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국보급 인재 (1)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잘하네…….’
방금 김경래 교수의 어깨를 두드렸던, 추계 학회의 학술이사를 맡고 있는 우창윤 교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러면 진짜 아선 병원으로 데려와야 하나?’
약간 켕기는 생각이 들다 보니 자연스레 고개가 이현종과 신현태를 향해 돌아갔다.
원래도 수혁에게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이번 발표를 통해 관심을 넘어 흑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뭘 제시하지?’
하지만 미안함은 잠시뿐이었다.
이현종이나 신현태나 좋은 동료긴 하지만 같은 병원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우창윤 교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역시나 아선 병원이었다.
병원이 커야 안에 있는 교수들에 대한 대접도 달라진다는 것을 지난 세월 뼈저리게 느껴 온 참이었다.
‘역시 10억이다.’
반면 칠성 병원의 박국진 교수는 이미 마음을 굳힌 상황이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좀 우스운 일이긴 했다.
수혁이 아무리 우수해 봐야 1년 차였으니까.
하지만 반대로 보면 1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이지 않은가.
좀만 더 크면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나라 최고의 의사가 되리란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수혁아. 일단 지금 나가자.”
신현태는 사방에서 번쩍이는, 마치 하이에나를 연상케 하는 눈빛을 곧장 알아차렸다.
만약 걸음이 느린 수혁을 점심시간 때까지 여기에 두었다간 갈기갈기 찢길 거 같았다.
물론 신현태의 심정이 그렇다는 뜻일 뿐,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할 리는 없겠지만.
“지금요?”
“그래, 지금.”
“아……. 네.”
아무튼, 수혁은 신현태와 함께 천천히 강의장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머릿속으로는 아까 자신과 점심 약속을 해 댔던 교수들이 돌아다니고 있긴 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다른 병원 교수들 싹 다 모아 봐야 지금의 수혁에 미칠 영향만 보면 그의 손을 잡아끌고 있는 신현태 하나를 못 당할 텐데.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그렇게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입구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아보니 우창윤 교수였다.
신현태는 정말로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학술이사가 그랜드 볼룸 강의 중간에 이렇게 막 나와도 되나?”
“김경래 교수님이 좌장인데요, 뭐. 별일 있겠습니까?”
하지만 막상 우창윤 교수가 김경래와 같은 원로를 팔자 딱히 더 할 말을 찾긴 어려웠다.
잠시 신현태가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우창윤 교수가 수혁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수혁 선생. 이따 점심 약속 안 잊었지?”
“저, 점심은 무슨! 나랑 먹을 거야!”
점심이라는 단어에 신현태가 발작하듯 외쳤다.
“무슨 소리야, 나랑 먹기로 했는데?”
그런 신현태에게는 천만뜻밖이게도 같이 발작하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우선 칠성 병원의 박국진이 그러했다.
“뭐, 뭔 소리야. 너는 또.”
해서 이렇게 물으니, 박국진 교수가 허허 웃어 보였다.
“뭔 소리긴. 앞으로의 장래를 좀 얘기해 보고자 약속을 잡았다 이 말씀이지.”
수혁을 향해 자신의 호주머니를 드러내 보이면서였다.
호주머니에는 흰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는데, 칠성 그룹의 마크가 선명하게 박혀 있는 봉투였다.
‘뭐, 뭐가 든 거지?’
당연하게도 수혁의 관심은 그리로 쏠렸다.
예전 같았으면 속물이네 뭐네 했을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돈……. 아니겠습니까? 칠성 그룹이 엄청 큰 기업이라면서요.]
‘큰 기업일 뿐이냐? 세계적인 기업이지. 나한테도 10억 제시하려나?’
태화 그룹 또한 커다란 기업이기는 했다.
하지만 칠성에 비하면 아무래도 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아직 태화 의료원이 칠성 병원 위에 있는 것은 단지 그 역사가 짧아서이지, 기업의 후광이 딸려서가 아니란 뜻이었다.
“자, 장래를 왜 그쪽이랑 상의해! 우리 수혁이가!”
