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4화 (54/1,303)

54화 추계 (2)

[수혁이 NEJM이라니. 원장 코인 제대로 탔군요.]

‘아직 쓰지도 않았거든?’

[하긴. 하지만 이현종입니다.]

‘그건……. 그건 그래.’

이현종이 다른 사람한테 논문 쓰는 기계라고 말하는 것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진짜 기계는 본인이면서.

심지어 어떤 논문은 골프장 그늘집에서 뚝딱 나온 것도 있었다.

신현태는 그때 골프도 지고 있던 마당이었던지라 현자 타임이 너무 세게 왔더라고 회상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 논문 가지고 가시죠.]

‘외장 하드에 있을 거야.’

[정리해 두길 잘했군요.]

‘그러게. 이것도 지웠으면 찾느라고 10분 넘어갈 뻔했네.’

지난 3월 아니, 4월까지만 해도 논문 한 번 보면 지우거나 그냥 그 컴퓨터에 두고 다녔더랬다.

그러다가 신현태에게 논문 쓰라는 얘기를 들은 이후론 외장 하드에 다 모아 두고 있었다.

머릿속에 있다고 해 봐야 지금부터 쓰려는 논문의 레퍼런스가 되어 주진 못할 테니까.

똑똑.

그렇게 바로 출력을 한 수혁은 곧장 원장실로 향했다.

원래 일개 레지던트라면 원장실의 위치조차 모르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이현종의 유별난 총애를 받고 있는 수혁은 위치를 정확히 알다 못해 익숙할 지경이었다.

“아, 이수혁 선생님. 안쪽으로 들어가세요. 아메리카노, 차갑게 드리면 되죠?”

“네. 늘 감사드립니다.”

심지어 비서가 수혁의 음료 취향까지 알고 있었다.

“어, 앉아.”

비서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이현종이 소파에 앉아 수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대기 타고 있던 건 아니었다.

노트북을 두들기는 중이었다.

“아, 그거야? 줘 봐.”

이현종은 딱 손을 멈추고 수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건 아니었고, 논문이나 달라는 것이었다.

“네, 여깄습니다.”

“어디……. 음. 아……. 이 양반이 낸 거구나?”

이현종은 논문 앞판을 보더니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는 이름이 있는 모양이었다.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현종은 국제 학회장도 했던 양반이었으니까.

요즘 말로 하면 순환기내과 학회에서 핵인싸라고 보면 되었다.

제멋대로인 걸로 보이는 성격 탓에 아주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많진 않았지만.

“흐음……. 그래. 완전히 똑같네. 좋네. 부검 기록을 그림으로 남길 생각을 했네.”

빠르게 논문을 넘기던 이현종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환자의 관상동맥과 심장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 놓은 첨부파일에서였다.

1994년 논문이라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세한 그림이었다.

수혁도 보면서 바루다와 숙덕거린 기억이 있었다.

디지털 페인팅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3D 그래픽 작업도 생소하던 시절인데 그림이 너무 양질을 자랑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이 양반이 은퇴하고 메디컬 일러스트레이터 하고 있지 참.”

그 의문은 이현종의 중얼거림과 함께 해결되었다.

‘아하.’

[그럼 설명이 되는군요.]

둘이 끄덕이고 있는 사이 현종은 다시 논문을 넘겼다.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케이스 리포트였으니까.

내용이 많진 않았다.

당시엔 돌연변이라고만 생각했지 않았겠는가.

해부학적 변이의 가능성 따위는 아예 언급조차 안 되어 있었다.

“좋아. 아예 같아. 게다가 이거 국제 심장학회에 실린 거잖아. 이만하면 레퍼런스로 충분하지. 일단 이리로 와 봐. 이거 내가 대강 인트로덕션 쓴 거야.”

“어……. 네.”

헤어진 게 10분 전인데 벌써 도입부 작성을 했다니.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싶었다.

[우리가 논문 출력하고 있을 때, 이 사람은 논문을 썼군요.]

‘약간 자괴감이 드는데…….’

