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발표 (2)
[수혁, 벌써 다섯 명째입니다.]
우창윤, 박국진 외에도 수혁에게 밥 먹자고 제의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모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큰 병원의 교수였고, 그 병원 내에서의 입지도 상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인물들이 관심을 두고 있다니.
이제 겨우 1년 차 가을밖에 안 된 수혁으로서는 다소 황당할 지경이었다.
‘아니……. 내가 뭐라고…….’
[바루다의 유일한 입출력자지요. 자부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수혁.]
‘그건 그냥 네 자랑 아니냐?’
[자랑할 만하다고 판단합니다.]
‘그래…….’
어째서 자신의 주변에는 이현종이나 바루다 같이 자기 자랑이 심한 존재들뿐인 걸까.
수혁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나 안내 맡았는데.’
그러다 문득 자신이 가장 큰 강의실, 즉 그랜드볼룸의 안내를 맡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해서 주변을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꽤 혼란스러웠다.
거의 혼자 안내를 도맡다시피 하게 된 유지상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었다.
하지만 강의가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제대로 푸시를 못 한 까닭이었다.
‘아이고. 지금이라도…….’
해서 수혁이 좀 거들어 주기나 할 요량으로 지팡이를 짚었는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신현태였다.
“아, 과장님.”
“우리 수혁이. 이따 발표지?”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럼 뭐 하고 있어. 빨리 들어가서 자리 잡아야지. 자자. 내가 팔짱 끼워 줄게, 발표자는 원래 맨 앞에 앉는 거야.”
“어…….”
수혁은 신현태 과장에게 질질 끌려가기 시작했다.
신현태는 내과 의사 중 보기 드물게 건장한 체격이었고, 수혁은 한쪽 다리가 불편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입까지 틀어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 과장님.”
“왜?”
“저 여기 안내를 맡았습니다. 아직은 자리를 비우기가…….”
“어? 안내? 아니 무슨 발표자가 안내를 해. 발표 후면 몰라. 누가 시켰어?”
수혁은 잠깐 고민했다.
이게 어쩐지 고자질을 하는 모양새가 될 거 같아서였다.
‘하여간 너무 관심이 많으셔서…….’
그냥 좀 조용히 하라는 일을 하다가 들어가고 싶었더랬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 정도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랜드볼룸은 일종의 사교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은가.
거기 앞에 수혁이라는 핫한 사람을 꽂아 놨으니 누구의 눈에라도 띄는 것이 정상이었다.
“답하기 곤란해? 뭐 하긴 그렇긴 하지. 너 워낙 착해서…….”
신현태는 고민에 빠진 수혁을 두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 수혁이는 착해 빠졌는데, 위 연차 놈들이 나쁘다는 식의 결론이었다.
다분히 편파적인 생각이었으나 그 누구도 불만을 갖기 어려운 생각이기도 했다.
신현태는 현재 내과 내에서 이현종만 제외하면 일인자였으니까.
더구나 이현종도 과 내의 일에서는 신현태에게 져 주는 편이었으니, 그냥 왕이라고 보면 될 정도였다.
“이따 만찬에서 혼 좀 내야겠네. 아무튼, 우리 수혁이는 들어가자. 어차피 다들 의사라 사실 안내 그렇게 필요도 없어. 듣고 싶으면 알아서 들어오겠지.”
“어…….”
“가자니까? 발표가 제일 중요해. 알지? 이현종 원장님 벌써 안에 들어간 거. 아마 제일 중앙 앞자리에 앉아 있을걸?”
“아.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수혁은 계속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는 시늉을 하고 있었지만.
이현종 이름이 나오자마자 곧장 신현태를 따라서 안으로 향했다.
황선우와 이현종, 둘 중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지는 너무 명확한 사실 아니던가.
솔직히 황선우 정도는 그냥 젖혀도 괜찮을 수도 있을 터였다.
지금의 수혁은 교수 대부분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인재니까.
하지만 이현종의 눈 밖에 나면 과연 어찌 될까.
모르긴 몰라도 병원 생활 고달파지는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타닥.
타닥.
