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더 어렵게 내냐? (3)
‘환자 사망’.
새하얀 바탕의 PPT에는 오직 이 네 글자만이 쓰여 있었다.
수혁은 그 화면을 띄운 후 천천히 강의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각 조의 토의를 주도적으로 풀어 나갔던, 딱 봐도 똘똘해 보이는 애들의 얼굴이 당연하다는 듯 구겨져 있었다.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 대부분이었다.
아마 수혁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뭐지? 뭘 놓친 거지?’
물론 그렇지 않은 학생도 있긴 있었다.
우하윤은 이수혁의 실력을 워낙 다양한 루트를 통해 들어 온 터라 그의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지 않겠는가.
심지어 어제는 모든 학생이 오답을 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케이스조차 명쾌한 논리로 풀어 낸 바 있었고.
‘내가 뭘 놓친 거야.’
하지만 태도가 좋다고 해서 답이 보이진 않았다.
수혁은 잠시 당황에 빠진 강의실을 좀 더 두고 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해가 잘 안 가는 거 같아요.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의 말에 우하윤처럼 맨 앞에 앉아 있던 녀석 하나가 즉시 답했다.
초롱초롱한 눈망울만 봐도 성적이 보이는 듯했다.
‘좋을 때지.’
인턴 한 달만 돌고 나면 저 빳빳한 가운도 태도도 구겨질 텐데.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그럼 하나하나 설명을 해 드릴게요. 일단 여러분들은 이 환자가 폐부종이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맞죠?”
“네.”
“그렇다면 무엇이 이 환자에게 폐부종을 일으켰다고 생각합니까?”
“음.”
어떤 질환을 진단하려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있었다.
‘왜 이 질환에 걸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하지만 학생들은 아무래도 그 과정에 익숙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내내 풀어 온 문제들은 어떤 질환에 대한 문제지, 어떤 환자에 대한 문제들이 아니었으니까.
그걸 개선하기 위해 이현종 원장이 PBL을 도입하긴 했지만, 아직 걸음마 수준에 불과했다.
수혁은 말문이 막힌 학생들을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우선 환자는 당뇨가 있습니다. 치료제로는 빌다글립틴을 쓰고 있죠. 효과 면에서 다른 약에서 밀리기 때문에 잘 쓰지 않는 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유추할 수 있죠. ‘환자는 어떻게든 신장 기능에 이상이 있었을 거다’. 실제로 아까 여러분들이 낸 검사 결과를 보시면…….”
수혁은 화면을 뒤로 넘겼다.
아까 학생들이 낸 검사에 대해 수혁이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결과들이 주르륵 쓰여 있었다.
그 중엔 BUN, Creatine 항목이 당연히 끼어 있었고, 각각 52, 2.7로 증가 되어 있었다.
“신장 기능 이상을 염두에 둬 볼 수 있죠.”
“그럼……. 폐부종은 그거 때문에 생긴 건가요?”
“아뇨. 환자의 신장 기능은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당뇨약으로 교체한 게 벌써 수년이 지났으니까요. 아까 현 병력에 쓰여 있던 내용입니다.”
“아……. 그럼……. 그럼 뭐죠?”
학생의 눈은 이제 많이 흐려져 있었다.
자신이 없어진 까닭이었다.
반면 이현종 교수의 눈은 번쩍거리기만 했다.
‘스토리를 잘 짜네. 이거 설마 진짜 환자 케이스인가? 어디서 주워 온 거야? 원래……. 원래 알고 있던 케이스겠지?’
그렇다면 수혁은 평소에 공부를 어마어마하게 하고 있다는 뜻이 될 터였다.
자연히 이현종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어느새 시원찮으면 자신이 나서야겠다는 생각 따위는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 환자는 당뇨를 10년 넘게 앓았습니다. 물론 그 치료는 타 병원에서 받아서 기록이 없지만 말이죠. 여러분이 내과 의사고, 이 환자를 처음 봤다면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을 해야 합니까?”
