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아니 무슨 이런 문제를 내? (1)
“아……. 이게 그러니까 보리코나졸이 원인이다?”
류진수 교수는 외과 레지던트 그리고 수혁의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 비슷한 증상조차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이식외과 교수라는 게 다른 데 한눈팔아도 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 분야 외에는 전공 바보가 되는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었다.
“네, 교수님. 케이스 리포트를 보시면 이 환자도 기저에 대사 불량이 있었는데, 모르고 지내던 중 보리코나졸을 쓰면서 발견되었습니다.”
“흐음…….”
류진수 교수는 빠르게 수혁이 내민 케이스 리포트를 훑어보았다.
확실히 수혁이 말한 대로 지금 박태수 환자의 섬망에는 보리코나졸이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듯했다.
‘정신과에서도 답변에 전형적인 섬망은 아니라고 했었지.’
협진 노트를 아주 길게 써서 보내 주긴 했는데.
자세히 읽어 보면 아직은 잘 모르겠으니 좀 더 지켜보겠다는 내용이었다.
별 영양가가 없다 이 말인데, 의외로 웬 내과 1년 차가 답을 가져온 셈이었다.
‘맞는 거 같은데?’
평소라면 내과 1년 차 따위의 말을 듣고 전화까지 한 3년 차를 혼냈겠지만.
지금은 너무, 솔직히 너무 그럴싸했다.
게다가 류진수는 다른 교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레지던트들과 가까운 편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이제 겨우 전임 단 지 2년밖에 안 된 햇병아리 교수이기에 그러했다.
덕분에 소문에도 밝았는데, 당연히 수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원장님 아들…….’
어쩌면 이것도 혼자 한 게 아니라 이현종이 알려 준 걸 수도 있었다.
무슨 순환기가 이런걸 아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현종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천재는 괜히 천재가 아니었다.
이현종은 그야말로 천재여서, 비단 의학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야에도 모르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바꿔야겠네. 고마워.”
류진수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부디 좋은 인상을 남겼고, 그 좋은 인상이 이현종에게까지 전달되기를 바라면서였다.
“그런데 그럼 무슨 약을 써야 하지? 아직 항진균제 쓰기는 해야 할 텐데…….”
그리곤 외과 레지던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외과 레지던트는 멍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글쎄요?”
“감염내과에 한번 문의해 보지. 최대한 빨리.”
“아, 네.”
수혁 또한 둘의 대화를 들으면서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지식은 바루다에게도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약을 바꾸는 것보다는 감량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500mg 하루 세 번 들어가니까, 한 절반으로?’
[네. 하지만 케이스 리포트에서처럼 루나졸과 같은 아예 다른 약으로 바꾸는 것도 방법으로 보입니다.]
‘정확하지 않군.’
[네. 이건 신현태 과장이나 다른 감염내과 회신을 보고 새로 데이터화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 그게 낫겠어.’
뭐 어디 개인 병원에서 일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국내 제일이라고 하는 태화 의료원에 있는 몸이었다.
답을 당장 모른다면 그 답을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한시름 놨네. 아……. 때마다 섬망이 오니까 버틸 수가 있어야지.”
수혁이 잠시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사이 류진수 교수도 감염내과에 협진을 낸 모양이었다.
수혁을 향해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표하는 것을 보면.
“아닙니다, 교수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그래. 혹시 외과에 협진 내거나 할 일 있으면 연락해. 내가 바로 봐 줄게.”
“감사합니다. 교수님.”
수혁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대학 병원이 아주 부드럽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실은 그 안에 수많은 알력 다툼이 있기 마련이었다.
특히 협진을 놓고서는 그 정도가 아주 심했다.
더구나 외과처럼 바쁜 과들은 어지간하면 협진이 뒤로 한없이 밀리기 쉬운 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교수에게 약속을 받아 내다니.
시간을 낸 보람이 차고 넘칠 지경이었다.
‘잘됐네.’
