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57화 (57/1,303)

57화 학회 (2)

‘병력?’

예전보다 바루다에 대한 신뢰도가 극도로 올라가 버린 수혁이었다.

때문에 진단 자체를 의심하는 대신, 그 진단을 어떻게 내렸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네, 수혁. 환자는 비장 절제술을 시행 받은 병력이 있습니다.]

바루다 역시 예전에 비하면 수혁에 대해 훨씬 더 협조적이었고.

덕분에 둘은 조태진이 전화기를 다시 꺼내 들고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보다 생산적인 대화를 아주 빠르게 이어 나갈 수 있습니다.

‘비장 절제술은 비장이 너무 커져서 제거한 거잖아.’

[그렇습니다. 왜 비장이 커졌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당연히 골수 외의 조혈 작용이 많아져서……. 아니, 잠깐. 골수 외 조혈 작용?’

수혁은 저 혼자 중얼거리다가 유레카라도 외칠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그 표정이 괜히 나온 게 아닐 거라 확신한 바루다는 아주 대견스럽다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제 수혁도 정말 많이 늘었군요. 이 바루다, 감복했습니다.]

‘그래, 그렇네. 결핵은 아무래도 좀 생뚱맞지.’

[네. 아무리 우리나라가 결핵이 많다고는 하지만 결핵을 의심하기엔 근거가 부족합니다.]

기껏해야 예전에 3개월 동안 스테로이드 치료했던 것이 전부 아니던가.

그전에 결핵에 걸렸던 병변이 보인 것도 아니고.

환자 진술상 그 비슷한 병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환자가 가지고 있는 질환을 토대로 이 현상에 대해 풀어 나가는 것이 훨씬 더 논리적이란 얘기가 되었다.

해서 수혁은 나름의 확신을 가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태진이 막 자신의 핸드폰 버튼에 손을 가져가려고 할 때쯤이었다.

“저, 교수님.”

“어 수혁아.”

다행히 조태진과 수혁의 관계는 이보다 좋을 수 없겠다 싶을 정도로 단단한 편이었다.

주로 수혁보다는 조태진 쪽에서 거의 일방적인 구애를 펼치고 있다고 봐야 하긴 했지만.

아무튼, 이럴 땐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수혁은 자신이 감히 교수의 행동을 끊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기만 한 조태진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영상……. 그거 정말 결핵일까요?”

“응?”

조태진은 그게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이 되었다.

아까 그 영상은 상당히 특이적인 모양새를 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니.

이걸 만약 수혁이 아니라 다른 놈이 얘기를 꺼냈다면 화가 불쑥 치밀어 올랐을 터였다.

하지만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조태진은 전혀 화가 나질 않았다.

‘내 심장이 왜 이럴까.’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쩐지 수혁이라면 뭔가 아주 그럴싸한 논리를 들려 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게 설령 정답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커 보였지만.

그래도 좋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해서 조태진 교수는 핸드폰을 다시 호주머니에 넣고는 노트북을 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레지던트들은 전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런 망할. 이수혁 아닌 놈은 서러워서 살겠냐?’

물론 조태진이 그렇게 악마 같은 교수가 아니긴 했더랬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마냥 호구 같은 교수냐고 하면 그건 아니었다.

명색이 혈액종양내과 교수 아닌가.

내과에서도 병마와의 싸움에 거의 최전선을 지키고 있는.

그런 사람이 허허 웃고만 다닌다?

이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저게 나였으면……. 아니, 일단 내 옆엔 안 앉았겠지.’

빈 자리가 드문드문 있는데 뭐 하러 남의 옆에 앉는단 말인가.

괜히 앉아서 얘기 나누다 보면 교수도 열 받을 텐데.

하지만 다행하게도 수혁은 이수혁이었다.

조태진이 총애하는.

“자, 여기. 이거 딱 결핵 같아 보이지 않니?”

조태진은 허허 웃으며 영상을 멈춰 놓았다.

딱 회장 쪽에 여러 분절로 좁아져 있는 부위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서였다.

어찌나 특징적인 소견을 보이고 있는지 바루다나 수혁이 보기에도 결핵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진단명을 떠올린 둘의 눈에는 약간 이상한 점도 보이긴 했다.

