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2년 차 (1)
“이것으로 공여자에 감염된 스케도스포리움에 의한 사망 케이스 1건 및 보리코나졸, 에키노캔딘스, GM-CSF 병합 요법을 이용해 치료에 성공한 케이스 3건에 대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수혁은 추계 학회에서보다도 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 쟨 천재라니까?”
이현종은 여느 때처럼 완벽하기 그지없는 발표를 해 낸 수혁을 향해 엄지를 내둘렀다.
손바닥에 불나도록 손뼉을 치고 있던 신현태 또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니까요. 아니, 저걸 1년 차가 진단했다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그러니까. 게다가 발표는 또 왜 이렇게 잘해.”
거의 누가 대본을 읽어 주기라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발음도 단어 선택도.
심지어 접미사나 접두사까지도 철저히 계산되어 있었고.
조사 또한 완벽해서 마치 대통령 연설문이라도 듣는 기분이었다.
[잘했습니다.]
‘불러 주는 대로 읽은 건데 뭐.’
물론 당사자인 수혁은 그저 오늘도 할 일 하나 했다는 심정이었다.
발표 자체도 떨리긴 하는 일이긴 했지만.
실제 환자 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는가.
누군가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수혁은 정말로 바루다가 읽어 주는 대로 읽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지 않은가.
[사람들이 나가는군요.]
바루다는 수혁의 눈을 통해 강의장을 빠져나가는 인원을 바라보았다.
평소 학회와는 달리 사람들의 복장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정장 입은 사람은 무조건 발표자라고 보면 될 지경이었다.
대부분은 운동복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스키복을 입고 있었다.
‘스키 학회잖아. 오전 강의 들었으면 부리나케 스키 타고 놀아야지.’
대학 병원 교수를 하다 보면.
특히 큰 병원 교수를 하다 보면 따로 놀 시간이 아예 없다시피 하게 되는 법이었다.
시간 나면 학회 다녀야 하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 알게 모르게 불만이 쌓였는데.
그걸 좀 해결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학회가 바로 스키 학회였다.
오전에만 공부하고 오후부터는 스키 타고 놀라는 학회라니.
처음 만들어질 때 회원들의 반발이 컸지만 지금은 가장 사랑받는 학회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아쉽게 됐군요. 수혁.]
바루다는 우르르 빠져나가는 회원들과 수혁의 다리 쪽을 힐끔거리며 중얼거렸다.
말 그대로 안타깝다는 어조였다.
수혁 또한 비슷한 심정이긴 했지만.
이미 다리 다친 것에 대한 적응은 끝난 참이었다.
워낙에 어렵게 크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체념이 빠른 편이었다.
‘괜찮아. 여기 사우나도 좋다고 그랬어.’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오고 있으려니, 태화 의료원 내과 삼인방이 조르르 그에게 달려왔다.
순환기내과 이현종, 감염내과 신현태 그리고 혈액종양내과 조태진이 그들이었다.
“잘했다.”
“넌 역시 천재다.”
“나는 그런 균 있는지도 몰랐네. 혈종에도 면역 억제 환자들 많은데, 오히려 내가 배운다 야.”
셋은 질세라 칭찬부터 건네주었다.
수혁은 이 중에서 심심치 않게 용돈까지 찔러 주고 있는, 실질적 양아버지 역할을 해 주고 있는 이현종에게 먼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원장님.”
“그래.”
이현종은 그런 수혁을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수혁이 순환기내과에 남으면 정말 정말 좋을 거 같은데, 저놈의 다리가 걸림돌이었다.
조영술을 하든, 심장 초음파를 하든 서 있거나 움직일 일이 많은 게 순환기내과 아니던가.
다리 한쪽이 불편한 수혁에게는 쥐약인 분과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이현종도 수혁에게 순환기내과를 강권하고 있진 못했다.
“감사합니다, 과장님.”
“그래, 그래.”
그에 비해 신현태는 아주 푸근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일단 이번 발표에 쓰인 케이스가 자신이 맡았던 케이스이기도 했고.
다리쯤이야 불편해도 감염내과에서는 얼마든지 일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직 수혁이 확실히 뜻을 표시한 적이 없긴 하지만.
아무래도 감염내과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응, 그래. 우리 수혁이.”
조태진은 셋 중에서 제일 자신감 넘치는 얼굴이었다.
