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70화 (70/1,303)

70화 2년 차 (2)

“네. 그렇게 갖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혁은 레지던트가 아니라 학회 발표자로 초대받았기 때문에 혼자 방을 배정받은 참이었다.

거기에 이현종이 돈을 더 얹어 주어서 방은 제법 컸다.

혼자가 아니라 서너 명이 써도 좋을 정도로 넓은 온돌방이었는데, 침대까지 놓여 있을 정도였다.

“와……. 역시 선생님은 벌써 교수급 대우군요.”

사실 다른 레지던트들이 볼 때는 특혜라고 보일 수도 있는 일이거늘.

안대훈은 그저 대단하게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아니, 그냥 발표자라고 해서 그래요.”

해서 조금 자신을 낮추려고 말을 꺼냈는데.

그게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여태 조용히 있던 다른 녀석들까지 난리였다.

“와, 그러고 보니 오늘 발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익사자에 발생할 수 있는 균이라니…….”

“저 아직도 소름이…….”

거의 무슨 팬클럽 같은 분위기였다.

수혁으로서는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분위기라고 보면 되었다.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나 그렇게까지 인기 있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여긴 음식도 맛이 좋네요.”

“이수혁 선생님과 먹어서 그런가, 사르르 녹습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음식이 도착한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심지어 술을 그렇게까지 즐기는 편이 아닌 수혁인 데다가 룸서비스로 오는 맥주는 가격이 몇 배로 뛰기 때문에 아예 안 시켰음에도 그러했다.

[약간 귀찮군요. 자습 언제 시킬 겁니까?]

때문에 처음엔 즐거워하던 바루다도 이제는 슬슬 귀찮다는 기색을 내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시켜야겠다. 고막 터질 듯.’

수혁 또한 비슷한 심정이었다.

아니, 바루다보다 더 정도가 심했다.

바루다야 일일이 대응할 이유가 전혀 없었지만.

수혁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자, 일단 이거 밖으로 놓고요.”

때문에 다 먹은 식기를 방 밖으로 밀어 놓자마자,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다.

쾅!

다소 강한 기세로 문이 닫혔음에도 불구하고 여태 신이 나서 수혁 칭찬을 늘어놓던 네 명의 예비 1년 차들은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오히려 누군가는 박력 있다고 중얼거리고 있을 지경이었다.

거의 무슨 종교처럼 세뇌를 당한 모양인데, 당사자인 수혁은 그런 적이 없으니 신기하기만 했다.

“자, 이제 시간이 늦었으니까. 공부하려고 하는데. 같이 할래요?”

수혁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억지로 숨긴 채 네 명의 예비 1년 차들을 돌아보았다.

그제야 절반은 조금은 후회가 된다는 듯한 얼굴로 창가를 바라봤다.

커다란 슬로프가 내다보였는데, 이 넷을 제외한 모든 예비 1년 차는 지금 저기 있었다.

아니, 어쩌면 회식 장소로 이동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공부하고 있을 사람은 없을 터였다.

“여, 영광입니다.”

물론 좋아하는 인간도 있었다.

바로 안대훈이었는데, 그는 진심으로 수혁과 공부하게 된 지금 이 현실이 너무 좋은 듯해 보였다.

‘미친 사람인가.’

[열정이 좋군요. 수혁은 억지로 시켜야 했었는데.]

수혁은 바루다의 쓴소리를 애써 무시한 채 노트북을 꺼내 들었다.

이현종이 사비를 털어 사 준 노트북이었는데, 가벼우면서도 성능이 아주 좋았다.

심지어 강의 연습하라고 간이 빔프로젝터까지 선물을 해 준 참이었다.

수혁은 그것도 꺼내 들고는 벽면을 향해 빔을 쏘았다.

그러자 수혁이 여태 정리해 둔, 공부 자료와 환자 자료 및 발표 자료가 든 폴더가 떴다.

“오.”

다른 녀석들은 얼굴이 썩어 가는 데 반해 안대훈 만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그것보다 좀 더 빛나는 정수리가 있어 수혁의 마음을 아프게 하긴 했지만.