해서 수혁은 지팡이를 부리나케 짚어 가며 맨 앞자리로 향했다.
“뭐야? 다리 다쳤나?”
“몰라. 처음 보는 앤데. 다른 데 레지던튼가 보지.”
“아……. 시끄럽게. 빨랑빨랑 좀 다니지.”
“그러니까.”
아직 수혁을 모르는 이들에게서 불평이 흘러나왔다.
아마 아예 다리를 잘 못 쓰는 상황이란 걸 알았다면 그나마 덜 했을 터였다.
하지만 대부분 수혁이 그렇다고는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다른 직장보다 오히려 신체적으로 불편함이 있는 동료와 일해 본 경험이 적어서였다.
딱히 수술하는 과가 아니더라도, 의사들, 특히 대학 병원 의사들의 업무 강도는 어마어마하지 않던가.
슬프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빨리 고치긴 해야겠군요.]
‘방법이 생기긴 할까?’
[아직은 무리입니다만. 신경 재생 쪽 연구가 활발하다는 건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긴 하지. 하지만…….’
확실히 최근 리딩 연구를 보면 신경에 관한 연구가 아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한창 줄기세포 얘기 나오고 할 때만큼은 아니긴 했지만.
[정 안 되면 로봇을 활용하는 방안도 있기는 합니다.]
‘그것도 있긴 하네. 아, 다 왔다.’
수혁이 제아무리 천진하고 밝은 편이라고는 해도.
누군가 자신의 장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는가.
그러다 보니 정신이 없어서 맨 앞에 도착했다는 것도 잠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발표가 보고 싶니? 그래도 앉자, 수혁아.”
“아, 네.”
물론 신현태는 그런 수혁이 너무 이뻐 보이기만 했다.
해서 제멋대로 수혁이 발표가 보고 싶어서 서 있었던 거로 단정을 지어 버렸다.
뒤에 있던 조태진도 마찬가지였다.
“어이구, 우리 수혁이. 미안하다. 나도 좀 봐야 해서.”
“아, 아닙니다. 교수님들…….”
더구나 이수혁이라는 이름이 주변으로 번지자, 다른 교수들까지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얘가 이수혁이야? 얼굴 좀 봐 봐.”
“얘기 많이 들었어요. 이현종 원장님이 하도 자랑을 해서…….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반가워요.”
“인물도 훤하네.”
“이따 발표 기대할게요.”
다들 수혁의 이름을 한 번은 들어봤기 때문이었다.
워낙 이현종과 신현태가 학회 내에서 마당발인 것도 있고, 또 모일 때마다 자랑을 늘어놓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휴. 교수님들…… 감사합니다.”
수혁으로서는 황송할 따름이었다.
그 후로도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가, 신현태 과장에게 좌장 자리에 앉아 있던 교수 번호로 전화가 오고 나서야 잦아들었다.
“조용, 조용히 하시랍니다.”
“아, 맞아. 발표 중이지. 죄송합니다. 네네.”
해서 수혁은 겨우겨우 앞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좌장과 눈이 마주쳤는데, 표정이 그렇게 좋지만은 못했다.
아무래도 이 소란의 원흉이 수혁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
[걱정 마십시오. 발표는 완벽할 겁니다.]
‘그야…… 그렇지.’
좌장의 미움을 발표 시작하기도 전에 샀다는 건 물론 별로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자신이 있기는 했다.
“뭐 더 안 봐도 돼?”
수혁이 그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앉아만 있자 신현태가 질문을 던져 왔다.
아무리 준비를 열심히 했다고 알고 있기는 해도 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천재 코스프레 좀 하시죠.]
그런 신현태의 표정을 읽어 낸 바루다가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천재로 이미지 굳혀 가고 있는 상황 아닌가.
그걸 좀 더 단단하게 가져가는 게 좋으면 좋았지 나쁠 거 같진 않았다.
“머릿속으로 보고 있습니다.”
해서 수혁은 자신의 이마를 콩콩 두드리며 씨익 웃어 보였다.
[이렇게까지 할 게 있나요?]
바루다는 좀 과하단 생각이 들었지만.
