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어린데 (2)
내공.
병원에서 웬 내공 얘기냐는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무척 자주 쓰는 말 중 하나였다.
‘나는 내공 꽤 괜찮은 편 아닌가?’
[내공이 후져도 제가 있으니까 괜찮았죠.]
내공이 좋다는 건 환자가 적다는 걸 의미했고.
내공이 후지다는 건 환자가 많다는 걸 의미했다.
아니면 너무 상태가 안 좋은 환자를 받게 된다거나.
그런 의미에서 안대훈의 내공은 가히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저놈은 뭔 놈의 1년 차가 오자마자 환자가 미어터지냐…….’
[잘된 일 아닙니까? 어지간한 환자로는 이제 우리 실력에 못 미치잖아요.]
수혁의 말에 바루다는 삼류 탐정의 싸이킥을 연상시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중2병이 생기셨나. 우리 실력에 못 미치기는……. 뭔 미친 소리여 이게.’
[그렇잖아요. 솔직히 지금 수혁 앞으로 입원한 환자 중에 딱 보자마자 퇴원 계획까지 나오지 않은 환자가 있습니까?]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바루다의 말이 맞긴 했다.
확실히 지금 그의 앞으로 입원한 환자들은 딱 보자마자 계획이 서긴 섰으니까.
‘그렇긴 하네.’
[그렇죠? 근데 안대훈이 물어오는 환자 좀 보십쇼.]
‘되지도 않게 어렵지.’
[네. 어렵습니다. 비전형적인 케이스뿐이에요. 하지만 도움이 될 겁니다.]
‘도움이 된다라.’
수혁은 바루다의 말을 들으며 확실히 이 녀석은 인공지능이란 생각을 했다.
환자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도움이 된다니.
사람이라면 도저히 하지 못할 말 아니던가.
‘뭐……. 아무튼, 기다리자.’
물론 수혁은 굳이 바루다에게 그런 생각이 잘못된 것이란 말을 하진 않았다.
사람도 아닌데 그런 걸 가르쳐서 뭘 한단 말인가.
그냥 환자 보는 데 지금처럼만 도움이 된다면 만사 오케이였다.
[네, 수혁.]
바루다 또한 비슷한 의견이었던지라, 둘은 그대로 선 채 신현태 교수를 기다릴 수 있었다.
“수혁아, 어떠냐?”
신현태는 정말 병원 코앞에 있었는지 곧 응급실에 도착했다.
숨을 반쯤 헐떡이고 있었는데, 상당히 급해 보였다.
상대적으로 느긋해 뵈는 수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할 수 있었다.
“아, 네. 아직 명백한 혈관 내 파종성 응고 장애 소견을 보이고 있진 않습니다만……. 일단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성분 수혈은 혈액은행에 연락 넣어 두었습니다.”
“잘했네. 음……. 진짜 점상 출혈이 있네.”
“네. 혈소판이 8만입니다. 젊은 여성 환자인 것을 감안해 보면…….”
“너무 낮은데. 기저 질환은 없어?”
“충수 돌기염 수술한 병원 기록에 따르면 없습니다.”
“음.”
충수 돌기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맹장염인데, 별거 아닌 수술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수술이었다.
수술 전 검사를 시행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럼 일단 기본적인 질환이 있진 않겠네.”
“네. 일단 해당 병원에서 시행한 바이럴 마커 결과도 들고 왔는데, 음성입니다.”
바이럴 마커란 바이러스 질환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를 의미했다.
당연히 모든 감염 질환을 검사하는 건 아니었고, B형 간염, C형 간염, HIV 등을 검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즉 수혁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바이러스성 질환을 앓고 있는 건 아니란 뜻이었다.
“흠……. 그럼 어떤 걸 의심하니?”
신현태는 잠시 환자에게로 다녀온 후, 재차 수혁에게 의견을 물었다.
확실히 교수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니어서 안심시키는 스킬 또한 장난이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신현태 교수는 누가 봐도 교수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명찰에는 과장이라는 직함까지 쓰여 있는지라 환자 보호자들의 얼굴엔 안도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네. 음.”
수혁은 그런 보호자들의 얼굴을 잠시 돌아본 후,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범혈구 감소증 및 출혈 경향을 일으킬 수 있는 질환 중 환자 나이를 고려하면 루푸스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루푸스. 그렇지, 음.”
둘은 루푸스를 되뇌면서 지금 막 중환자실로 자리를 옮긴 환자를 떠올렸다.