비록 자신이 이현종, 신현태에 비하면 한참 연배가 처지긴 했지만.
혈액종양내과야말로 21세기 내과학에 있어 감히 꽃이라 부를 수 있는 분야 아니겠는가.
전염병의 종결로 완전히 골로 갈 줄 알았던 감염내과가 고령화 및 늘어나는 암 환자 수명으로 다시 치고 올라오고 있고.
심혈관계 질환의 가파른 증가로 인해 순환기내과의 인기 또한 높아지고는 있었지만.
역시 혈종이 짱이란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 사우나 갈 건데, 같이 갈래?”
셋은 그렇게 수혁에 대해 치하를 한 차례 더 한 후, 사우나를 제시했다.
[가지 맙시다.]
‘응, 그래.’
교수 셋과 사우나라니.
아무리 격의 없이 지내는 사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 하지 않은가.
“전 좀 피곤해서 방에서 쉬려고 합니다.”
“아아, 그래. 이것 참. 그럼 쉬어야지. 네 방은 룸서비스 되니까, 배고프면 시켜 먹어. 회식 안 와도 되니까. 나중에 우리끼리 따로 먹자.”
“아, 감사합니다. 교수님.”
“감사는 무슨, 부자지간에. 하하.”
다행히 이현종이나 다른 교수들이나 수혁에 대해서는 예외를 철저하게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해서 셋은 수혁을 남겨 둔 채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후.”
혼자 남게 된 수혁은 짤막한 한숨을 쉬었다.
카펫 깔린 바닥에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으려니, 누군가가 눈에 들어왔다.
모두 편한 차림으로 온 학회에 보기 드물게 정장을 차려입은 무리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이수혁 선생님!”
4명가량 되었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긴장을 하고 있었다.
수혁은 이놈들이 누군가 하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바루다의 말을 듣고서야 이들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비 1년 차들입니다. 당장 내일모레부터 근무하게 됩니다.]
‘아, 맞아. 인턴 돌았던 애들도 있네.’
[너무 교수들만 신경 쓰지 말고 아래도 좀 보십쇼.]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너무 세속적인 거 같잖아.’
[아닌가요?]
‘맞지.’
수혁은 실제로 기억나는 인턴 이름은커녕 얼굴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재차 자기 앞에 모여든 예비 1년 차들을 돌아보았다.
“아, 그래. 반가워요.”
“말씀 낮추십쇼! 이수혁 선생님.”
“아니……. 왜 이렇게 군기가 바짝 들었어요? 내과 분위기 안 그런데요.”
“저희 모두 이수혁 선생님을 존경해서 들어왔습니다!”
“존경…… 이요?”
수혁은 얼핏 봐도 자기보다 나이가 많아 뵈는 예비 1년 차를 무려 셋이나 골라낼 수 있었다.
절대로 착각이나 지레짐작은 아니었다.
저 얼굴로 수혁보다 나이가 어리려면 대체 얼마나 고생을 해야만 하는 건지 감도 안 잡힐 지경이었으니까.
특히 지금 존경이란 단어를 입에 올린 분은 머리카락이 반쯤 비어 있기까지 했다.
솔직히 앞에서 고개를 조아릴 때마다 송구스러워서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네, 존경합니다! 선생님! 태화 의료원 개원 이래 최고의 천재라고 들었습니다!”
“아니……. 그런 소문은 대체 어디서 도는 거예요……. 저 1등 졸업도 아닌데.”
“과외에 아르바이트까지 하시느라 학업에 온전히 신경 쓰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건……. 그건 맞긴 한데…….’
수혁이 술만 마시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기도 했다.
만약 형편만 좋았으면 아니, 다른 일을 할 정도만 아니었으면 1등으로 졸업했을 거라고.
장학금이야 워낙 태화 의료원 재단이 단단해서 빵빵 나왔지만.
어디 사람이 물만 먹고 살 수 있겠는가.
생활비만큼은 수혁이 벌어야만 했더랬다.
“그러니까요! 정말 이수혁 선생님 밑으로 들어오게 되어서 저희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아직도 저 인턴 돌 때 딱딱 환자 진단하고 치료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 그래요. 음.”
수혁은 교수들에게 예쁨 받는 거야 아주 익숙했지만.
