 실험 논문으로 나눌 수 있었다.

임상 논문이란 이미 실험 논문에서 입증된 사실이나 이론 또는 가설을 가지고 임상에서 실험을 해 보거나, 이미 검증된 치료법으로 치료한 환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쓰는 경우가 많았다.

딱 들으면 느낌이 올 텐데, 확실히 난도가 실험 논문에 비해서는 낮았다.

“그래서……. 원장님이나 조태진한테도 물어봤는데. 요새 딱히 뭐 아이디어가 없더라고.”

“아……. 논문 아이디어가 필요하군요.”

“그래. 근데 마침 여기 김진실 교수님이 논문 기계거든. 진짜 거의 기계야.”

신현태 과장은 여태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던 김진실 교수를 바라보았다.

김진실 교수는 굳이 겸양을 떨진 않았다.

“많이 쓰긴 했는데, 기계는 아닙니다.”

“하하. 마침 내과 자료 필요한 논문이 있다고 했지?”

“네. 아직은 연구 계획 쓰고 있는 수준이기는 한데……. 능력 있는 주치의가 도와주면 빨리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도 이제 교신저자로 쓰면 되니까, 1 저자는 이수혁 선생 주면 되고요.”

“그래, 아주 잘됐지. 아무튼, 그러니까 수혁이 너 1년 차라 바쁘긴 하겠지만. 내년에 연수 가면 진짜 좋을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해 봐.”

과장이 이렇게까지 안배를 해 둔 상황이었다.

솔직히 그냥 아이디어 하나 띡 던져 줘도 감지덕지해야 할 텐데.

아예 교신저자까지 붙여 줄 줄이야.

수혁으로선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상황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잘해 보라고. 먼저 가 봐. 나는 김 교수랑 얘기 좀 할 테니까.”

“네, 교수님.”

“아, 맞다. 수혁아.”

그렇게 방을 빠져나오려는 수혁을 과장이 다시 불렀다.

“네, 교수님.”

수혁은 잠시 대체 이 방을 언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 뒤를 돌아보았다.

“혹시 김진용이 뭐라고 하면 딱 말해 줘. 넌 나랑 원장님이 특별히 키우고 있는 사람이라고. 아니다, 아예 지금 내가 사내 메일 보낼게. 전공의 전체 다 보라고.”

“네? 그, 그렇게까지는…….”

“야, 주면 그냥 감사히 받아. 애들 질투가 얼마나 심한데. 너 그러다 뒤로 당한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긴 했다.

지금도 벌써 동기들 사이에서도 좀 말이 나오고 있었으니까.

‘개새끼들. 내 덕에 100일 당직도 해제됐는데.’

당연히 수혁으로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또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소인배들이 뒤에서 쿵덕거리는 걸 수혁이 뭐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걸 적어도 눈앞에서만큼은 못하게 해 준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이제 진짜 나가 봐. 당직인데, 쉴 수 있을 때 쉬어야지.”

“네, 교수님.”

수혁은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신현태 과장은 방금 말했던 대로 김진실 교수와 잠시 얘기를 나누곤 메일을 보냈다.

<의국원들에게 알립니다. 내과 1년 차 이수혁은 지금까지 보여 준 진단 능력 및 성실함을 인정받은바 이현종 원장님과 저 신현태 과장 본인 및 조태진 교수 등이 차세대 태화 의료원 내과를 이끌 인재로 선발, 육성 중에 있습니다. 이에 전 의국원들은 이수혁이 내과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쓸데없는 감정 소모가 없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요약하면 ‘건들면 뒈진다.’라는 뜻이었다.

원장의 아들이라는 헛소문이 사라지려는 순간 더 강한 뒷배가 드러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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