“우리 수혁이? 아빠야?”
“아빠는……. 아니지.”
“그럼 좀 빠져 주셔.”
“그래도 안 돼. 안 돼!”
신현태는 마치 누가 자기 자식 뺏어 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악했다.
그 모습을 본 다른 병원 레지던트들이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저 점잖은 교수님이 저 난리를 치네…….”
“아까 못 봤냐? 나라도 욕심나긴 하겠더라. 1년 차라니…… 위 연차들 심정이 어떨까.”
“아……. 그러고 보니까 들은 기억 난다. 안에서도 편애 쩐다는데.”
“근데 뭐…… 어쩌겠어. 편애 안 하게 생겼냐…….”
“하긴.”
물론 대부분은 신현태를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그렇다고 다른 병원 교수들이 봐주진 않았지만.
“신 과장, 그럼 뭐 이수혁 선생한테 지금 당장 교수 자리 약속할 수 있어? 자리 있냐고.”
특히 10억을 품에 안고 있는 남자, 박국진이 그랬다.
신현태는 난데없는 그의 교수 T.O 공격에 몹시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뭐……?”
“교수 자리 약속되냐고.”
“다, 당연하지. 펠로우 남으면 안 되겠어? 이렇게 우수한데?”
“이러니까 태화 의료원이 요새 주춤하지.”
박국진은 손가락을 휘휘 저어 대고는 수혁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박국진이 얼마를 제시할까 궁금해하던 수혁은 엉겁결에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이수혁 선생. 우리 칠성 병원은 원하는 분과 교수 자리 바로 줄 수 있어. 펠로우 없이, 석·박 과정 입학만 하면 돼. 물론 전액 장학금!”
이 말은 ‘지금까지 칠성 병원에서 펠로우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젖힌다’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형평성 따위는 개나 주겠단 소리였는데, 당연하게도 수혁에게는 아주 솔깃한 제안일 수밖에 없었다.
세상에 펠로우 과정도 없이 교수라니.
수십 년 전에나 있을 법한 얘기 아니던가.
마치 회귀를 한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어어! 당신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물론 신현태에게는 악몽 같은 말이었다.
특히나 방금 이수혁의 눈동자가 번뜩인 것을 두 눈 똑똑히 봤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해서 보통 의사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인 ‘책임질 수 있냐’ 하는 말로 공격했다.
제발 뜨끔 하는 척이라도 하길 빌면서.
하지만 박국진은 여전히 당당했다.
“이사회 통과된 내용인데?”
“이사회……. 박국진 너 설마 프락치 심어 놨어?”
이사회는 그저 교수 의견만 듣고 일을 집행하는 순진한 집단이 아니었다.
그들을 움직이려면 객관적인 자료가 필요했다.
그런데 이사회가 통과됐다고?
그 말은 지금까지 수혁이 진단해 온 수많은, 골 때리는 케이스를 이사회가 받아 보았다는 뜻이었다.
“프락치라니…… 말이 심하네. 그냥 뭐……. 동료지.”
“동료는 개뿔…….”
신현태는 사무치는 배신감에 박국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교수가 이수혁 쟁탈전에 참가 의사를 밝혀 왔다.
“우리 아선 병원도 교수 자리 확보할 거야. 내가 내 자리 걸고 맹세할게.”
바로 우창윤이었다.
“너, 너!”
“뭘 너야. 억울하면 너도 자리 거시든지.”
그는 신현태의 삿대질을 웃음으로 넘길 수 있는 인간이었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반응에 신현태는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아니, 숨이 막히는 듯한 기분까지 들 지경이었다.
해서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우창윤은 그런 신현태를 승리자의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자리도 못 걸면서 무슨……. 우리 수혁이 타령…….”
“그 자리, 내가 걸지. 교수 받고 원장 콜. 원장 아닌 놈들은 다 꿇어.”
그러나 말을 끝맺지는 못했다.
신현태의 구원자가 나타났으니까.
태화 의료원의 영원한 기인 이현종이.
“아니……. 무슨 원장직을 걸어요.”
그의 말에 우창윤과 박국진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미친 사람 아닌가.