같은 레지던트들에게 이런 식의 관심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동기들이나 선배들이나 질투하거나 경원시하기 바빴지 눈앞에서 존경이니 뭐니 하지는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뭐라도 좀 사시죠. 어차피 카드도 받았는데.]
‘아, 그럴까?’
[원래 입은 닫고 지갑은 여는 선배가 멋지다고 배웠습니다.]
‘그런 건 또 어디서 배웠대.’
[드라마요.]
‘그래……. 뭐……. 맞는 말이긴 하지.’
해서 잠시 당황하고 있었지만, 다행히 바루다의 시기적절한 조언 덕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뭐 좀 먹을래요? 회식이야 어차피 강제 참석은 아니니까.”
“이, 이수혁 선배님과 함께요?”
“그렇게 오버하지 말고. 몸을 왜 떨어요……. 무섭게.”
“너무 좋아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디로 갈까요!”
수혁은 어느새 자신 앞으로 선 후배를 보며 잠시 한숨을 쉬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앞장을 서다니.
꼭 신출내기 인턴이라도 보는 느낌이었다.
‘하긴…….’
아마 수혁도 바루다가 없었다면 딱 이랬을 터였다.
사실 인턴보다도 더 힘든 것이 1년 차였으니까.
특히 사람 생명을 다루어야 하는 내과 1년 차는 더더욱 긴장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1년이라도 더 배운 위 연차의 존재란 거의 하늘이었고.
“방으로 가죠. 룸서비스 먹으면 되니까.”
“오……. 룸서비스……. 전 처음 먹어 봅니다.”
수혁의 말에 예비 1년 차는 거의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사이 바루다는 인턴 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대조 분석하던 작업을 끝냈다.
[아, 이 사람 이름은 안대훈입니다. 나이는 27.]
‘27? 이 얼굴로?’
[우여곡절이 좀 있었나 본데, 더 이상의 정보는 지원서를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아니, 뭐……. 그래. 27……. 나보다 어리다니……. 근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3월에 인턴이었습니다. 아마 인상 깊었을 겁니다. 다른 1년 차들은 아무것도 못 할 때 수혁은 날아다녔으니까.]
‘아…….’
그렇게 생각을 해 보니 또 이해가 되었다.
“저는 원래 피부과 할 생각이었거든요. 제가 원래 머리에도 관심이 많았어서.”
그사이 안대훈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수혁은 어쩐지 안대훈의 입에서 머리 얘기가 나오자 숙연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아까보다는 좀 더 친절하게 대꾸해 주었다.
“아, 그랬구나. 공부 잘하셨나 보다. 피부과 생각하려면.”
“아뇨, 아뇨! 저희 학번에는 이수혁 선배님 같은 천재는 없었거든요. 그래도 수석은 못 했고 차석 했습니다.”
“차석? 지원자 중 1등이겠는데요?”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내과는 점점 더 인기가 떨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심지어 수련 기간을 3년으로 줄였는데도 그러했다.
목숨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 사명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데다가, 아무래도 다른 과보다 너무 힘들면서 금전적인 보상은 떨어지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특히 피부과랑 비교하는 건 좀 잔인할 지경이었다.
피부과는 삶의 질, 노동 강도, 금전적인 보상 모두 최상위권이었으니까.
“하지만 3월에 딱 이수혁 선배님이 환자 진단하는 걸 보고 나니까, 아……. 역시 의사는 내과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지원했습니다.”
“저 때문에 내과를…… 어이구.”
그런데 그런 피부과를 포기하고 내과로 온 게 자기 때문이라니.
수혁은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는 기분이었다.
물론 바루다는 좋아했다.
[역시 세계 최고의 내과 의사가 될 자질이 있군요. 벌써 추종자가 생기다니.]
‘뭐……. 나쁜 일은 아니지.’
위에서야 너무 수혁을 이뻐하고 있었지만.
상대적으로 레지던트들의 지지는 약한 편이었다.
이게 절대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발목을 잡을 수는 있었다.
평판 또한 교수가 되는 데 있어 중요했으니까.
수혁은 재차 안대훈을 비롯한 예비 1년 차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발판이로구만.’
[사람을 너무 수단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수혁.]
‘인공지능이 할 말은 아니지 않아?’
[인공지능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는 게 문제 아닐까요?]
‘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