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발표 (1)
부우웅.
버스는 곧 청주 라마다 호텔 로비에 멈춰 섰다.
“끄아아압.”
동시에 환자를 해결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져 쿨쿨 자고 있던 조태진이 기지개를 켰다.
의자에 잔뜩 눌린 머리카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세게 눌린 머리만큼이나 얼굴은 개운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학회 시작 시간 전에 청주까지 오기 위해 병원에 무려 5시까지 출근해서 일을 마치고 온 참이었으니까.
[조심스럽게 코골이에 대해 수면 다원 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유하시지요.]
그에 반해 수혁은 정말이지 피곤해 보였다.
조태진이 그야말로 버스가 떠나갈 정도로 코를 골아 댔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귀를 막고 자 볼까 하는 생각도 하긴 했지만.
아예 옆자리에 있는 터라 그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야겠어. 앞에서 볼 땐 몰랐는데 옆에서 보니까 일단 아래턱이 좀 들어가셨네.’
[바로 누워서 자면 수면 무호흡도 거의 중증도 이상 수준으로 관찰될 겁니다.]
‘근데 이걸 어떻게 말하냐고.’
대놓고 가서 ‘교수님 진짜 코 많이 골던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해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이제 완전히 잠이 깨 버린 조태진이 호텔을 보며 중얼거렸다.
“어우. 청주는 오랜만이네.”
그리곤 수혁을 바라보았다.
대화를 좀 하자는 뜻인 듯했다.
수혁으로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제스처였다.
해서 대강 대꾸를 하기로 했다.
“아……. 교수님은 오신 적이 있으세요?”
“어. 춘계는 맨날 서울에서 하니까. 추계는 돌아가면서 열거든. 근데 이번엔 충북대 측에서 요청이 있어서 아마 학회 진행을 우리 병원에서도 좀 도울 거야.”
“아, 그렇군요.”
학회 진행이란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잡일이었다.
학회를 듣기는커녕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발표자 챙기고 시간 챙기는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걸 맡게 되어서 그런가 세 번째 버스 안에 있던 레지던트들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돈 조금만 더 쓰면 그냥 아르바이트라도 구할 수 있을 텐데.
아직도 학회 높으신 양반들의 생각은 ‘왜 굳이 레지던트가 있는데 돈을 쓰지?’에 사로잡혀 있었다.
“일단 내리자.”
“네.”
“너 이따 몇 시에 어디서 발표지?”
“저 11시 반 그랜드볼룸입니다.”
“이야 제일 사람 많은 시간에 제일 큰 강의실이네. 그때 보자.”
“네, 교수님.”
조태진은 버스에서 딱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부리나케 사라져 버렸다.
조태진 교수쯤 되면 학회란 곳이 그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라, 일종의 사교 장소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간 여기저기 흩어져 있느라 얼굴도 못 본 동기들도 궁금했고, 또 선배 교수님들에게 인사드릴 일도 급했다.
‘흠.’
반면 고작해야 1년 차인 수혁은 상대적으로 여유롭기만 했다.
‘11시 반 발표고. 그랜드볼룸.’
사실 대단히 이상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메인 강의실에서 메인 시간에 강의하게 되어 있다면.
레지던트가 아니라 교수라 해도 어지간히 떨릴 테니까.
그렇지 않겠는가.
수백 명의 청중을 두고 발표를 해야 하는 상황 아닌가.
그 청중이 일반인들이라 해도 떨릴 텐데, 교수들을 비롯해 죄다 전문가들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공격이 들어올지 알 수가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어디 자리 잡고 달달 외우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럼 한 11시쯤 들어가면 되겠군요.]
‘그렇겠네.’
하지만 수혁이나 바루다나 별로 후달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 수혁이 이따 발표 잘해라.”
심지어 그 발표의 교신저자를 맡고 있는.
그러니까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이현종도 심드렁하기만 했다.
딱 학회장에 오기 전날까지는 그렇게 사람을 들들 볶더니, 이제는 됐다고 여기는 건가 싶을 지경이었다.
“아, 네. 교수님.”
“이왕 학회 왔으니까. 너무 발표 준비만 하지 말고 가서 다른 강의도 좀 듣고 그래.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렇게 이현종까지 떠나보내고, 본격적으로 강의를 들어 볼까 하려는 찰나에 누군가 또 수혁에게 다가왔다.
뒤를 돌아보니 황선우였다.
2년 차 황선우.
이제 곧 3년 차들이 전문의 시험 공부를 위해 나가면 제일 높은 연차가 되건만.
