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저대로 두면 죽겠는데 (3)
드르륵.
수혁이 그렇게 통화를 하는 동안 MRI 검사가 완전히 끝났는지, 환자가 빠져나왔다.
대략 20분도 넘게 소음 가득한 곳에 있어서 그런지, 환자를 끌고 나오는 인턴의 얼굴이 그렇게 좋지만은 못 했다.
‘미안한데. 저걸 더 안 좋게 만들어야 한다니.’
[어쩔 수 없죠. 심전도를 찍고 문제를 놓친 게 잘못이니.]
‘그거야…… 그렇긴 하지. 근데 아니면 어쩌지?’
[이현종 원장도 동의한 바입니다. 100% 확신합니다.]
‘오케이.’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용기를 얻은 후 절뚝거리며 인턴에게로 다가갔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침대를 가로막는 방향을 향해서였다.
제아무리 수혁의 기동력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정신없는 상태에서 홀로 침대를 끌어야 하는 인턴보다는 빨랐기 때문에 성공적으로 경로 방해를 할 수 있었다.
“엇.”
당연하게도 인턴은 아주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이제 막 촬영실에서 나온 신경과 레지던트 또한 수혁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당황스럽다기보다는 화가 난 얼굴이었다.
“아직도 안 갔어요?”
“선생님. 심전도 찍는 거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 번만 확인해 주십시오. 환자 의식 변화……. 아까 그 뇌경색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뭔……. 올라가서 찍으면 되는 문제예요. 지금은 일단 약부터 써야 한다고.”
“지금 인터벤션 대신 약 써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거……. 혈관이 막혀서 발생하는 뇌경색하고 조금 달라서 아닙니까?”
“무슨…….”
정곡을 찔린 신경과 레지던트가 막 소리를 치려는 찰나.
누군가 환자가 실려 있는 침대로 후다닥 달려와 입을 열었다.
“인턴, 심전도 찍어.”
거의 부탁 어조에 가까웠던 수혁과는 달리 내리찍어 누르는 말투였다.
“어, 네. 네.”
물론 인턴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이 말을 꺼낸 건 이현종이었으니까.
태화 의료원의 원장이자, 이 큰 의료원 전체를 통틀어서도 딱 둘밖에 없는 석좌 교수의 말을 누가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는가.
다다다.
해서 인턴은 부리나케 심전도를 가지러 달려가야만 했다.
“영상은 어딨지? 넘어갔나?”
이현종은 신경과 레지던트에게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답했다.
“아뇨. 지금 막 검사 끝났습니다. 촬영실에서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영상 봐야지. 어…….”
이현종은 그대로 촬영실로 향하려다가 수혁이 방금 뛰어간 인턴을 대신해 환자의 인공호흡 주머니를 짜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대로 들어갈 수는 없다고 판단한 그는 잠시 고개를 두리번거렸고, 이내 신경과 레지던트를 발견했다.
‘아, 좆됐다.’
제아무리 다른 병원에서 인턴까지 하고 온 신경과 레지던트라고는 해도.
수혁에 대한 소문을 한 번쯤은 들었던 적이 있지 않겠는가.
다들 설마 그렇겠냐 하길래 웃어넘겼는데.
이렇게 원장과 함께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도저히 나오질 않았다.
‘차라리 의학적 소견이 아니라 원장 핑계 댔으면 바로 찍었지, 나도…… 솔직히 찜찜하긴 했는데…….’
일단 뇌경색에 대한 약부터 달고 병동에 가자마자 심전도를 찍어 볼 생각이 들긴 했다.
수혁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의식 소실의 원인이 머리가 아닐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비록 이런 경험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언젠가 학회에서 들은 적이 있는 거 같기도 했고.
하지만 이미 늦었고, 이제 다 틀렸단 생각까지 이어지고 있을 때쯤, 이현종이 입을 열었다.
“어, 자네가 이거 좀 짜. 영상 보고 오는 동안.”
“네?”
“지나가던 길이었어? 미안해. 일단 이것 좀 짜 그래도.”