[괜찮습니다, 수혁. 조금 모자라도, 수혁에게는 제가 있습니다.]

‘이걸 위로랍시고 하는 거지?’

[네.]

‘그래…….’

수혁은 ‘인공지능에게 뭘 더 바랄까’라고 중얼거리며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았다.

[대단하군요.]

바루다의 말처럼 감탄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거의 A4 용지 한쪽 정도 되는 분량이 적혀 있었는데, 모조리 영어였다.

[문법 완벽하고, 단어 선택 적절하고. 영어 논문 쓰기의 정점이군요.]

‘하…….’

[괜찮습니다, 수혁. 제가 다 해석하고 있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음. 내용도 좋네.’

[네. 대가가 괜히 대가가 아니군요.]

예전의 수혁이었다면 영어 문장 해석하는 데만도 시간을 제법 할애해야 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바루다가 실시간으로 전달해 주는 내용을 듣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무척 단축되었다.

어지간한 원어민이랑 비교해도 큰 차이는 없을 지경이었다.

“확실히 교수님께서 관상동맥 해부에 대해서 워낙 잘 알고 계셔서, 완벽한 소개가 나온 것 같습니다.”

해서 수혁은 거의 화면을 들여다보고 1분도 되지 않아 현종을 돌아볼 수 있었다.

이현종으로서는 퍽 의외의 일이었다.

분명 수혁이 자기 입으로 영어가 약점이라고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직접 들은 건 아니고, 지원 원서에서 본 내용이긴 했지만.

“벌써 다 읽었어?”

“네.”

“독해가 좋구나? 못 한다더니.”

“영어 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연수 가야 하니까요.”

수혁의 말을 들은 바루다가 ‘원장 뺨치는 사기꾼’이라는 둥 어쩐다는 등의 말을 늘어놓았지만, 수혁의 얼굴엔 단 하나의 표정 변화도 스쳐 지나가지 않았다.

“이야……. 아무튼.”

이현종은 그렇게 좀 놀라다가 자신의 노트북을 톡톡 두드렸다.

“이거 여기까지 했고. 초록은……. 이렇게 하지.”

그냥 두드리는 건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자판을 치고 있었다.

‘미친 사람인가.’

[지우질 않네요, 문장을.]

그야말로 일필휘지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그냥 생각 없이 두들기는 거 같아 보이는데, 화면에 뜬 내용은 단 하나도 뺄 게 없었다.

다만 이번엔 아까 수혁이 본 것처럼 자세하지는 않았고 그저 요약이었다.

초록이라고 보면 되었다.

“여기에 네가 살 붙여서 결과랑 고찰까지 써 봐.”

“아……. 그럼 초록은 그냥 이걸로 내고요?”

“그래야지. 추계 아마 곧 마감일걸? 그건 내가 낼게. 어차피 이번에 우리 병원이 진행 맡아가지고.”

“네, 교수님. 그럼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대개 실험이나 데이터 정리를 다 마친 상황에서 순수하게 논문 쓰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일주일 내외라고 보면 되었다.

이번이 딱 그러한 상황이었다.

딱 한 건의 케이스를 가지고 논문 쓰는 거라 너무 날로 먹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무튼, 수혁은 일주일을 예상하며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글쎄. 여기서 쓰고 갈래?”

하지만 이현종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미치셨나.]

감히 세계 최고의 인공지능을 꿈꾸는 바루다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농담이겠지?’

[표정 분석 결과……. 농담 아닌 거 같은데요.]

‘이런 젠장. 가능해?’

[가능한지 여부를 분석하겠습니다. 5분만 시간 끌어 보십시오.]

‘5분. 알았어.’

원래의 바루다라면 띡 하면 띡 나왔겠지만.

지금은 폭발 당시 소실된 대개의 연산 장치를 수혁의 뇌를 빌려다 쓰고 있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연산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는 오감을 포함해 크게 늘었지만 속도 자체는 또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제는 그 속도에 바루다도 수혁도 익숙해진 터라 크게 불편함을 호소하진 않게 되긴 했지만.

