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79화 (79/1,303)

79화 어린데 (3)

‘아직 멀었냐.’

수혁은 1년 더 대학 병원 생활을 하면서 예전보다 더 눈치가 좋아진 참이었다.

당연히 안대훈이 뭔가 잔뜩 기대하는 기색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여기서 뭔가 허튼소리라도 하게 되면 저 기대감에 누를 끼칠까 걱정이었다.

물론 아무리 헛소리를 해도 저 안대훈은 수혁을 존경할 거 같긴 했지만.

[분석 완료되었습니다. 환자와 같은 케이스 자료가 희박하고, 관련 의학 자료 또한 듬성듬성 떨어져 있어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다행히 바루다는 수혁이 입을 다문 지 10분이 조금 넘었을 무렵, 재차 입을 열었다.

공교롭게도 저 멀리 열리고 있는 엘리베이터에서 신현태 교수가 내리고 있을 때쯤이기도 했다.

‘괜찮아. 말해 봐.’

[웬일로 그냥 넘어가는군요? 제 탓을 하지 않고.]

‘그래 봐야 원래 CPU 대신 내 머리 써서 그런 거라고 할 거잖아.’

[늘었군요, 수혁. 맞습니다. 수혁의 뇌를 대신 써서 그렇습니다.]

‘망할 놈. 분석한 거나 얘기해 봐. 난 정리가 잘 안 돼.’

[알겠습니다.]

바루다는 일단 수혁의 화를 돋운 후에야 제대로 입을 털기 시작했다.

그냥 시작해도 될 거 같은데,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인공지능 주제에 감정이라도 있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환자는 현재 루푸스를 비롯한 자가 면역 질환 항체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자가 면역 질환 가능성은 떨어집니다.]

‘그렇지.’

[또한, 수술 전에 통상적으로 시행하는 바이럴 마커 외에 어제 따로 처방한 바이럴 마커들에서도 모두 음성을 보였습니다.]

‘맞아.’

다른 바이럴 마커란 CMV, EBV, 헤르페스 등과 같은 그나마 조금은 가능성이 있을 만한 바이러스 질환을 뜻했다.

여기서 모조리 음성이 나왔다는 것은 위에 열거한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뜻이었다.

[위 두 가지 사실을 염두에 두고, 환자의 문제 목록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발열, 빈혈을 비롯한 범혈구 감소증, 증가된 LDH, Ferritin 말이지? 그런데 말초혈액도말 검사에서는 모양 정상으로 나왔고.’

[네. 환자의 범혈구 감소증은 만들어지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혈구가 파괴되고 있는 것이 문제라는 뜻입니다. 즉 조직구 탐식증일 가능성이 큽니다.]

‘조직구 탐식증?’

[네.]

‘그게…… 그게 왜 갑자기…….’

조직구 탐식증이란 우리 골수 내에 갑자기 탐식 세포가 증가하면서 정상 세포들을 잡아먹는 병을 의미했다.

굉장히 중한 병으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가능성이 무척 컸다.

당연히 그냥 막 생기진 않았다.

[그 원인을 감별하고, 또 조직구 탐식증인지 여부를 확실히 판단하기 위해 골수 검사를 제안합니다.]

“골수 검사라…….”

수혁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골수 검사란 말을 실제로 내뱉고 말았다.

마침 그 바로 곁에 다가와 있던 신현태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안대훈을 바라보았다.

안대훈이야 절대로 알 턱이 없지 않은가.

“모, 모르겠습니다. 아까부터 눈감고 계시다가 갑자기 이 말을 했습니다.”

“아……. 또 그, 그 상태구나.”

안대훈의 말을 들은 신현태는 뭔가 알겠다는 표정을 짓고는 그대로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수혁을 건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수혁이 사색에 잠겨 있을 땐 건드려 봐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 사색이 끝났을 때는 거의 항상 기가 막히는 답을 꺼낸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둘은 그냥 그대로 수혁을 바라보기로 했다.

[네, 골수 검사가 필요합니다. 최대한 빨리 시행할 것을 제안합니다.]

‘조직구 탐식증일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데?’

[정상 성인 여성에서 이처럼 랩이 깨질 가능성은 0.01%도 채 되지 않습니다. 고로 조직구 탐식증일 가능성은 90%가 넘습니다.]

“이런 망할.”

수혁은 최근 들어 점점 더 개선되고 있는 바루다의 진단 기술을 떠올렸다.

이 녀석이 90%라고 하면 거의 99%라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그리고 조직구 탐식증은 치료를 빨리 하지 않으면 사망률이 미친 듯이 상승하는 병이기도 했다.