하지만 이현종은 신경과 레지던트의 생각처럼 그렇게까지 치밀한 인간은 아니었다.
오히려 환자 제대로 보는 것과 뭔가 재밌을 거 같은 일에만 몰두하는 조금 이상한 인간이었다.
때문에 신경과 레지던트에게는 다행하게도 별반 제재도 없이 가타부타 촬영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워, 원장님. 잠시만.”
“응? 아, 너 지팡이 어디 갔어.”
“안에 있습니다.”
“안에? 너도 참……. 건망증이 있구나. 이런 걸 두고 다니냐 그래.”
이현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제 막 검사를 끝내고 자기 의자에 앉으려던 방사선사는 어쩌지 하는 표정을 짓다가 아예 옆으로 비켜섰다.
“영상 어딨지?”
“아마……. 이걸 겁니다.”
그사이 수혁은 이현종에게 지팡이를 넘겨받고는 모니터 앞으로 도달했다.
솔직히 다리 불편한 사람이 옆에 있으면 눈치를 볼 만도 했지만, 이현종은 자신이 관심 있는 거 외에는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위인이었다.
때문에 바로 옆에서 타닥거리는 수혁을 보고도 의자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빨리 틀어 봐.”
오히려 수혁을 다그칠 뿐이었다.
다행히 수혁은 자신의 장애를 심각하다고 인지하지 않고 있는 데다가, 자신의 가설이 맞을지 아닐지부터가 후달렸기 때문에 이현종의 태도 따위에는 안중을 두지 못했다.
그저 현종의 말을 따라 마우스를 최대한 빨리 움직여 댈 따름이었다.
[가장 뚜렷하게 보이는 영역은 T2 웨이티드 이미지에서 48번부터 60번입니다.]
수혁은 늘 그렇듯 바루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그게 또 한 번 이현종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야……. 이 자식 영상 딱딱 찾는 거 봐라, 이거. 누가 보면 영상의학과인 줄 알겠어.’
솔직히 레지던트 2년 차 중에서도 MRI 영상 제대로 못 보는 녀석들이 수두룩한데.
얘는 어떻게 된 게 몇 개월 되지도 않은 놈이 딱딱 제일 중요한 영상만 짚어 낼 줄 알았다.
‘신기하단 말이지.’
이현종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혁이 띄운 영상을 바라보았다.
“흠.”
“이게 어느 한 곳의 혈관이 막혀서 생긴 거라고 하기엔 좀 이상합니다.”
“그래. 영향을 받은 부위 자체는 넓네. 그런데…….”
“완전히 틀어 막혔을 때 발생하는, 세포 손상이 나타나는 범위는 아주 좁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역시 뇌 혈류 자체 또는 산소 공급에 문제가 생겼다고 봐야겠지.”
“심장 문제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좋아.”
이현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밖을 돌아보았다.
들어올 때 문을 닫지도 않은 까닭에 환자나 신경과 레지던트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야, 왔냐?”
“아……. 왔습니다, 원장님!”
그의 외침에 신경과 레지던트가 조금은 황망한 얼굴로 답했다.
역시 이현종은 소문대로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야, 수혁아. 나가 보자. 확인해야지, 심장. 아니면 빨리 신경과 넘겨서 워크업 더 해 보라고 하고. 맞으면 내가 직접 뚫고.”
“네, 교수님.”
이현종은 나이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벌떡 의자에서 일어나며 수혁을 잡아끌었다.
그 바람에 수혁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으나 지팡이의 도움을 받아 겨우겨우 버틸 수 있었다.
“뭐 나왔어?”
그렇게 다가간 둘에게 인턴은 두 손을 공손히 모아서 방금 뽑은, 뜨끈뜨끈한 심전도 검사 결과지를 내밀었다.
이현종은 힐끔 보고는 그걸 그대로 수혁에게 밀었다.
몰라서는 결코 아니었다.
‘이 사람은 참 시험하는 거 좋아해…….’