공교롭게도 그 환자 또한 루푸스가 아니었던가.
그 루푸스가 진행하는 바람에 에크모까지 돌리게 되었고.
당연히 사고가 그쪽으로 돌게 될 수밖에 없었다.
“또?”
“약물로 인한 범혈구 감소증일 가능성도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그럴 수 있는 항생제를 썼고, 그래서 일단 교체했습니다.”
“잘했어. 확실히 가능성은 있지.”
“네. 또한, 혈구를 파괴하는 혈액암일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
수혁은 일부러 고개를 보호자들 반대편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암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게 해 봐야 좋을 일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신현태 또한 비슷한 의견이었던지라 자연스럽게 몸을 튼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고려해 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애초에 충수 돌기염의 원인이 혈액암이었을 수도 있어.”
“네. 그래서 이전 병원에 검체 보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잘했다. 넌 참……. 그래, 참 잘하는 녀석이야.”
뭐만 하려고 하면 이미 했다고 하질 않는가.
이런 레지던트는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아니, 장덕수 교수 펠로우일 때보다도 나은 거 같아.’
어쩌면 지금도 더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현태 교수는 딱 거기서 생각을 멈추었다.
여기서 더 나갔다가는 어쩐지 자신에게까지 화살이 향할 것 같아서였다.
그가 자기방어를 한창 펼치는 동안에도 수혁의 말을 계속 되뇌었다.
“그리고 말초혈액도말 검사도 진검에 의뢰해 두었습니다.”
“아, 잘했네. 흠. 그럼 일단 지금 치료는 항생제 변경하고, 간 보호제 시작하는 건가?”
“네. 간 보호제는 임상적 근거가 떨어지긴 하지만……. 그래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습니다.”
“해 줄 거 없을 땐 뭐라도 해야지. 그래 입원시키고, 잘 보자고. 또 에크모 넣지는 말아야 할 거 아냐.”
“네, 교수님.”
“그래, 부탁한다. 난…… 음……. 오늘은 집에 못 가겠네. 연구실에 있을 테니까 뭔 일 나면 연락해 줘. 관련 질환 공부나 좀 하고 있어야겠다.”
“네.”
신현태는 환자를 부디 잘 돌봐줄 것을 당부한 후, 총총걸음으로 사라져갔다.
방금 그가 말했던 것처럼 병원 밖을 향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연구실을 향해서였다.
[참 열심이군요. 수혁도 분발하십쇼. 교수도 저렇게 열심히 합니다.]
‘나도 열심히 하잖아?’
[더 열심히 하라는 뜻입니다.]
‘그럼 죽을 텐데…….’
[진짜 죽을 거 같으면 제가 제동 걸면 되죠. 뭔 걱정입니까? 수혁의 건강검진은 제가 담당하고 있는데.]
‘하.’
확실히 바루다가 온 이후로 수혁은 감기 한번 걸리지 않기는 했더랬다.
뭔가 컨디션이 처질라치면 바루다가 가차 없이 관리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그 말은 곧 딱 고 정도로 관리가 되고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수혁은 환자가 병실로 향한 후, 당직 방에 돌아왔다.
상당히 힘든 하루였지만.
그래서 침대에 쓰러지고 싶었지만.
바루다가 그렇게 놔두지를 않았다.
‘이거 다 보고 자라 이거지?’
[네. 관련 논문입니다.]
‘하아.’
[웬 한숨? 환자 살리기 싫어요?]
바루다는 늘 그렇듯 멘탈 공격을 시전했다.
그리고 수혁은 언제나처럼 홀랑 넘어갔다.
의사에게 환자 목숨 운운하는 공격이라니 .
안 넘어갈 수가 없지 않은가.
‘아니, 아냐. 읽자…….’
[잘 생각하셨습니다.]
‘뭐……. 실제로 환자 살리는 데 도움이 되긴 하겠지.’
수혁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뭔 일이라도 나면 안대훈이 바로 전화를 걸 거 아니던가.
그때 곧장 달려가기 위함이었다.
[왜애애애앵!]
‘으.’
다행히 밤새 뭔가 연락이 온 것은 전혀 없었다.
그저 바루다의 지랄 맞은 알람으로 깼을 뿐이었다.
[예전만큼 머리를 싸매진 않는군요.]
바루다는 뭔가 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수혁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네가 맨날 트니까 그렇지. 이것도 익숙해지긴 하더라. 과연 인간은……. 적응의 동물…….’