여전히 공부 안 하고 뺀질거리고 있더니 슬슬 1년 차한테도 퍼포먼스가 밀리고 있는 와중이었다.
수혁에게는 거의 뭐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보면 되었다.
“아, 선생님.”
물론 그런다고 연차가 뒤바뀌는 건 아니었기에 수혁은 최대한 깎듯이 고개를 숙였다.
[맨날 욕하면서 앞에서는 잘하는군요.]
‘그러면 앞에서도 욕하리?’
[아뇨. 잘하고 계신다고요. 칭찬과 격려 중입니다.]
‘칭찬과 격려는 개뿔…….’
수혁이 바루다와 속으로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황선우가 입을 열었다.
“너 설마 진짜 벌써 강의 들으러 가는 건 아니지?”
뭔가 좀 아니꼽다는 어투가 분명했다.
수혁은 이 자식이 왜 이러나 싶었지만, 얼굴은 웃는 낯을 유지했다.
[대단합니다. 감정하고 표정을 아예 따로 놀리다니.]
바루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평소 같았으면 수혁도 가만있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대화 중 아닌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원장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요.”
“원장님은 우리가 뭐 하는지 모르니까 그러시고. 1년 차가 무슨 학회 강의야.”
“어…….”
“그런 표정 짓지 말고. 발표 있는 건 알고 있으니까. 이따 보내 줄게.”
“아, 네.”
솔직히 황선우로서는 이만하면 많이 봐주는 셈이었다.
성질대로 했다면 벌써 정강이 한 대 정도는 날렸을 테니까.
‘죄다 싸고도니 뭐 어쩌겠어…….’
하지만 이수혁을 건드린다는 것은 곧 이현종이나 신현태 등에게 개기는 것과 같은 일이 되어 버린 지금이었다.
해서 원래는 이수혁은 그냥 열외로 두자는 의견도 있긴 했더랬다.
하지만 이제 학회만 끝나면 현재 3년 차들에게 그 지위를 양도받아야 하는, 새로운 치프 연차인 2년 차들은 아무리 그래도 권위를 보여 주긴 해야 한다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일단 가서 3년 차 선생님들 것까지 해서 이름표 받아야 하니까. 줄 서 있어. 그거 받고 분배까지 끝나면 그랜드볼룸 안내 맡고. 그러다 발표 시간 되면 발표하러 들어가면 되는 거 아냐. 안 그래?”
“아……. 네. 선생님. 알겠습니다.”
수혁이 만약 좀만 더 싸가지가 없었다면 아마 여기서 바로 이현종에게 전화를 걸었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그렇게 하는 대신 지팡이를 부지런히 놀려 가며 학회 접수처로 향했다.
별로 마음이 불편하거나 짜증이 나지도 않았다.
[일단 가죠. 가서 그랜드볼룸 앞에 서 있으면, 일하고 싶어도 못할 겁니다.]
이미 바루다가 싹 계산을 끝내 놓은 덕이었다.
‘그래, 굳이 뭐 대립각 세워서 뭐 해. 나중에 계속 같이 일할 수도 있는데.’
[황선우는 아마 아닐 거 같긴 하지만. 윗사람들한테 들이받는 이미지로 보여서 좋을 건 없죠.]
‘그건 그래.’
수혁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김진용을 떠올렸다.
지금 와서 돌이켜 봐도 딱히 자신이 잘못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지만.
그런데도 몇몇 교수들이나 다른 3년 차 중 일부는 도리어 수혁을 탓하고 있었다.
[저기군요. 이른 시간인 데다, 청주인데도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부지런히 발을 놀리다 보니, 어느새 호텔 2층에 놓인 학회 접수처 앞이었다.
바루다의 말대로 정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대개는 젊디젊은 의사들이었는데, 아무래도 레지던트들 같았다.
‘가서 태화 의료원이라고 하고 레지던트들 이름표 받으면 되겠지.’
[네. 그런데 이걸 왜 각자 안 하고 1년 차 혼자 해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나마 수혁은 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다른 1년 차 동기들은 벌써 강의실마다 사진기를 들고 배정되어 있었다.
강의 장면을 사진으로 담기 위해서였는데.
그 외에도 마이크를 옮기거나, 시간에 맞춰 종을 쳐야 했고, 컴퓨터, 음향 에러 등도 일차적으로 도맡아야만 했다.
