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저대로 두면 죽겠는데 (2)
‘네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상을 들여다보았다.
신경과 레지던트는 이미 영상에서 흥미를 잃은 후 병동 쪽과 전화 중이었다.
그저 빨리 약을 쓰고 입원 수속을 마칠 생각인 모양이었다.
[범위가 좁습니다. 의식 소실은 다른 이유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그사이 바루다는 계속 자신의 생각을 수혁에게 관철시키고 있었다.
그냥 개소리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그럴싸한 의견이었다.
확실히 범위가 좁았으니까.
‘그럼 뭐가 원인인 거지?’
[머리 MRI만으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정보가 제한적입니다. 다른 검사들을 우선시할 것을 요청합니다.]
‘다른 검사라.’
[의식 소실을 일으킬 만한 다른 장기를 먼저 리스트업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
수혁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누구라도 이상히 여길 만한 장면이었다.
자기와 아무 관련 없는 환자를 보러 온 것만 해도 사실 꽤 이상한 일 아니던가.
대학 병원이라는 곳은 자기 일만 하기에도 바빠 죽겠는 곳인데.
근데 그렇게 오더니 지금은 오만상을 쓴 채 이미 결론 난 영상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다행인 점은 그 누구도 수혁에게 눈길을 주고 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방사선사는 이제 검사 막바지에 다다른 환자에게 집중하고 있었고.
신경과 레지던트는 여전히 통화 중이었다.
명색이 태화 의료원이다 보니 병실 잡기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었다.
‘의식 소실을 일으킬 수 있는 장기라면……. 심장?’
[네, 역시 심장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자 차트엔 통증 얘기는 어디에도 없었는데.’
[아까 수혁이 학생들 앞에서 발표했던 케이스도 비특이적인 증상이었습니다.]
‘하긴, 하긴 그건 그래. 음.’
아무래도 심장 검사를 좀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물론 지금도 심장박동 수를 모니터링하기 위한 기기는 달고 있었지만.
이것만 가지고서는 현재의 박동 수 말고는 알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저 선생님.”
해서 수혁은 어렵게 레지던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직도 한창 통화 중이던 레지던트는 약간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수혁을 돌아보았다.
“왜요?”
“이 환자 혹시 심전도는 찍었나요?”
“심전도? 아마요.”
심전도는 대학 병원 응급실에서는 일종의 루틴 검사에 속하는 검사였다.
그게 당장 담당의 판단에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일단 찍기는 한다는 얘기였다.
‘확인은 안 한 모양인데.’
[저희라도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아니면 다시 찍든지요.]
‘인턴이 찍어서 뭔가 이상하면 노티를 하지 않았을까?’
수혁은 대수롭지 않아 하는 신경과 레지던트의 반응에 약간은 주눅이 든 얼굴이 되어 바루다에게 물었다.
하지만 바루다는 아주 확고한 태도를 보였다.
[수혁의 인턴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인턴이 의삽니까?]
‘의사지, 인마! 나라에서 인정한 면허증도 있는 몸이라고!’
[지금의 수혁과 비교해 보십시오. 과연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아, 음.’
확실히 레지던트가 된 지 이제 겨우 몇 개월 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시받은 처방만 수행하던 인턴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비단 바루다의 도움을 얻게 된 수혁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른 동기들의 실력도 분명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인턴은 놓칠 수……. 있지.’
[네, 그냥 개뿔도 모른다고 보시면 됩니다.]
‘말이 너무 심하네. 아까부터.’
[수혁은 인턴도 아닌데 왜 두둔하고 나섭니까?]
‘얼마 전까지는 인턴이었으니까.’
아직 심리적으로는 내가 인턴인지 레지던트인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바루다는 그런 수혁의 심리는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일단 무시하기로 결정했다.
[아무튼, 심전도를 찍거나 확인해 봐야 합니다.]
‘음.’
바루다의 의견일 뿐만 아니라, 수혁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바였다.