아무튼, 수혁은 흠흠 소리를 내고는 이현종을 돌아보았다.

바루다가 주문한 5분을 때우기 위해서였다.

“아, 그런데 교수님.”

“응?”

“김진실 교수님이랑 하는 논문 때문에요.”

“갑자기?”

워낙 갑작스러운 주문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생각나는 주제가 무척 한정적이었다.

[논문 쓴다고 논문 얘기를 꺼내다니…….]

바루다의 불평불만이 이어질 정도로.

“네. 좀 상의를 드리고 싶은데, 제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원장님께서 좀 더…….”

“아……. 하긴 내가 좀 연륜 있지. 똑똑하고. 그렇지?”

다행히 이현종은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자기 자랑을 늘어놓음으로써 수혁의 심기를 어지럽혔을 뿐이었다.

물론 이수혁은 정말로 이현종이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현태가 와서 당하는 것처럼 데미지를 입진 않았다.

“네, 원장님.”

“그래. 그럼 말해 봐.”

“그……. 이게 사실 심장은 아닌데.”

“괜찮아. 대강은 다 알아.”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미친 소리 한다고 했겠지만.

이현종은 진짜 그런 인간이었다.

이 사람은 그냥 의학이라면 대강 다 알았다.

“간암에서 요새 고주파로 태우는 치료를 하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많이 하지. 간이 그래도 좀 단단한 장기니까.”

원래 암 덩이를 태우거나 하는 건 지극히 위험한 짓이었다.

그러다 살아 있는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날아가기라도 하면 인위적인 전이를 시키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몇 암에 한해서는 예외를 두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간이었다.

“그게 아무리 그래도 간혹 전이가 있긴 하지 않습니까?”

“보고되는 게 있긴 하지.”

“그래서 돼지 간을 가지고 방사성 동위원소를 함유한 덩이를 암 덩이처럼 만들 건데요.”

“호오……. 계속해 봐.”

이현종은 과연 타고난 학자답게 흥미를 보였다.

자기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분야임에도 이러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이상한 인간이기는 했다.

그런데도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에 가깝다는 걸 보면 대단한 사람이기도 했고.

아무튼, 이수혁은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놀렸다.

“그 덩이를 고주파로 태운 후에 그 덩이에서 혹 간의 다른 부위로 퍼지는 방사성 동위원소가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아하……. 그럼 전이가 있을지 없을지를 알 수 있겠는데? 재밌네, 이거. 이런 게 실험 논문이지. 근데?”

“살아 있는 돼지한테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그냥 죽은 돼지 간으로 해도 좋을지를 모르겠어서요. 전자로 하려면 아무래도 돈이 좀…….”

“아. 잠깐만.”

이현종은 재밌고도 의미 있는 논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확 들떠 버렸다.

그사이 바루다가 분석 결과를 보내 왔다.

[관상동맥 해부 쪽으로 교과서나 논문 데이터가 꽤 있어서 바로 작성 가능합니다.]

운 좋게도 오케이 사인이었다.

“아무래도 죽은 거보다는 살아 있는 게 정확하지.”

“저도 그럴 거 같은데……. 김진실 교수님이나 저나 연구비가…….”

“하긴 그렇겠네. 돈이 꽤 들겠지.”

연구용 돼지는 그냥 아무 돼지나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변수를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음.”

잠깐 고민하던 이현종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그냥 내 연구비로 해. 나는 2 저자로 이름 올리고. 그럼 되겠다.”

“아……. 정말요?”

“정말이지. 재밌는 논문이잖아? 도움 되면 좋지.”

“감사……. 감사합니다.”

“어, 그건 그거고. 이건 언제 쓸 건데.”

이현종은 다시 조금은 날카로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마냥 재미만 있는 타 분야가 아닌, 자신이 평생을 바친 자신의 분야를 얘기할 때의 얼굴로.

수혁은 그런 현종의 얼굴을 보며 자신 있게 답을 해 주었다.

“지금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