해서 수혁은 중환자실을 빠져나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바루다는 아직 병원 돌아가는 생리까지는 다 파악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교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들인지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그나저나 내일 오프군요.]
그냥 오프가 아니라 주말 오프였다.
심지어 약속까지 잡혀 있는 그런 오프였다.
‘하윤이 보겠네.’
[성을 자꾸 빼고 부르는군요?]
‘내 마음이지.’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 앞에서는 꼭 성씨 붙이길 바랍니다.]
‘내가 병신이냐? 당연하지.’
[네, 뭐…….]
‘말은 왜 줄여 기분 나쁘게.’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엘리베이터 앞에 가 섰다.
엘리베이터는 1층에 제법 오래 서 있다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3층, 즉 수혁이 서 있는 곳 바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어?”
“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엘리베이터 안에는 아까 외래 보러 내려간 것으로 보이는 신현태 과장이 타 있었다.
아니, 이제 그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외래 끝나고 협진 목록 들여다보다 곧장 이리로 온 모양이었다.
“어, 그래. 또 한 건 했던데?”
신현태는 담백하게 인사만 받고 중환자실로 향하는 대신 수혁을 붙잡았다.
수혁은 내심 올라가 버린 엘리베이터가 아쉽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교수가 잡는데 보내야지.
“네, 교수님.”
“아니, 어떻게 알았어? 보리코나졸이 섬망을 일으키는 건 진짜 희귀한데.”
“우연히 이전에 읽은 케이스 리포트가 이 내용이었습니다.”
“너 진짜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보기 좋아.”
“감사합니다.”
“그래, 그래. 순환기 가서도 잘하고. 그때 회식이나 같이 하자고.”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신현태는 감사하다는 수혁의 말에 손을 휘적휘적 저어 대고는 중환자실을 향해 걸어갔다.
‘이게 또 이렇게 과장님 귀에 들어갔네.’
[운이 좋군요, 수혁.]
‘너무 기대감 심어 드리는 거 같아서 부담스러운데. 순환기……. 이현종 원장님은 진짜 만만치 않을 텐데.’
[괜찮습니다. 주말에 우하윤과의 약속, 짧게 정리하고 공부하면 됩니다.]
‘그…….’
수혁은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저번 만남은, 그러니까 첫 만남은 가히 최악이라고 해도 좋았으니까.
그걸 감안하면 또다시 만나게 된 것 자체가 기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뭐가 잘되길 바라는 건 너무 욕심이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냥 수혁이 생각하기에도 그랬다.
‘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혁은 또다시 미용실에 가서 머리칼을 깎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은 채 나온 참이었다.
그에 반해 우하윤은 새카만 뿔테 안경에 후드티 차림이었다.
한 가지 슬픈 점은 그럼에도 우하윤 쪽이 훨씬 꾸민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하윤은 늘 그렇듯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이전과는 달리 병원 바로 앞이 아니라, 대략 한 정거장 떨어져 있는 식당 앞에서였다.
“어, 어.”
수혁은 눈에 띄게 어색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당연히 바루다의 시정 명령이 쏟아졌지만, 그걸 들을 만한 여유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 전에는 죄송했어요. 좀 놀라서.”
“아냐. 진짜 내가 잘못했어…… 그때는. 그…… 아니다. 미안해.”
수혁은 바루다 핑계를 대려다, 그 얘기까지 했다가는 정말 미친 사람 취급이나 받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괜찮아요.”
하윤은 정말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치고는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가실까요? 여기 아빠랑 자주 오던 곳인데, 되게 괜찮아요.”
우하윤은 잠시 수혁의 표정을 바라보다가 이내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어, 오랜만이네?”
셰프가 그런 하윤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 왔다.
‘정말 자주 왔던 모양이네.’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식당 안으로 따라 들어섰다.
예약을 해 놓았는지, 셰프가 안내해 준 자리는 룸이었다.
어느 정도는 개방감이 있기는 했지만.
어찌 되었건 3면이 가려져 있는 자리였다.
‘혹시?’