해서 수혁은 다시금 레지던트를 올려다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까보다는 얼굴이 좋아 보였다.
입원 관련해서 일이 좀 잘 풀린 모양이었다.
‘그게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선생님. 환자 심전도 혹시 보셨나요?”
“네? 아뇨.”
예상대로 레지던트는 심전도를 본 일이 없었다.
의식 소실과 신경학적 증상을 동반한 환자를 보기 위해 내려온 신경과 레지던트가 아니던가.
심장은 내려오려고 결심했을 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때문에 그는 황당하다는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미 이 환자의 병명은 뇌경색으로 결정되었고, 심전도는 급한 검사가 아니었으니까.
막말로 내일 아침에나 확인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럼 지금 당장이라도 찍어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마침 검사도 끝났고…….”
하지만 수혁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일단 환자의 의식 소실의 원인이 뇌경색이 아니란 확신이 들었으니까.
그렇다면 뭔가 다른 원인이 있을 게 분명한데, 그 원인이 심장일 가능성이 극히 컸으니까.
그걸 확인하는 것이 환자의 예후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칠 거라 믿었으니까.
“검사가 끝났으니까 이제 바로 약 달고 병실로 올려야죠! 갑자기 심전도라뇨? 영상 봤잖아요?”
물론 신경과 레지던트 또한 양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또한 지금 당장 검사니 뭐니 집어치우고 뇌경색에 대한 처치를 시행하는 것이 환자를 위한 길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확인을 해야 합니다. 뇌경색 범위가 좁습니다! 의식 소실을 일으킬 만한 병변이 아니에요!”
더구나 이어진 수혁의 말은 그의 자존심마저 건드려 버렸다.
제아무리 수혁이 우수한 내과 레지던트라 해도 내과지 않은가.
그런데 감히 신경과 영역에 대고 훈수질이라니.
연차가 낮으면 모를까, 그 반대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수혁 선생님. 선생님이 신경과예요? 내과 1년 차가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신경과 3년 차한테 가르치려고 듭니까?”
“가르치려고……. 든 게 아닙니다! 다만 보십쇼. 범위가 좁지 않습니까?”
“뇌경색에서 범위가 중요합니까? 부위가 중요하지.”
“하지만…….”
“어차피 이수혁 선생 환자도 아니잖아요. 신경과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만 나가 주세요.”
신경과 레지던트는 딱 여기까지 말한 후, 수혁을 강제로 방 밖으로 내몰았다.
예전 같았으면 어떻게 어떻게 막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다리가 불편해져 버린 지금은 어찌할 도리가 전혀 없었다.
쾅.
그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따름이었다.
[거참, 성질머리하곤.]
바루다는 영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죽거렸다.
하지만 수혁으로서는 아주 이해가 안 가진 않았다.
‘나라도 다른 과 아래 연차가 와서 깝죽거리면 짜증 나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 신경과 레지던트 반응이면 양반인 셈이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일단 반말이었을 것이고.
좀 더 나가면 정강이 정도는 두들겨 깠을 터였다.
[깝죽거린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겁니다. 아마 저 사람도 알았을걸요? 범위가 부족하다는 것 정도는.]
‘아무튼, 이대로는 안 돼. 음.’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기엔 용기가 많이 부족했다.
힘도 모자랐고.
‘일단 지팡이가 안에 있어.’
[거참…….]
‘너 폭발하면서 다쳐서 그래!’
[누가 뭐래요? 그냥 안됐다, 이런 거지. 뭐.]
‘전혀 그런 말투가 아니었거든?’
[어찌 됐건. 그냥 이대로 둘 겁니까?]
‘아니.’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가운 주머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후, 폰을 꺼내었다.
그 모습을 본 바루다가 아주 묘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금 되게 치사한 거는 알고 있죠?]
‘어쩌라고. 심전도 안 찍을 거야?’
[찍긴 찍어야죠.]