아무튼, 수혁은 손을 쉬지 않고 놀려 자신이 정리해 둔 파일 하나를 열었다.

아주, 아주 거대한 파일이었다.

기껏해야 한글 파일인 주제에 100MB가 넘어갔으니까.

드르륵.

잠시 로딩이 있다가 뜬 파일에는 3월부터 수혁이 진단했던 환자 케이스가 쫙 나와 있었다.

“이, 이건…….”

“제 1년간의 기록이에요. 너무 쉬운 환자들은 다 뺐는데, 그래도 중복되는 진단명은 싹 넣어 뒀어요.”

“와……. 이거…… 이건 보물이네요.”

태화 의료원은 인턴 때 그저 인턴 일만 시키는 병원은 아니었다.

응급실을 돌 때는 나름 진단 과정에 참여를 시키는 병원이었다.

그때 인턴들도 의사로서 역할이 무엇인지 대강이나마 감을 잡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 덕인지 뭔지는 몰라도 이젠 안대훈뿐만이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눈을 빛내고 있었다.

“증상에……. 병력에 진단 추론까지……. 이걸……. 이걸 언제 다 정리하신 거예요?”

물론 안대훈이 제일 적극적이긴 했다.

그는 수혁이 천천히 스크롤을 내려 보여 주는 것을 빠짐없이 읽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수혁이 이 환자를 어떻게 검진했고,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떤 질환을 의심했는지에 대한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하느라 진짜 뒈지는 줄 알았지.’

[그래도 덕분에 제 알고리즘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더……. 해야 하는 거지?’

[당연하죠.]

‘하.’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더랬다.

하지만 보람은 차고 넘치도록 있었다.

이젠 심지어 스케도스포리움을 진단해 냈을 때보다도 더 합리적인 알고리즘을 갖게 되었으니까.

물론 여전히 부족한 임상 경험과 배경 지식이 발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 터였다.

이젠 수혁도 알아서 공부하고 있었으니.

“이거 각자 메일로 보내 줄 테니까, 공부 좀 해 봐요. 모르는 거 있으면 12시 전이면 언제든 물어보고. 그 이전에는 안 자니까.”

만들 당시에만 해도 기껏해야 알고리즘 강화 및 수혁의 진단 능력 증진을 위한, 즉 아주 개인적인 작업이었거늘.

2년 차가 되어 후배들을 받아 보니 교육 목적으로도 쓸 수 있어 보였다.

아무래도 인공지능을 탑재하지 않은 친구들이라 제한이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시중에 나와 있는 교과서보다는, 보다 실질적인 지식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교재였다.

“와……. 이걸 그냥 받아도 되는 겁니까?”

이 자료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예비 1년 차들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냥 딱 한 케이스만 읽어 봐도 직접 같이 환자를 본 것처럼 생생하지 않은가.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이요?”

“일단 3월 자료를 줄 테니까. 다음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의국에서 봅시다. 그때 얼마나 숙지하고 있는지를 보고 4월 치를 줄게요.”

“아…….”

이 말인즉슨, 공부하지 않으면 자료를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반대로 말하면, 공부만 하면 이수혁 선생님의 애제자가 될 수 있다는 건가……!’

안대훈은 본인이 존경해 마지않고 있는 수혁을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수혁은 단 한 번도 애제자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긴 했지만.

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는 정말로 수혁의 어마어마한 능력에 강하게 감화받은 후였으니까.

“하, 하겠습니다.”

해서 안대훈은 정말이지 흔쾌히 아니, 어떻게 보면 다급하게 느껴질 정도로 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놓여 있던 메모장에 자신의 메일 주소를 적어 놓으면서였다.

“저, 저도…….”

그러자 옆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1년 차들도 슬금슬금 다가와 메일 주소를 적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수혁은 현재 내과 의국에서 실세가 아니었던가.

레지던트 중에서는 3년 차조차 수혁에게 시비를 트지 못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교수들도 수혁에게만큼은 예외를 둘 지경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환자도 잘 보지만.

무엇보다 원장 아들이어서 그랬다.