돈 다 내고 공부하러 와서 잡일이라니.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내가 이러려고 의사가 됐나’ 싶은 순간이었다고 들은 바 있었다.
‘악습이지. 이런 거 다 없애야 해.’
수혁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일단 맡은 바 일은 해 내었다.
도리어 몸 성한 다른 레지던트들보다도 훨씬 빨랐다.
아무래도 지팡이를 짚고 있으니 다들 알아서 비켜 준 덕이었다.
“일 잘하네. 자, 그럼 저기 앞에 가서 안내 맡아.”
황선우는 일단 수혁이 자신의 말을 들었다는 거 자체가 기쁜지 씨익 웃으며 그랜드볼룸 쪽을 가리켰다.
워낙 큰 강의장이라 그런지 입구 쪽에도 사람이 정말 많이 서 있었다.
어지간한 교수들은 다들 한 번씩 들렀다 가는 모양인지 서 있는 사람 대부분이 교수들로 보였다.
“네.”
“여기 지상이랑 같이 가. 입구 크니까, 자리 안쪽부터 채우도록 하고. 사진은 각자 양쪽에서 찍어. 알았지?”
“네, 선생님.”
수혁은 같은 과임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동기 지상을 돌아보았다.
‘좀 말랐나?’
[내과 1년 차가 만만한 건 아니죠.]
수혁이 그렇게 지상을 찬찬히 뜯어 보는 사이, 지상은 미리 들고 있던 사진기 중 하나를 수혁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거.”
수혁은 나름 반가운 기분이 드는데 지상은 그렇진 않은 모양이었다.
뭔가 좀 데면데면한 느낌이었다.
‘오랜만이라 그런가.’
수혁은 그렇게 받아든 사진기를 목에 걸면서 입을 열었다.
“어, 어. 그래. 지금 어디 도냐?”
“감염.”
“아……. 신현태 과장님 주치의야?”
“어.”
“교수님 잘해 주시지?”
“내가 너냐. 잘해 주게. 죽도록 안 혼나면 다행이지. 아무튼, 내가 저쪽 맡을 테니까 네가 여기 맡아.”
“어……. 그래. 그러지 뭐.”
의외의 반응에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곤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왜 저래?’
의문을 표하자 바루다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꾸해 주었다.
[유지상 집안이 꽤 좋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긴 하지. 근데 그거랑 이거랑 뭔 상관이여.’
아마 다른 병원 교수님 아들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로열까지는 아니더라도 수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집안이라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본인도 나름 그걸 어필했었기 때문에 똑똑히 기억났다.
[교수를 꿈꾸고 있었다고도 들었고요. 아마 들어오기 전에는 어느 정도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겁니다.]
‘지금도 꿈꾸면 안 되나?’
[그런 의미에서 보면 수혁이 너무 강력한 라이벌이죠. 달가울 리가 없을 겁니다.]
‘아……. 뭐……. 그야 내가 널 가져서 그렇게 된 건데.’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운도 실력이니까요. 그리고 뭐.]
바루다는 수혁의 머리가 상당히 우수한 편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주변에 있는 인간들이 모조리 칭찬만 해 대고 있는 상황 아닌가.
여기서 바루다까지 칭찬을 했다간 어쩐지 큰일 날 것 같았다.
그리고 바루다의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아, 이수혁이. 오랜만이네?”
일단 저기 아선 병원의 우창윤이 먼저 수혁에게 다가왔다.
“아, 우창윤 교수님.”
“하윤이한테 들었어. 강의도 잘한다며?”
“아……. 그건 뭐 우연히…….”
“오늘 발표할 것도 초록 보니까 장난 아닐 거 같던데. 기대해도 돼?”
“열심히……. 준비하기는 했습니다.”
“그래. 발표 끝나면 점심이나 같이 먹자고.”
“네. 네?”
“약속했다?”
그렇게 우창윤이 사라지자 또 다른 교수가 다가왔다.
칠성 병원 내과 과장 박국진이었다.
이미 이현종이 심혈을 다해 키워 낸 주니어 스태프 하나를 10억에 데려간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아, 이수혁 선생?”
그는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마치 헤드헌터와도 같은 얼굴로 수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수혁으로서는 다른 병원 과장이라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칠성 병원은 국내 빅 3 중 하나였으니까.
“아, 박국진 교수님.”
“오……. 이름까지 기억해 주고. 영광인데?”
“아, 아닙니다.”
“오늘 발표 기대되던데.”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래. 발표 잘 지켜볼게. 이따 점심이나 먹자고.”
“네. 네?”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