‘그럼 가만히 있어.’
강혁은 그런 바루다를 단숨에 제압한 후, 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수혁아.”
회의에 들어갔다던 이현종은 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았다.
‘어지간히 회의에 건성이라더니…….’
특히 그 회의가 무슨 돈 얘기라고 하면 거의 귀를 막고 있다가 나오는 수준이라고 했다.
수혁은 아마도 오늘 회의가 돈 관련 회의였겠거니 하며 입을 열었다.
“네, 원장님. 아까 말씀 주신 환자분 때문에 전화드렸습니다.”
“어, 그래? 급한 환자가 있어?”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심전도…….”
“알았어, 알았어! 심장 문제면 내가 가 봐야지!”
“아니, 뭔…….”
수혁은 전화가 혼선됐나 하는 얼굴로 폰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이현종은 혼신의 연기를 다해 가며 회의실을 부리나케 빠져나왔다.
“워, 원장님! 어디 가요!”
가까스로 적자를 면한 내과 과장 신현태가 그를 붙잡으려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환자, 환자!”
연신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가리키며 나가고 있는데 무슨 수로 잡는단 말인가.
이현종 원장의 환자라고 한다면 심근경색일 텐데.
“이번엔 진짜 환자 맞죠?”
물론 신현태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여태 이현종이 가짜 환자 핑계 대고 튄 적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가 전화를 걸었는지 확인할 엄두를 내진 못했다.
“신 과장님. 말 돌리지 마시고요. 대체 이 분과 적자들 이거 어쩔 겁니까? 소화기내과랑 혈액종양내과에서 번 거 다 까먹고 있잖아요.”
우선 자신부터 포화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아비규환 속에서 이현종은 무사히 빠져나왔다.
‘뭔 소리여.’
[뇌경색은 저쪽에서 일어난 걸까요?]
그사이 수혁과 바루다는 발칙하고도 무례한 상상을 이어 나가고 있었고.
“어, 수혁아. 이제 나왔네. 뭔데?”
물론 이현종의 연기가 끝난 다음에는 수혁의 상상 또한 끝을 맞이했다.
그는 순식간에 현실로 돌아온 후, 환자에 대해 떠올렸다.
아니,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바루다가 딱딱 정리해서 보여 주었으니까.
“아까 따라가 보라고 하신 환자분 때문입니다.”
“아, 응급실로 가고 있어. 가면서 들을 테니까, 얘기해 봐.”
“네, 원장님. 그 환자분 히스토리는 상당히 불명확합니다. 그냥 쓰러진 채로 발견이 되어서 응급실로 왔는데, 멀쩡한 것을 확인한 지 3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골든아워가 지났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계속해 봐.”
이현종은 여느 때처럼 매끄럽기 그지없는 수혁의 노티에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환갑을 넘긴 사람이라고 하기엔 발걸음이 지나치게 가벼워 보였다.
그것만 봐도 병원이 석좌 교수 자리를 괜히 준 게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방금 시행한 브레인 MRI에서 뇌경색이 관찰되기는 합니다.”
“아 경색이 보여?”
“네, 그런데 의식 소실을 일으킬 정도로 광범위하지는 않습니다.”
“범위가 작다 이건가?”
“네. 범위도 작고, 혈관이 막혀서 생기는 경색에 비해 경계도 무척 모호합니다.”
“아하. 디퓨즈하다 이거지?”
“네.”
이현종은 벌써 하나의 진단명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진단명은 수혁과 바루다의 머릿속에 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아무래도 우심실 경색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흉통보다는 혈압 저하로 인한 증상이 주를 이루는데…….”
“몇몇 케이스 리포트에서 머리로 가는 피가 부족해지면서 뇌경색이 발생했다고 보고한 적이 있지. 기다려. 아니, 전화 끊고 심혈관 조영술실 예약해. 내 이름 걸고. 난 일단 응급실로 바로 갈 테니까.”
“네. 원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