콩깍지 제대로 쓰인 신현태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뒤에 있던 조태진에게도 마찬가지였고.
“야…… 역시. 나는 감히 상상이 잘 안 가네.”
“머릿속으로 막 넘어가니 그럼? 화면이?”
“네. 정확히 시간도 계산 중입니다.”
“햐…… 부럽다. 나도 그런 머리 있으면 좋겠네.”
“그러니까요. 와…… 천재는 좋겠어.”
“아뇨, 뭐. 그 정도는 아닙니다.”
수혁은 바루다를 얻기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던 경지에 있던 두 교수가 자신을 보며 감탄하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요? 이왕 시작한 거 논문도 막 달달 외워 주시죠. 중얼중얼하면 엄청 놀랄 거 같은데.]
‘아니……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자.’
[잘만 하시던데.]
‘반응 보니까 좀 잘못한 거 같아.’
[아, 이제 슬슬 준비하시죠.]
‘시간 됐나?’
[네. 곧 나가야 할 거 같습니다.]
해서 앞을 보니, 과연 바로 저번 차례 강연자가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새파란 수혁과는 달리 제법 나이가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긴 그랜드볼룸, 메인 강의실이었으니까.
구석진 데서 발표자들만 가지고 진행되는 작은 강의실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발표자는 태화 의료원 어…… 아, 내과 레지던트…… 1년 차. 1년 차 맞습니까?”
그래서 좌장도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분명 사전에 전달이 되었을 테지만.
좌장씩이나 맡는 노교수들이 어디 미리 들여다보았겠는가.
특히 지금 좌장을 맡고 있는 교수는 이제 곧 퇴임을 앞두고 있는, 거의 원로였다.
“맞습니다, 김경래 교수님.”
이현종마저 손을 들고 공손히 답을 해 주어야 할 정도로 나이가 많았다.
“1년 차 발표를 그랜드볼룸으로 잡았어?”
김경래 교수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표정을 구겼다.
그러자 이현종 근처에 앉아 있던, 이번 학회의 학술 이사를 맡고 있던 우창윤 교수가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아, 네. 교수님. 발표 제목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주제가 굉장히 좋습니다.”
“좋아도 그렇지…… 1년 차 발표 좌장을 나를 시키면…….”
“그…… 지금 일정이 정해져 있어서…… 일단은 진행을 좀…….”
“알았어, 알았어. 어…… 그래. 음.”
김경래 교수는 여전히 언짢은 얼굴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본분을 아예 잊어먹지는 않았다.
제아무리 원로라고 해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학회 회원들이 수백 아니던가.
그들을 하염없이 기다리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 태화 의료원 내과 1년 차 이수혁 선생의 발표입니다. 나오시죠.”
“네. 교수님.”
해서 아까부터 대기 타고 있던 수혁은 그제야 지팡이를 짚은 채 앞으로 나올 수 있었다.
원래 같았으면 수혁과 같은 1년 차가 굴러 나오든 어떻게 나오든 별 반응이 없을 테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신현태, 조태진이 앞다투어 수혁을 부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보면 시종 둘이 황제를 호위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야? 뭔데?”
“1년 차가 뭐 저렇게 대우를 받냐. 태화 의료원 내과 빵꾸 났나?”
“이상하네…….”
아무튼, 회원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이 수혁은 무사히 강단 위에 설 수 있었다.
두 교수는 화이팅 포즈를 쥐어 주고는 아래로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이수혁입니다.”
수혁은 그런 둘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가 앞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차분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었다.
도저히 1년 차라고 보기 어려운 여유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삐딱하게만 바라보고 있던 김경래 교수가 안경을 고쳐 쓸 정도로 인상 깊은 태도였다.
‘뭐야?’
수혁은 그런 김 교수를 뒤로하고 화면을 넘겼다.
<새로운 관상동맥 해부학적 변이의 확인>
그러자 다소 건방진 제목이 떴다.
수혁은 그 제목을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는 재차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목보다도 더 건방진,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럴 만한 생각을 하면서였다.
‘이제부터 들어야 할 강의는 다들 달달 외워야 할 내용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