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5화 (55/1,303)

55화 추계 (3)

“지금?”

이현종은 아까 자기가 여기서 쓰라고 말했던 주제에 제법 놀란 얼굴이 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스로 대단한 천재라 여기고 있는 이현종조차 레지던트 시절에는 이런 식으로 논문을 써 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교수가 되고도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다음에나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전까지는 사실 논문에 쓰이는 영어나 문법도 생소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걸 레지던트가 할 수 있다고?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앉아 있는 수혁의 얼굴엔 자신감이 온통 가득해 보였다.

‘설마……. 아니, 아니지. 가능한 일이긴 해.’

아마 이 자리에 있는 게 이현종이 아니었다면 화를 냈을 수도 있었다.

세상에 대체 어느 누가 논문을 이렇게 막 쓸 수 있냐고.

하지만 이현종은 천재지 않은가.

‘얘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면 가능하지. 게다가…….’

이현종은 이날 이때까지 자기가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더랬다.

아니,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가 마주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보단 똑똑하지 못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수혁과 마주하고부터는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어쩌면 수혁이 자기보다도 더 똑똑한 놈이 아닐까 하는, 뭐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그래? 그럼. 빨리 써 봐.”

해서 화를 내는 대신 진짜 천재는 어떻게 논문을 쓰는지 구경이나 해 보기로 했다.

‘준비됐지?’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루다를 불렀다.

[네, 완벽합니다.]

그사이에 기승전결을 다시 한번 가다듬고 있던 바루다가 자신감 넘치는 어투로 답을 해 주었다.

그리곤 수혁이 써야 할 문장을 차례로 머릿속에 띄워 주었다.

모두 수혁이 읽고, 바루다가 쌓아 둔 논문에서 한 번씩은 나왔던 단어들로 이루어진 문장이었다.

[관상동맥 조영술에서 해부학적 변이에 대한 고려는 환자의 예후에 있어 지극히 중요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모조리 논문에 쓰이는 단어와 숙어 그리고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딱 첫 문장이 쓰였을 때부터 이현종의 얼굴은 푸근해졌다.

‘좋은데.’

대부분 처음 논문을 써 보라고 했을 때, 정말 논문을 써 오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논문인 것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들고 오는 녀석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단 영어를 독해하는 능력은 뛰어난 데 반해 쓰는 능력은 제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영어가 아닌 문장을 써 오는 레지던트들 또한 많았다.

용케 영작은 되는데 논문이 아닌 형식으로 써 오는 녀석들도 많았고.

하지만 지금 수혁이 쓰고 있는 문장과 각 문단의 구조는 그야말로 영어 논문의 정석이라고 봐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문장이 좀 딱딱한 거 아니냐?’

[수혁이 읽었던 논문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정말……. 많았지.’

[그 많고 많은 논문들 문장 다 이렇습니다.]

‘그랬나.’

[그렇습니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수혁으로서는 긴가민가하기만 했다.

지금까지 영어로 된 논문을 정말이지 숱하게 읽어 오기는 했지만.

바루다가 죄다 실시간으로 해석을 해 준 상태에서 읽었기 때문에 솔직히 영어 논문을 읽었다고 보기는 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정말 대단한데?’

하지만 수혁의 내적 갈등이야 어찌 되었건 이현종이 보기엔 그저 완벽하기만 했다.

오히려 쓰면 쓸수록 놀라움이 더더욱 커져만 가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엔 그저 논문 영어에만 놀라고 있었지만.

이젠 그 내용에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승전결이 있어. 그것도……. 논리가 완벽해. 이렇게 풀어 나가면 진짜 NEJM 실리지.’

솔직히 말하면 아까 NEJM 어쩌고 했던 건 반쯤 농담이었는데.

쓰는 걸 보니까 확 욕심이 일었다.

‘요새 에디터가 누구더라.’

논문을 내면 심사를 담당할 사람이 누구인가까지 떠올리게 될 지경이었다.

물론 수혁은 전혀 이현종의 표정이나 다른 제스처를 두고 볼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바루다가 일러 주는 영어를 타자하는 데 정신이 완전히 팔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

그러던 수혁이 얕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든 것은 그로부터 대략 15분 뒤였다.

“다 썼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이현종은 웃어야 할지 아니면 울어야 할지 모르겠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그 또한 다 썼다는 말을 듣자마자 시계를 봤기 때문이었다.

‘15분 만에 이런 논문이 나온다 이거지.’

이 얘기를 누구한테 해 주면 믿을까?

수혁을 이현종만큼이나 신뢰하고 있는 신현태?

죽어도 혈액종양내과로 끌어들이겠다고 다짐하고 간 조태진?

‘안 믿을 거 같은데.’

아마 그들도 그러긴 쉽지 않을 터였다.

그 누구보다 수혁을 이뻐하고 믿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자신 아니던가.

그런 이현종조차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진 참이었다.

“뭐가……. 잘못됐나요?”

수혁은 이현종의 얼굴에 드러난 불신의 기운을 느끼곤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군요. 이현종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루다의 조언을 듣고 나서였다.

“아니, 아니. 잘못되긴.”

이현종은 손을 살랑살랑 저어 대고는 수혁이 치고 있던 노트북을 자신에게로 끌어왔다.

타자를 쳐 대는 것과 동시에 쭉 읽어 내려가긴 했지만.

한 번 더 확인을 해 보고자 함이었다.

“허.”

하지만 두 번 보고 세 번을 봐도 고칠 곳이 전혀 없었다.

‘약간 무서운데?’

이현종은 그제야 신현태나 그 전의 자신의 선배들 그리고 교수들이 왜 자신을 보고 괴물이라고 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괴물이 눈앞에 있는 셈 아니던가.