원장직을 걸다니.
하지만 이현종은 진지했다.
“너희가 먼저 시작한 거 아냐? 어디서 감히 우리 수혁이 빼가려고. 저들 멋대로 점심 약속을 잡고 말이야. 어?”
전에도 수혁의 우수함은 잘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같이 발표 준비를 하면서 더더욱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얘는……. 국보야 국보…….’
앞으로 태화 의료원이 칠성 병원이나 아선 병원 같은 무서운 후발 주자들에게 잡히지 않으려면.
더 나아가 세계적인 병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우수한 의사 백 명보다는 수혁처럼 괴물 같은 놈 하나가 더 중요했다.
해서 이현종은 수혁을 자신의 품 안으로 훅 끌어당기며 말을 이었다.
“누구라도 손 하나만 대 봐, 아주! 나랑 싸우는 거야 그날로!”
마치 장난감 뺏기기 싫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어린아이처럼 목소리도 커다랬다.
약간 지나치다 싶을 정도였다.
“뭔 일이래…….”
“사랑싸움 났나?”
그 바람에 다른 강의실에 있던, 사정을 모르는 다른 교수들이나 레지던트들까지 우 몰려들었다.
이수혁을 끌어들이고는 싶지만, 이현종처럼 뻔뻔하지 못한 신현태는 그만 뒤로 한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시선조차 반대로 돌리면서였다.
‘이, 이현종 파이팅…….’
남몰래 응원하긴 했지만.
아무튼, 남들이 보기엔 이제 이 싸움의 구도는 이현종 대 박국진, 우창윤이 된 셈이었다.
“아니, 이현종 교수님. 그런 게 어딨어요. 막말로 교수님이 이수혁 선생 아빠도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이사회의 허락까지 다 받아 둔 박국진이 먼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요! 무슨 자격으로 이러는 겁니까?”
그 말이 꽤 신빙성 있다고 여긴 우창윤 교수도 가세했다.
그리고 그 공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교수라면 레지던트의 장래를 진정으로 생각해 주셔야죠. 그렇다면 역시 태화보다는 우리 칠성이 좋습니다. 모든 지원을 다 해 줄 수 있는 병원이에요. 아시죠? 이번에 칠성 그룹 회장님이 미래 먹거리는 바이오에 있다고 한 거.”
“어어. 그런 말이면 우리 아선도 밀리지 않습니다. 병원 이름이 아선이라 그렇지 「미래 그룹」 산하 병원이잖아요. 우린 아예 외래 동 하나를 짓겠다고 했다니까요?”
둘 다 이현종에게 하는 말처럼 쏟아내고 있었지만, 실은 수혁에게 하는 말이었다.
[확실히 둘 다 나빠 보이지 않는 제안입니다.]
‘그렇긴 하네. 두 병원 다 좋긴 하지.’
[생각보다 태화 의료원이 뜨뜻미지근했군요. 다 잡은 물고기라고 여긴 걸까요?]
‘그럼 좀 실망인데.’
물론 수혁도 인간적으로 태화에 정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어찌 세상일이 의리로만 굴러가겠는가.
때론 직접적인 이득이 더 중요할 때가 있었다.
‘원장님이 뭔가 다른 말 안 해 주시려나…….’
그래도 어지간하면 태화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는 수혁이 조그마한 기대를 품을 때쯤, 이현종이 움직였다.
쿵.
그렇게 몸집이 육중한 사람이 아닌데도 발소리가 꽤 울렸다.
일부러 발을 구른 모양이었다.
사소한 것이었지만 꽤 효과가 있어서 박국진, 우창윤 모두 입을 다문 채 그를 돌아보았다.
이현종은 둘뿐만 아니라,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이들의 관심이 쏠릴 때까지 기다린 후 입을 열었다.
아주, 아주 진중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진중한 얼굴로 개소리를 내뱉었다.
“아들이야.”
“네?”
“이수혁이 내 아들이라고.”
“무슨……. 무슨 소릴…….”
“내 아들 내 손으로 교수 만들 거야. 토 달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