[일어났으면 환자 보러 가시죠. 아마 검사 나간 거 결과 나왔을 겁니다.]
‘아, 그렇지. 참.’
외과는 칼로 째는 학문인 데 반해, 내과는 밖에서 안을 유추해야 하는 학문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이 무지하게 오래 걸렸고, 또 어려웠다.
이런저런 검사는 필수였다.
대학 병원이랍시고 입원했더니 검사만 들입다 하더라! 라는 말은 이런 연유에서 나온 거라고 보면 되었다.
‘일단 내 환자들부터 보자.’
[네. 뭐 별일 없겠지만요.]
‘그렇네.’
바루다의 말대로 수혁의 환자들은 정말이지 별일이 없었다.
딱 입원하자마자 알맞은 항생제 찾아서 딱딱 놔 주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안대훈에게 있었다.
아니, 안대훈이라기보다는 녀석한테 입원한 환자들에게 있었다.
‘에크모는 그냥 그대로 유지해야 하겠고.’
우선 중환자실로 내려간 환자는 아직 별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순환기내과 측, 그러니까 이현종이 직접 시행한 심초음파에서 별 변화를 보이지 않았단 뜻이었다.
[1주간은 변화 없을 겁니다.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선례가 없어요.]
바루다는 본인이 분석해 놓은 바에 따라 결과를 해석했다.
수혁 또한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는 바였기 때문에 굳이 다른 의견을 내진 않았다.
대신 어제 입원한 여성 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대량으로 검사를 낸 건 그쪽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선생님. 기침하셨습니까.”
해서 검사 결과 확인을 하려 하고 있으려니, 누군가 다가와 다소 부담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안 봐도 안대훈이었다.
“기침은……. 조선 시대냐. 그냥 안녕하냐고만 하면 돼.”
“제, 제가 어찌 감히…….”
“사극 찍어? 그냥 편하게 해.”
“아, 안 됩니다. 선배님. 선배님에 대한 제 존경심을 표하려면 지금 당장 무릎이라도…….”
“지랄 말고 그냥 이거나 같이 봐.”
“아, 네. 선배님.”
녀석은 한동안 주접을 떨어 대다가 수혁의 입에서 거친 말이 나오기 시작하고 나서야 뒤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사이 수혁은 손가락을 부지런히 놀려 어제 낸 검사 결과를 띄웠다.
워낙에 검사를 많이 냈다 보니, 뜨는 것도 엄청 많았다.
‘말초혈액도말 검사는 정상이네……. 빈혈 소견 말고는.’
[만들어지는 거 자체는 잘 만들어진다는 뜻이군요.]
말초혈액도말 검사란 말 그대로 혈액을 밀어서 그 안 혈구 세포들의 모양을 보는 검사였다.
모양이 정상이란 얘기는 혈구 세포 생산 자체는 정상이란 뜻이었다.
즉 어제 제일 걱정했던 암과 관련한 진단명이 붙을 가능성은 상당히 적어진 셈이었다.
“여전히 간 수치는 높고……. LDH도 높고. 음.”
수혁은 일부러 안대훈이 들을 수 있도록 소리 내어 말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안대훈이 뭔가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에게 수혁은 거의 신이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대꾸해 준 것은 역시나 바루다였다.
[혈중 페리틴(Ferritin: 철분) 농도는…… 엄청 올라갔군요. 12944.5ng/mL입니다.]
‘정상 수치가 10에서 290이니까…… 거의 무슨 50배가 높네.’
[이상하군요. 철분이 나온다는 건…….]
‘적혈구가 부서지고 있다는 뜻인데. 빈혈도 그거 때문인 거야.’
[그렇죠. 원인이 무엇인가를 확인해 봐야 하는데.]
‘일단 지금 문제 목록이…… 발열, 간 기능 부전, 높은 LDH, Ferritin이야.’
[분석에 들어가겠습니다.]
‘응.’
바루다는 잠시 윙 하는 소리를 내며 분석에 들어갔다.
수혁은 그동안 검지로 마우스를 툭툭 두드려 가며 기다렸다.
안대훈은 그런 수혁의 입이 열리기만을 경건한 자세로 기다렸다.
수혁이 바루다의 의견만을 기다리고 있으리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어쩜……. 생각에 잠기신 모습도 저렇게 멋있으실까…….’
그저 혼자만의 감탄만 터뜨리고 있을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