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더 어렵게 내냐? (2)
“가시죠! 원장님!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정확히 2시간 후에 나타난 수혁은 전에 없이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이현종 원장을 향해 외쳤다.
그것을 본 이현종 원장은 조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 맞다……. 이 새끼 좀 이상하지.’
한때 현종은 노상 수혁을 피해 도망 다니곤 하지 않았던가.
갑자기 뭔가로 푹 쑤실까 봐 겁나서.
그러다가 골프장에서 받은 노티 하나로 뻑 넘어가서 여기까지 오기는 왔는데.
오늘 또 이러한 범상치 않은 모습을 보고 있자니 다시 좀 불안해졌다.
이현종이 괜히 이런 불안감을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레지던트 시절 자신의 담당 교수가 칼에 찔리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펠로우이자 대학원 박사 과정에 있던 선배에 의해.
‘내가 그 교수님처럼 악독하게 굴지는 않지. ……않겠지?’
물론 그 교수란 양반은 진짜 악마의 화신인가 싶을 정도로 나쁜 놈이긴 했다.
현종은 그에 비하면야 천사였고.
절대적으로 보면 악독한 편에 속했지만.
아무튼, 현종이 지금 제일 신경 쓰고 있는 건 불룩 튀어나온 수혁의 가운 주머니였다.
“그, 그래. 그거 안에 든 건 뭐니? 메스? 가위?”
“네? 아뇨. 아닙니다.”
“어어. 그렇게 꺼내…… 아, 패드구나?”
“네. 이게 작아서 가운 주머니에 쏙 들어갑니다. 전에 강의 자료 만들 때 이거 있으니까 좋더라고요.”
“아하. 그래. 다행이다.”
“네?”
‘다행은 뭐가 다행이란 말입니까?’라는 얼굴이 된 수혁을 현종은 애써 외면했다.
“아니, 아냐. 가자고. 애들 기다린다.”
“네!”
의대라고 해 봐야 병원 건물에서 걸어서 10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었다.
태화대학교 본교에서 의과대학만 따로 뚝 떨어져서 병원 옆으로 옮겨 온 까닭이었다.
예과 때를 제외하고는 교양 과목이고 나발이고 고등학교처럼 딱 정해진 커리큘럼을 들어야 하는 의대였기에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수혁은 병원에 들어온 이후, 그러니까 인턴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걷지 못했던 길을 걸으며 입을 열었다.
뭔가 감상에 젖은 듯한 얼굴이었다.
“병원 오고는 처음이냐?”
이현종은 말없이 가는 게 심심하기도 하고, 아까의 불안이 좀 민망하기도 하고 해서 곧장 말을 받아 주었다.
“네. 거의 병원에서 나올 일이 없었습니다.”
“하긴. 우리 병원 인턴이 좀 힘들긴 해. 그래도 인마, 나 때는…….”
그리고 곧 수혁에게 ‘아, 내가 왜 말을 걸었을까’ 하는 후회가 들도록 해 주었다.
그야말로 매운맛 과거 회상이었는데, 어찌나 자세한지 수혁이 막 본과 4학년 강의실에 들어설 때까지도 여전히 인턴 3월에 머물러 있었다.
“나머지는 또 나중에 말해 줄게.”
[제발 안 된다고 하시죠. 제발.]
심지어 바루다까지도 진절머리를 칠 지경이었다.
수혁 또한 바루다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지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수혁에게 이현종 원장은 지금 진짜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으니까.
“네, 교수님. 정말 기대가 됩니다.”
“그래. 다들 좋아하더라고, 내 얘기.”
‘원장이 아니었어도 그런 반응을 보였을까?’ 하는 의문이 들게 만드는 말이었다.
하지만 수혁은 그 말을 꺼내는 대신 일단 강의실 옆쪽에 위치한 컴퓨터에 앉았다.
종종 교수님 따라온 레지던트가 앉곤 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당연히 수업하러 온 건 아니고.
PPT 넘기는 역할을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
의사한테 그런 잡일이라니.
세상에 무슨 그런 인력 낭비가 있나 싶겠지만.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이 바로 대학 병원이었다.
“어, 선배 오셨네요?”
수혁이 막 패드를 모니터에 연동하는 찰나, 맨 앞에 앉아 있던 우하윤이 말을 걸어왔다.
누가 교수 딸 아니랄까 봐 아주 학구열이 넘치는 모양이었다.
“어, 응.”