“좋아요. 그럼 공부하고 다음 주에 봅시다. 양이 꽤 많아서 아마 오늘부터 보긴 해야 할 거예요. 바로 보내 줄게요.”

수혁은 드디어 혼자만 따로 공부하는 외로운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되어 기쁘다는 얼굴로 허허 웃었다.

안대훈을 제외한 나머지는 몸을 흠칫 떨었지만.

그러든가 말든가 알 바 아니란 생각이었다.

‘내과를 왔으면 공부를 해야지.’

시건방진 생각이라고도 볼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을 지난 일 년간 가까이에서 봐 온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말을 할 순 없었다.

수혁 본인은 정말이지 바루다를 몸에 들인 이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공부를 해 왔으니까.

“자, 그럼 각자 방으로 가세요. 다 보냈으니까. 지금부터 부지런히 보고 다음 주에 봅시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선생님…….”

안대훈을 제외한 나머지의 목소리는 ‘유난히’라는 단어를 써도 좋을 정도로 작았다.

수혁은 그러거나 말거나 그들이 나가자마자 방문을 닫고는, 터덜터덜 노트북을 향해 걸어갔다.

‘솔직히 미드 하나만 보면 안 되냐?’

바루다에게 딜을 치면서였다.

[남들 놀 때 다 놀면 언제 세계 최고의 내과 의사가 된답니까?]

물론 바루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정말이지 인정머리라고는 없는 녀석이었다.

애초에 인공지능이니 그런 걸 기대하는 거 자체가 좀 이상한 일이긴 했지만.

‘아니, 오늘은 발표도 했잖아…….’

[발표가 공부던가요?]

‘하…….’

일언 지하에 잘린 후에도 몇 번인가 더 시도를 해 보았지만 역시나 소용은 없었다.

해서 수혁은 바탕 화면에 몰래 깔아 둔 폴더 쪽을 영 아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다른 폴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아까 예비 1년 차들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는 달리, 아예 논문만 모여 있는 폴더였다.

그것도 그냥 논문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나름 국제 심장 학회 에디터로 있는 이현종, 국내 감염내과학회 교육 이사를 맡고 있는 신현태, 혈액종양내과 신진 세력인 조태진 등이 각기 정리해 준 논문들이었다.

“어후.”

대가들이 보내 준 논문들이니만큼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논문들이었다.

바루다의 연산 능력이 세계 최고의 반도체 칩에서 수혁의 뇌로 다운그레이드된 탓에 바로바로 이해하기는 꽤 어려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언어의 장벽은 없다는 점이었다.

‘어렵네……. 확실히 분자 단위 연구는 어렵다……. 그냥 임상도 아니고…….’

[최근 연구 트렌드가 이쪽이니 어쩔 수 없죠. 임상 경험이야 병원에서 충분히 쌓을 수 있으니, 연구에 대한 지식은 이렇게 얻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거 보면 아직 우리나라 의료가……. 연구 쪽은 먼 거 같아.’

[그럴 수밖에 없죠. 이런 거 연구 하나 하는 데 필요한 금액이 수십억입니다.]

‘역시 미국 가야 하나?’

[뭐 여름에 미국 가게 되지 않았습니까? 가서 분위기 한번 보시죠.]

바루다는 8월에 잡힌 아이오와주립대학교 병원 연수를 상기시켰다.

수혁은 그렇지 않아도 그 일정을 무척 기대 중이었기에 기분이 좋아졌다.

비행기라고는 단 한 번도 타 보지 못한 몸인데, 첫 비행의 행선지가 미국이라니.

기분이 나쁘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러자면 아직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일단 험악한 3월을 넘겨야만 했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1년 차들, 그리고 인턴들과 함께하는 3월을.

* * *

“어? 아니 무슨 소리야?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환자분이 왜 그래.”

“그…… 갑자기 숨을 꺽꺽 쉬시더니…….”

“보호자처럼 말하지 말고, 의학 용어로 말해 봐. 임프레션이 뭔데.”

“그…… 디습니아(Dyspnea: 숨찬 증세)?”

“그건 진단명이 아니라 증상이잖……. 에이.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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