[그런 생각은 제발 하지 마세요.]
‘언제는 손 잡으라며.’
[이제 조인성이 아닌 이수혁으로 베이스라인을 잡았습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
‘이런 망할 놈.’
수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메뉴판을 집어 들려는데, 메뉴판이 없었다.
‘응?’
해서 당황한 얼굴로 하윤을 바라보았는데, 하윤은 그런 수혁을 마주 보며 빙그레 웃어 보일 따름이었다.
“여긴 셰프님이 알아서 음식을 내어주세요. 아빠가 돈까지 다 내 놨다고 하니까, 부담 없이 드시면 되세요.”
“어? 아니……. 그렇게까지는…… 내가 선밴데.”
“아빠가 무조건 사라고 했어요. 괜찮아요.”
“그…….”
‘그린라이트인가?’ 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바루다가 초를 쳤다.
[그럴 리가 있나요.]
‘아오…….’
당연히 바루다에게 화가 나긴 했지만.
지금은 바루다에게 신경 쓸 시간이 아니었다.
우하윤이 앞에 있었으니까.
게다가 평소엔 보기 힘든 고급스러운 음식까지도.
“이건…….”
“모차렐라 치즈 튀김이에요. 전채요리로 느끼할 거 같은데, 의외로 되게 맛있어요.”
“오. 진짜 그렇네?”
비단 수혁만의 감상은 아니었다.
바루다는 아예 미쳐 날뛰고 있었다.
[이, 이건……. 이건 수준이 다릅니다!]
수혁이야 모르고 있었지만 한 끼 식사에 10만 원이 넘는 코스니 당연한 일이었다.
뒤로 이어지는 음식들도 훌륭했다.
아니, 훌륭하다는 말조차 부족할 지경이었다.
살짝 데친 문어를 숯불로 구운 부드럽기 짝이 없는 문어구이.
가리비를 이용한 파스타.
안심을 적당히 구운 스테이크까지.
너무 맛있기는 한데 먹다 보니, 우하윤의 태도가 좀 이상했다.
‘불안해하는 거 같지 않아?’
[이상하군요. 수혁이 그래도 신체적인 위해를 가할 사람은 아닌데요.]
‘물어볼까?’
[음…….]
‘안 돼?’
[그건 괜찮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밥 먹으면서 일상적인 대화는 나눈 참이었다.
아까보다는 어느 정도 친밀감이 쌓인 후라는 얘기였다.
해서 수혁은 용기를 내 물었다.
“오늘 뭐 불안한 일 있어요?”
“아. 티 많이 나나요? 죄송해요.”
“아뇨, 아뇨. 무슨 일인데요?”
“그…… 그게…….”
우하윤은 약간 부끄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다음 주 PBL 과제가 있는데. 이게 진짜 너무 어려워서요…….”
“아……. PBL.”
PBL.
Problem Based Learning.
이른바 문제 중심 학습인데, 최근 의대 교수들이 아주 좋아라 하는 학습 방식이라 할 수 있었다.
대개 문제 난이도가 다른 것에 비해 현저히 높아서 수혁도 애깨나 먹었더랬다.
“좀 도와줄까요? 그래도 내과 레지던트니까 도움이 되긴 할 텐데.”
“네? 아뇨, 아뇨. 바쁘시잖아요.”
“어차피 오늘 오픈데요, 뭐.”
일찍 들어가 봐야 쉴 수도 없었다.
바루다가 지랄할 테니까.
어차피 공부할 거라면 우하윤이나 돕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하윤은 수혁의 말에 잠시 망설이더니 주섬주섬 메고 온 가방에 든 패드 하나를 꺼냈다.
“이게……. 원장님이 내셨다고 하는데. 진짜 어려워요…….”
“원장님? 아, 그럼 어렵긴 하겠다. 어디 봐 봐요.”
“이거예요.”
우하윤이 띄운 PBL 프로그램 맨 앞 장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1일 전 시작된 호흡곤란으로 내원한 78세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