“근데 이현종 교수님은 늘 혼자 오시는데. 오늘 강의가 뭐예요?”
“아…….”
수혁은 뭐라고 말해야 하나 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이현종이 뒤늦게 툭 끼어들었다.
“어허! 커닝은 안 돼!”
역시나 앞뒤 다 잘라먹은 채였다.
영문을 알 길이 없는 하윤은 흠칫 놀라며 뒤로 빠졌다.
하지만 겁을 먹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현종 원장과는 어릴 때부터 자주 본 사이였기에, 그가 어떤 성격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닝이요?”
“그래. 안 돼.”
여전히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상태에서 제대로 된 대화는 어렵다는 것,
이현종은 그런 사람이었다.
위이잉.
그사이에 수혁의 패드 화면이 모니터로 연동이 되었고, 모니터의 화면은 또다시 빔프로젝터로 연동이 되었다.
그렇게 맨 앞에 뜬 PPT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3일 전 시작된 호흡곤란으로 내원한 63세 남자 환자>.
그 제목을 본 이현종 교수는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그렇지. 1년 차가……. 벌써 제대로 케이스를 만들기는 어렵지.’
아무리 보아도 주말에 수혁이 풀었던 PBL 문제와 너무 비슷한 제목 아닌가.
호흡곤란의 기간과 나이 정도만 바뀐 참이었다.
해서 약간의 기대감을 덜어 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말에 낸 PBL에 대한 건, 다음 교시에서 얘기하기로 하고. 3교시엔 이 케이스에 대해서 PBL을 해 봅시다. 조별로 앉은 건가? 지금?”
“아닙니다, 교수님.”
원장의 말에 과 대표가 번쩍 손을 들고 일어나 대꾸했다.
그 말에 이현종은 손을 휘휘 저었다.
무언가를 섞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 조별로 앉아. 바로.”
“네, 교수님.”
본4 정도 되면 그냥 학생은 아니었다.
병원 실습을 통해 병원 교수님들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현종은 그냥 교수가 아니라 원장이지 않은가.
일사불란하다는 말이 딱 어울릴 정도로 급하게 자리바꿈이 이루어졌다.
“좋아. 그럼 바로 시작하지. 주어진 케이스 쭉 읽어 보고. 어떤 검사를 해야 할지 한 번씩 토의를 해 봐. 아. 오늘 이 PBL은 이수혁 선생이 할 거야. 알지? 선배잖아.”
“네!”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에는 당연하게도 하윤도 끼어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하자. 수혁아, 시작해.”
“네, 교수님.”
원장의 말에 수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팡이를 짚은 채였다.
그 모습에 소문에 빠른 몇몇이 웅성거렸다.
“사고당했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헐……. 다리가……. 저래도 레지던트 할 수 있나 보네?”
“할 수 있으니까 1년 차로 있지.”
물론 그리 큰 소리는 아니었기에 수혁의 강의는 별반 방해를 받진 않았다.
“일단 현 병력입니다.”
수혁은 피피티를 다음 화면으로 넘겼다.
그러자 아주 빼곡한 지면이 나타났다.
“환자는 20년 전 당뇨 진단 후 경구 혈당 강하제 복용 중입니다. 내원 2주 전 기침, 가래, 콧물이 있다가 일주일 후 별다른 약 쓰지 않고 호전되었습니다. 3일 전부터는 가만히 있어도 숨이 차기 시작했고, 1일 전부터는 누우면 호흡곤란이 발생하여 본원 응급실로 내원한 상황입니다.”
“음?”
이전 PBL 문제와 비슷하겠거니 하고 있던 이현종 원장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 병력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당뇨에……. 감염이 있었고 호흡곤란이라?’
게다가 제법 관심을 쓰는 단서까지 흘리고 있었다.
자연히 이현종 원장은 완전히 학생들을 향하고 있던 몸을 틀어 화면을 바라보게 되었다.
“당뇨에 대해서는 빌다글립틴(Vildagliptin)과 글리클라자이드(Gliclazide)를 복용 중이었습니다. 아직 약에 대해서는 잘 모르실 테니, 간단히 말씀드리면 둘 다 인슐린 분비 촉진제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죠. 아. 빌다글립틴은 일반적인 당뇨에서보다는 신장 기능이 저하된 환자에서 주로 쓰입니다.”
설명은 간결하고도 정확했다.