네가 얼마나 잘 보나, 확인하고자 함이었다.
[문제없습니다. 깡통도 판독하는 게 심전도이니까요.]
‘믿는다, 바루다.’
사실 심전도 해석은 내과 레지던트들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였더랬다.
심장이라고 하는 장기가 다른 장기들과는 달리 전기 신호를 통해 움직였기 때문에 상당히 생소한 모양을 띠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심전도 해석은 어느 정도 인공지능이 해석을 가능하게 된 지 10년이 더 넘은 지금이었다.
바루다에게는 그냥 껌이었다.
“일단 ST 분절이 1번 리드에서 올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ST 분절의 상승이 3번 리드에서 2번 리드에서의 상승보다 더 큽니다.”
“그럼 뭘 의심할 수 있지?”
“심장의 아래쪽에 경색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래쪽이라 하면 어느 부윈데?”
이현종은 자신의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질문을 지속했다.
슬금슬금 환자가 실린 침대를 밀면서이기도 했다.
그 의중을 눈치챈 신경과 레지던트는 환자의 침대를 일단 심혈관 조영술실 쪽으로 같이 끌기 시작했다.
이미 한 번 삽질을 했으니, 어떻게든 만회하고자 함이었다.
아무튼, 수혁은 마지막 질문에도 별 망설임이 없었다.
“좌심실과 우심실 모두 가능합니다.”
“그럼 어떻게 감별하지?”
하지만 이번 질문에는 바로 답을 하진 않았다.
물론 몰라서는 아니었다.
“리드 배치를 바꿔야 합니다. 우측 세팅으로요.”
이미 환자의 좌측 가슴 쪽으로 붙어 있던 심전도 리드들을 얼마간 우측으로 바꿔 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확인한 이현종의 얼굴엔 감탄 섞인 미소가 번졌다.
아니, 얼마간은 경악이 서려 있다고 봐도 좋았다.
이런 세팅을 레지던트가 하는 건 처음 보는 것이었으니까.
‘미친놈이?’
순환기내과 펠로우나 되어야 겨우겨우 해 보는 걸 레지던트 1년 차가 하고 있다니.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할 지경이었다.
“음…….”
하지만 이미 수혁은 침대에 거의 의지하다시피 해서 걸어가는 주제에 리드 세팅을 마친 상황이었다.
“잠깐 멈춰 보실래요? 어차피 엘리베이터 기다려야 하니까. 노이즈가 있어서.”
“그래. 잠깐 서 봐.”
“네.”
수혁에 이어 이현종까지 멈추라고 하자 침대는 곧장 멈추어 서야만 했다.
적어도 여기 병원 안에서만큼은 이현종의 권위가 대통령 못지않았으니까.
위이잉.
다시금 심전도 기기가 심전도를 뱉어 내기 시작했다.
아까는 그래도 뭔가 해석을 하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지금은 혼란이 온 모양이었다.
평상시 쓰는 세팅하고 거의 반대가 되어 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세팅을 쓰는 사람은 심전도 기기의 도움이 전혀 필요한 사람이 아니기에 별 쓸모가 없는 기능이기도 했다.
“그건 어때?”
종이가 완전히 빠져나오자마자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한 이현종이 이렇게 물었다.
[뭐 어려울 거 없군요.]
바루다는 그 종이를 보자마자 코웃음을 쳤고, 덕분에 수혁은 지체하지 않고 소견을 말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ST 분절은 역시나 상승해 있습니다. 특히 3, 4, 5, 6번이 그렇습니다. 그에 반해 1번 리드에서는 뚜렷하지 않으며 2번에서는 오히려 하강했습니다.”
“그럼 뭘 의심해야 하지?”
“RVMI. 우심실 경색입니다.”
“좋아. 그럼 치료는?”
“골든아워 이내라면 반드시 스텐트를 삽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심부전 또는 사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완벽해. 오늘 시술 네가 어시 서.”
“네? 펠로우…… 선생님 말고요?”
“걔가 진단했냐? 네가 했지. 네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