“모양은 분명 결핵입니다. 하지만 김인수 선생님이 같이 보내 준 혈액 검사 결과를 같이 보면 확실히 좀 이상합니다.”

“검사? 이거? 뭐……. 염증 수치가 없기는 하지.”

혈액 검사 결과야 아까 조태진도 딱 한눈에 파악해 놓은 참이었다.

국내 제일이라는 태화 의료원에서 내과 교수를 벌써 몇 년이나 해 먹었는데 그걸 못 하겠는가.

“근데 스테로이드를 쓴 데다가, 이 환자 만성 골수섬유증이잖아. 수치가 제대로 나기가 더 어려워.”

거기에 더해 그럴싸한 논리도 쌓아 둔 후였다.

그게 어찌나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수혁은 속으로 바루다를 불러야만 했다.

‘야, 우리 맞겠지?’

[맞습니다. 조태진 교수도 딱 한 마디만 하면 바로 수긍할걸요.]

‘오케이.’

그러나 바루다의 말이 좀 더 믿음직스러웠다.

덕분에 용기를 얻은 수혁은 아까 생각해 두었던 바를 그대로 읊어 대기 시작했다.

“네, 그건 그렇습니다만. 환자의 좁아진 부위를 보면 딱 이 부위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이건 일반적인 결핵과는 다른 소견입니다.”

“그건……. 음. 그렇긴 하지. 근데 결핵은 원래 분절 침범을 할 수 있지.”

조태진은 역시나 수혁의 논리가 단단해서 기분이 좋았다.

‘아닐 거 같은데요’ 하고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하던 레지던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하면 이렇게 토론을 할 수 있는 레지던트의 존재는 거의 가뭄의 단비라고 볼 수 있었다.

“네, 맞습니다. 그런데 이 환자 이 좁아진 분절을 잘 보시면 뭔가 좀 특이하지 않나요?”

“병변이? 병변 자체는 특이할 것도 없어 보이는데.”

“병변 말고 그 병변이 침범한 부위는 어떤가요?”

“부위……?”

조태진은 수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변이 아니라 부위를 보라고?’

처음부터 그런 생각 따위는 단 한 번도 떠올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였을까.

뭔가 놓쳤구나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들었다.

‘뭐지? 얘는 뭘 본 거야 대체.’

이때까지는 교수 입장에서 가르치는 기분으로 떠들어 대고 있었는데.

지금은 후달리기만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총애하는 제자는 무언가를 봤는데, 자신은 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아……. 이거 이게 좀 이상한데?”

다행히 조태진은 실력으로 태화 의료원 내과 교수가 된 사람이었다.

머지않아 이상한 점을 잡아 낼 수 있었다.

“여긴 소화기관 중에서……. 그나마 조혈 작용이 가능한……. 그런 부위잖아.”

“네. 조혈 작용이 가능한 부위가 좁아져 있습니다.”

“그 뜻은…….”

“이곳에서 피를 만들려고 하느라 덩이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 맞네. 이 환자 비장 적출 했지.”

골수섬유증에서 비장 적출술을 하고 나면 골수 외 조혈 작용이 늘어나는 부작용을 겪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백혈병이 동반되는 등의, 보다 더 치명적인 부작용도 있을 수 있긴 했지만.

‘그때……. 괜히 떼자고 했나.’

조태진은 불현듯 당시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마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하진 못할 거 같았다.

김성원의 비장은 괴사 직전에 몰려 있었으니까.

떼지 않았다면 지금껏 살아 있지도 못했을 터였다.

“네. 아마 그래서 환자가 복통만 있고 혈변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결핵인데 이 정도로 좁아져 있다면 반드시 혈변을 동반했을 겁니다.”

“그것도 그렇네. 그래, 이걸 골수 외 조혈 작용에 의한 비대로 보니까……. 혈액 검사 수치도 설명이 돼.”

간혹 피할 수 없는 오진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개 오진을 내릴 땐, ‘아 요건 설명이 안 되는데’라거나 혹은 아예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보면 되었다.