덕분에 학생들은 물론이고 현종까지 케이스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사용되는 약만 봐도 리얼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원 당시 호소한 증상은 호흡곤란 그리고 누우면 더 심해지는 호흡곤란 즉 가좌 호흡이 있었고, 흉통이나 두근거림 등은 전혀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이 대목에서 학생들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지만.
이현종 교수는 수혁이 무슨 문제를 내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함정이야.’
흉통과 두근거림이 전혀 없다.
이 말을 듣고 나면 딱 배제하고 싶은 질환들이 몇 개 있지 않은가.
심근경색이라거나 협심증이라거나 부정맥과 같은.
심장과 관련된 질환 중 가장 심각한 것들.
아무튼, 화면은 넘어갔고. 수혁의 말은 계속되었다.
“신체 검진 결과 환자의 양측 폐의 하엽에서 부글거리는 소리가 났고, 양측 정강이에 부종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들었으면, 의사라면 적어도 한 가지 질환명은 떠올라야 정상이었다.
당연히 여기 앉아 있는 학생들은 무려 태화 의대의 본과 4학년들이었기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한 가지 진단명을 떠올리면서였다.
‘폐부종인가?’
수혁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예상하면서 화면을 넘겼다.
화면은 학생들의 기대와는 달리 텅 비어 있었다.
“자, 이렇게 환자가 왔다면. 검사는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5분 안에 조별로 적어서 제출해 주십시오.”
“네!”
공부 열심히 하라면 둘째가기 서러운 이들이니만큼 즉각 토의에 들어갔다.
조마다 그 토의를 주도하는 이들이 있었는데 우하윤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일단 폐. 폐에 물이 찼을 거야. 흉부 X-ray를 찍자.”
“혈액 검사도 해 봐야지. BNP 어때? 폐부종이면 크게 늘었을 텐데.”
“아, 그렇네. 그리고 기본 검사도 긁자.”
대개 모든 조의 토의는 이런 식이었다.
[좀 어려웠나요?]
‘보면 알겠지.’
수혁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현종 원장은 그 미소를 짓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또한 귀가 있고, 학생들의 토의를 죄 들을 수 있었으니까.
‘어려운 문제 하나 까 잡수시더니……. 더 어려운 걸 가져왔어?’
아마 인턴이나 레지던트만 해도, 이 문제를 틀리진 않을 터였다.
그들은 어지간해서는 진단을 놓치지 않도록 훈련을 혹독하게 받고 있었으니까.
이유를 몰라도 내야 하는 검사들을 숙지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학생들은 달랐다.
그들의 지식은 머리에 묶여 있었고, 딱 아는 것만을 출력할 수 있었다.
“자, 걷겠습니다.”
이윽고 5분이 지났고, 각 조의 조장들이 종이를 가지고 수혁에게로 달려왔다.
수혁은 그 종이에 적힌 검사들을 하나하나 텅 비어 있던 PPT에 기입했다.
“흉부 X-ray, 기본 혈액 검사, 소변 검사, BT pro BNP……. 동맥혈 검사. 네. 이렇게 일단 진행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반드시 해야 할 검사 몇 개가 빠져 있었다.
수혁은 쓴웃음을 지어 보이곤 각 검사 밑에 소견을 적어 넣었다.
단 X-ray는 사진을 그대로 붙여넣었다.
“사진 소견은 어떻습니까?”
그리곤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여러 학생이 손을 들며 외쳤다.
“폐부종입니다!”
확신에 찬 얼굴들이었다.
‘문제는 맞췄다, 환자를 살렸다’라는 자부심이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수혁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네. 폐부종 소견이죠. NT pro BNP는 2800으로 증가해 있습니다. 나머지 검사는 이렇습니다. 자, 치료는 어떻게 할까요? 시간이 없는 관계로 각 조 당 하나씩만 구두로 받겠습니다.”
만약 토의가 제대로 되고 있다면 또 종이를 나누어 주었을 텐데.
헛발질 중이지 않은가.
해서 수혁은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확신에 찬 학생들은 폐부종 치료에 대해 배운 대로 외쳐 댔다.
“항생제!”
“라식스!”
“물리치료로 등을 두드려 줍니다!”
수혁은 그렇게 모인 치료를 슥 적고는 다음 PPT로 넘어갔다.
PPT에는 경과라는 글자만이 적혀 있었고, 밑은 비어 있었다.
“네, 방금 말해 준 대로 치료를 했더니…….”
수혁은 이렇게 말하며 글자를 기입했다.
‘환자 사망’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