수혁은 일부러 우하윤을 바라보며 물었다.
우창윤 교수의 딸이라면, 내분비내과 교수의 딸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 줘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우하윤은 꼭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상당히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수혁의 떠다 먹여 주는 듯한 질문을 못 받아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 아! 합병증!”
슬픈 일이지만.
당뇨 합병증의 가장 큰 위험 요인은 바로 당뇨 유병 기간이었다.
제대로 관리를 하는 사람도 꽤 있기는 했지만.
당뇨는 딱히 증상이 없는 질환 아닌가.
대개는 자신이 당뇨라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요. 합병증. 반드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게다가 지금 이 환자, 약을 뭘 쓰고 있다고 했죠?”
“빌다글립틴입니다!”
“네. 이미 신장이 고장 난 겁니다. 그게 과연 뭘 시사할까요?”
“아…….”
당뇨의 합병증은 무척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중 중점적으로 검사를 시행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신장, 나머지 하나는 눈.
만약 둘 중 신장이 망가졌다면 눈 또한 위험하다고 보는 게 옳았다.
신장 기능에 관여되어 있는 혈관들이 눈의 혈관들보다는 아무래도 더 굵었으니까.
더 굵은 게 망가졌다면 얇은 것들은 이미 망가졌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란 뜻이었다.
“혈관 손상…….”
“그렇습니다. 환자의 혈관은 그게 어느 혈관이든지 간에 손상을 입은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당뇨 환자에서 왜 혈관에 손상이 나타나는지는 굳이 설명 안 드려도 알겠죠? 본과 4학년이니까.”
“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봅시다. 환자의 폐부종은 왜 생겼을까요?”
아까와 정확히 같은 질문이었다.
정확히 같은 환자에 대한 질문이었고.
하지만 이제 학생들은 이 환자가 당뇨를 오래 앓았으며, 그로 인한 합병증이 있을 거란 것을 비로소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되니 아까와는 전혀 다른 답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부전의 악화?”
“아냐, 아냐, 심장 기능 부전?”
“우심실?”
수혁은 중구난방으로 쏟아져 나오는 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그걸 확인하려면 어떤 검사를 해야 합니까? 아까 냈던 검사에 추가하고 싶은 것들을 말해 보십쇼.”
그리곤 아까 학생들이 냈던 검사 항목을 가리켰다.
아마 인턴만이라도 제대로 돈 사람이 이 항목을 보면 어떤 검사를 더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터였다.
루틴에서 뭔가가 빠져 있었으니까.
대학 병원에서 강제로 실수를 줄이기 위한 루틴을 배웠으니까.
영문도 모르고 계속 내 왔던 처방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학생들은 이제야 그 검사를 떠올렸다.
“심……. 심전도요!”
그중에서 우하윤이 제일 빨랐다.
수혁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심전도. 또?”
“심장 기능 부전을 의심할 수 있는 상황이니, 심초음파도 추가하고 싶습니다.”
“좋아요.”
뒤이어 심근경색을 감별할 수 있는 혈액 검사라 할 수 있는 심장 근육 효소 등에 관한 내용도 이어졌다.
수혁은 그 검사 모두를 PPT에 적고는 검사 결과까지 일거에 적어 내었다.
‘쟤는 진짜 괴물인가.’
그걸 가만히 보고 있던 이현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의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수혁이 단 한 번도 뭘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걸 그냥 다 외워서 진행하고 있다는 뜻인데.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CK-MB 49.1입니다.]
[Troponin-I는 34.]
물론 수혁도 그걸 다 외우고 있진 않았다.
바루다가 죄다 기록해 놓았을 뿐.
‘좋아. CK는?’
[635입니다.]
‘됐어. 잘했어.’
그렇게 커닝 비슷하게, 수혁은 검사 결과를 쭉 늘어놓았다.