조태진은 아까까지만 해도 설명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싹 설명이 되자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이 맛에 내과 하는 거지. 좋네. 잘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는 무슨. 내가 고맙지. 아, 이번에 내가 발표할 게 아니라, 너한테 하나 줬어야 했는데. 이현종 교수님이 한발 빨라서…….”

조태진은 다시 한번 허허 웃으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레지던트들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대단하긴 하네……. 미친놈이, 저걸 어떻게 진단하는 거야 대체.’

특히 수혁의 동기인 유지상은 질투까지 느꼈다.

그 또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었다.

실제로 꽤 성과를 내기도 했고.

애초에 교수를 꿈꾸며 내과에 들어왔으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수혁을 보듯 지상을 바라봐 주진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상만큼 우수한 레지던트는 매해 있었으니까.

그에 비해 수혁 같은 레지던트는 전무후무한 수준이었다.

“어어, 인수야. 영상 봤는데.”

유지상을 비롯한 다른 레지던트들이 절망감을 맛보고 있는 사이, 조태진 교수는 부리나케 김인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결핵이라고 단정 짓고 뭘 할까 봐.

“네, 교수님. 지금 진통제 드리고 다른 환자 보고 있었습니다.”

물론 김인수는 아주 노련한 레지던트였다.

쓸데없이 서두르거나 해서 일을 망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어, 그래. 잘했어. 그 영상 보니까 결핵은 아닌 거 같아서.”

“네? 결핵이 아닌가요?”

“응. 여기 수혁이 있어서 같이 봤거든. 수혁이가 환자 비장 적출한 거랑 지금 병변 부위가 좀 연관성이 있을 거 같다고 해서 봤더니 말이야.”

“아, 네. 수혁이…….”

김인수는 수혁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눈에 띄게 풀이 죽은 목소리가 되어 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은 딱 2년 차이를 두었을 뿐인데 그 능력은 압도적이지 않은가.

벌써 위에서는 수혁은 마침 군대도 안 가니 바로 교수로 발령 내자는 얘기까지 돌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김인수가 교수가 될 가능성이 훅 떨어진다는 뜻이었다.

물론 조태진은 그런 사소한 감정까지 고려할 사람은 아니어서 그냥 자기 하고픈 말을 죽 이어 나갔다.

“골수 외 조혈 작용으로 보여, 원인이. 그……. 그래. 엑스트라메듈러리 헤마토포이에시스(Extramedullary hematopoiesis) 말이야.”

“아? 아……. 네네.”

“그래. 너도 들으니까 딱 오지?”

“네.”

김인수는 솔직히 100% 다 이해가 간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아는 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야 1년 차에게 훅 뒤처지는 3년 차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 그렇다니까. 그럼 치료는 알지? 그렇게 해 줘.”

문제는 조태진은 그런 김인수의 속내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해서 치료를 어떻게 하라고 말해 주는 대신 그냥 알아서 하라는 지시를 내리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하, 시발 좆됐네?”

김인수로서는 진짜 큰일 난 셈이었다.

말하는 거로 봐서는 적어도 이 증상에 대해서는 치료법이 명확해 보이지 않는가.

그런데 김인수는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어쩌지……. 스테로이드를 때려? 아니지. 그랬다가 사고라도 나면……. 하……. 아는 척하지 말걸.’

맨날 아래 연차들한테는 ‘눈앞에서 안 혼날 생각하다가 사고치지 말라’라고 해 놓고선.

동일한 실수를 한 셈인지라 속이 무척 답답했다.

우우웅.

그때 그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혹시 조태진인가 싶어 얼른 들어 보니, 이수혁이었다.

전화도 아니고 문자였다.

<선생님. 교수님이 방사선 치료 어레인지 하라고 말씀 주셨습니다.>

문자를 읽자마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새끼…….’

김인수가 3년을 내과에 있었는데 조태진 성격 모르겠는가.

이 사람은 절대 이렇게 문자로 다시 한번 연락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 말은 곧 수혁이 알아서 문자를 보내 줬다는 뜻이었다.

다행히 김인수는 김진용과는 많이 달라서, 은혜를 고깝게 여기는 대신 고마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 너 교수 해라……. 너 같은 놈이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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