이현종의 머리로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이해조차 가지 않았다.

백번 양보해서 이 분야의 전문가이자 대가로 평생 살아왔다면 또 모르겠지만.

수혁은 이제 겨우 레지던트 1년 차 아닌가.

“네?”

그것도 자신이 조금 빤히 봤다고 바짝 조는, 그런 평범해 보이는 1년 차.

그런데 15분 만에 이런 논문을 쓰다니.

전율이 일 지경이었다.

이현종은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돋아난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어. 이 자식은 진짜 무조건 키워 줘야 해.’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현종이 여느 소인배들과는 사뭇 다른 인간이라는 점이었다.

자라나는 새싹을 밟을 생각을 하기는커녕 키울 생각만이 가득했다.

물론 이미 이현종이 석좌 교수에 오를 만큼이나 연륜도 있고, 나이도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저변에는 역시 이현종의 훌륭한 사람 됨됨이가 깔려 있었다.

“아니, 잘 썼어. 수정도 필요 없겠어.”

“다…… 아니, 감사합니다.”

수혁은 바루다 때문에 하마터면 당연하다고 말할 뻔했으나 어찌어찌 잘 넘어갔다.

[제가 썼는데 수정할 게 있으면 안 되는 겁니다, 수혁.]

바루다는 그사이에도 끊임없이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중이었다.

“역시 이걸 딱 보고 논문 쓸 생각을 한 내가 또 천재지.”

그뿐만 아니라 이현종도 자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이수혁으로서는 한숨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째 주변에 있는 인간이고 깡통이고 죄다 나르시시스트야…….’

[바루다는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 판단으로 이현종도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긴 나도 천재긴 하지.’

[방금 그 발언은 조금…….]

‘뭐?’

[아뇨. 수혁도 똑똑한 편이죠, 네. 그렇다고 칩시다.]

수혁이 바루다에게 한 방 먹는 동안 이현종은 허허 웃으며 해당 파일을 어디론가 보내 버렸다.

수혁이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은 노트북 화면에 웬 인터넷이 창이 뜨고 나서였다.

“어?”

“아. 이거. NEJM에 냈어.”

“네? 학회가 아니라요?”

“누가 학회 발표 신청 원서 내는데 논문 원본을 보내냐. 그냥 한글 초록이나 내면 되지.”

“어…….”

“뭘 그렇게 쫄고 그래. 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어. 되는 게 중요하지.”

이현종은 지금까지 숱하게 NEJM에 논문을 낸 사람답게 수혁의 어깨를 아주 관록 있는 표정으로 두드려 주었다.

그리곤 수혁이 가타부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덕분에 수혁으로서는 그저 이현종이 어디론가 전화 거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어. 나야. 이현종.”

다행히 전화 거는 모습을 봤을 때 NEJM 쪽은 아닌 거 같았다.

그랬다면 영어로 했을 테고, 저렇게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진 않았을 테니까.

“아니, 다른 건 아니고. 요번에 초록 많이들 내?”

“아뇨. 늘 그렇죠, 뭐. 이제 또 푸시 좀 해야죠. 그나마 태화 의료원은 꽤 많이 내긴 했습니다.”

“그래? 이번에 하나 더 내려고.”

“교수님이요? 그럼 저흰 너무 좋죠. 강의로 넣을까요?”

아마도 상대는 이번 학회에서 학술이사를 맡은 교수님 같았다.

‘누구더라.’

[이번 내과 학회 학술이사는 우창윤 교수입니다.]

‘아…….’

공교롭게도 우하윤의 아버지였다.

‘운명인가?’

[우연이죠.]

‘깡통이 인간관계에 대해 뭘 안다고.’

[알 만큼은 압니다.]

둘이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늘어놓는 동안에도 이현종과 우창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아니, 나는 아니고. 우리 전공의.”

“아, 네…….”

우창윤은 이현종이 아니라 전공의의 초록이란 얘기를 듣자마자 확 목소리가 작아졌다.

별로 자기 감정을 숨기거나 하는 타입은 아닌 모양이었다.

“이수혁이라고 아나?”

“이수혁이요? 알죠. 걔 근데 1년 차 아니에요?”

“어. 근데 기가 막혀. 논문 NEJM 될 거 같아.”

“네?”

하지만 수혁의 이름이 거론되자마자 다시금 목소리를 확 키웠다.

기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너무 놀란 듯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1년 차가 학회 발표를 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걸 원장이 직접 알려?

아마 학회 창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아무튼, 그거 초록으로 낼 거니까. 좀 큰 강의실로 잡아 달라고.”

“제목이……. 뭔데요?”

“새로운 관상동맥 해부학적 변이의 확인.”

“새로운? 지금까지 안 나왔던 거에 대한 발표라고요?”

“어.”

“그걸 우리 학회에서 처음 하시는 거예요?”

“어. 그렇긴 한데. 이수혁이 하는 거야. 존댓말 쓸 필요 없는데.”

“아……. 이게 무슨…….”

우창윤은 전화를 끊고서도 한참 동안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요번 태화 의료원에 이수혁이라는 기깔 나는 1년 차가 있다는 거야 예전부터 잘 알고 있기는 했다.

발표도 봤고, 딸한테 전해 듣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수준의 발표를 한다고?

‘아니, 뉘앙스가 이현종 교수님이 아니라……. 이수혁이 논문을 쓴 거 같은데…….’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건가.

도저히 불가능할 거 같은데.

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아선 병원에서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이 뭐가 있지?’

우창윤은 혹시 모르는 일이니 한번 알아나 보자고 결정했다.

바로 그 시각 이현종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혁을 돌아보면서였다.

‘이번 발표하고 나면 난리 나겠지. 얘는 무조건 태화에서 잡는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