심근경색 시 오를 수 있는 지표라 할 수 있는 심장 근육 효소들이 죄 크게 올라 있었다.
심전도에서는 T파 웨이브가 역전되어 있었는데, 이 역시 심근경색의 아주 중요한 지표라 할 수 있었다.
그제야 학생들은 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는, 폐부종의 원인이자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심근경색이었구나…….”
“심장 초음파에서도 벽 움직임이 이상해…….”
수혁은 웅성거리는 학생들을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네. 환자는 심근경색입니다. 그럼 치료는 어떤 걸 해야 합니까?”
잠시 저 구석에 서서 웃고 있는 이현종 교수를 바라보면서였다.
이것만으로도 학생들에게는 너무 큰 힌트가 되었다.
“심혈관 조영술 및 스텐트 삽입입니다!”
“맞습니다. 자, 그럼 어떻게 되나 봅시다.”
수혁은 즉각 혈관 조영 사진을 띄워 주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관상동맥 세 개 다 잘 가는데?’ 할지도 모르는 그런 영상이었다.
하지만 조금만 배운 사람이 본다면 좌전 동맥, 즉 가장 중요한 관상동맥이 막힌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걸 스텐트로 뚫어 주면……. 환자는 살게 되는 겁니다.”
수혁은 스텐트 시술까지 보여 준 후, 재차 앞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수혁에게 휘둘리다시피 해서 따라온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처음 수혁이 입을 열 때만 해도 쟤가 누구지 하고 있던 애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모조리 압도되어 있었다.
그만큼 흡입력 있는 강의였고, 그만큼 리얼한 강의이기도 했다.
때문에 수혁이 재차 입을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럼 이 케이스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건 뭐가 있을까요?”
심지어 질문을 던진 후에도 그러했다.
그렇게 대략 5분여가 지났을 때쯤, 누군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학생이 아니라 이현종이었다.
“당뇨가 오래된 환자에서는 심근경색의 증상 중 흉통이 빠질 수도 있다. 이거지?”
원장의 말에 누가 감히 토를 달 수 있을까.
심지어 이쪽 심장 조영술 쪽으로는 가히 세계 최고라고 부를 수 있는 인물인데.
수혁은 너무 빠른가 싶은 정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음. 아주 중요한 얘기지. 실제로 이렇게 해서 골든아워 날려 먹은 케이스가 왕왕 있거든. 심지어 너희 선배들도 그랬다고.”
이현종은 그렇게 말하면서 학생 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연히 강의의 주체자가 수혁에서 이현종에게로 넘어갔다.
“당뇨가 오래되면 혈관만 망가지는 게 아니에요. 아니, 결국은 혈관 얘기긴 한데. 신경에 들어가는 혈관들도 망가진단 말이지. 그럼 통증에 둔감해져. 특히 내부 장기들처럼 원래도 둔한 애들은 거의 없어진다고. 뭔 소린지 알겠어?”
학생들은 그저 마른침만 꿀꺽 삼켰다.
이현종은 약간은 겁먹은 듯한 학생들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까 너희처럼 ‘아, 흉통이 없구나! 그럼 심근경색은 아니겠네.’ 같은 일차원적인 생각을 하다가 환자 잡는다고. 실제로 그런 일들이 왕왕 있고. 자 여기 이수혁 선생이 오늘 너희 의사 인생에 아주 중요한 걸 가르쳐 준 거야. 환자가 말하는 증상은 물론 중요해. 하지만 절대적으로 신뢰하다가는 큰코다친다. 기본 검사가 괜히 기본 검사가 아니다. 알았어?”
“네.”
“근데 뭐 하고 있어? 손뼉 안 치고. 이 강의 이거 내가 한 거야? 이수혁 선생이 한 거라고.”
“아, 네!”
“넌 내 박수도 받을 자격이 있다. 이렇게까지 잘할 줄은 몰랐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