때문에 수혁은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은 후, 병동 스테이션 안쪽으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뒤에 있던 신현태나 안대훈으로서는 좀 황당할 따름이었다.

갑자기 욕을 하더니 스테이션 안쪽 창고로 들어갔으니까.

“뭐냐?”

“모, 모르겠습니다.”

“말만 하지 말고 따라가 봐.”

“교, 교수님은요?”

“나는…….”

신현태는 ‘당연히 따라가야지’라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창고에서 나온 수혁이 지팡이를 짚은 채, 웬 수술 세트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미 엄청 큰 주사기를 든 채였는데, 감염내과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놈이었다.

‘현종이 형…….’

신현태는 자신도 모르게 이현종이 수혁을 처음 알게 된 이후 줄곧 읊어 댔던 ‘이수혁 또라이설’을 떠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안대훈도 함께하고 싶었지만, 그것만은 신현태가 막았다.

“넌 따라가야지.”

“저, 저만요?”

“그래. 위 연차 뭐 하는지 봐…… 봐야 할 거 아냐.”

“그……. 아, 알겠습니다.”

다행히 안대훈은 한때 병원에서 파다했던 ‘이수혁 또라이설’에 대해 무지했다.

게다가 수혁에 대한 존경심이 그득했고.

조금 이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해서 크게 흔들리지는 않는단 뜻이었다.

타닥.

타닥.

그래서 안대훈은 일단 수혁에게로 달려나갔다.

수혁은 상당히 서두르고 있었지만, 그래 봐야 지팡이를 짚고 있었기 때문에 금세 따라잡혔다.

“서, 선생님.”

“아, 맞아. 너 있었지. 마침 잘됐다. 따라와.”

“어, 어딜요.”

“골수 검사 해야 해.”

“고, 골수 검사요?”

안대훈으로서는 대체 누굴 검사하겠다는 건지도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 않은가.

다짜고짜 골수라니.

“어.”

그러다 수혁이 어제 입원시킨 환자가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누굴 찌르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서, 선생님. 그 환자 혈소판…….”

“알아. 처방 냈어.”

“냈어요?”

“그래.”

해서 다급히 붙잡았지만, 수혁은 어느 틈엔가 혈소판 수혈 처방을 내놓은 참이었다.

그냥 우수한 레지던트가 아니라 인공지능 바루다가 붙어 있는 몸 아니던가.

적어도 알아도 하는 ‘실수’는 없다고 보면 옳았다.

“환자분, 안녕히 주무셨어요?”

“으……. 아뇨……. 열이…… 열이 나서…….”

수혁은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환자에게 상태부터 물었다.

“못 주무셨어요?”

“네……. 커튼 곁에 어떤 아저씨가 있었어요. 아빠는 없었다고 하는데…….”

“음.”

그리곤 답변을 들음과 동시에 육안으로 환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살폈다.

잠시 흉부 쪽에 시선이 머물렀는데, 분당 호흡수를 재기 위함이었다.

흉부 팽창이 제대로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호흡수가 빨라졌어.’

[분당 28회입니다. 산소 포화도는 정상이지만…….]

‘폐…… 에 물이 차나?’

[그럴 수 있습니다. 진행이 빠릅니다. ‘커튼에 있던 아저씨’ 발언은 섬망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진단과 치료가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알았어, 바로 골수 검사할게.’

그렇게 관찰 소견을 두고 바루다와 의견 교환을 하고 있으려니 환자 곁에 있던 보호자가 입을 열었다.

어제부터 불만 있어 보였던 바로 그 아버지였다.

“저, 선생.”

“아, 네. 아버님.”

“어제 봤던 교수님은 안 오시나? 우리 아이 이거 아무리 봐도 심각해 보이는데.”

“곧 오실 겁니다만……. 오시기 전에 일단 검사를 해 봐야 합니다.”

“검사? 아니, 와서 치료는 안 하고 백날 천날 검사만 하고, 어? 치료하는 거 맞아?”

“음.”

수혁은 잠시 행동을 멈추고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화가 났다기보다는 불안해하는군요. 아직 감정에 대한 분석은 부정확하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알고 있어.’

그 즉시 바루다는 보호자에 대한 분석에 들어갔고, 보고를 올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큰 병원에 올 때만 해도 이제 살았단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근데 환자 상태는 좋아지기는커녕 악화하고 있었다.

“치료……하는 거 맞냐고?”

그사이 보호자가 아예 수혁 앞으로 다가왔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서니까 꽤 컸다.

그렇지 않아도 지팡이를 짚고 있는 수혁에게는 꽤 위협적인 모습이었다.

“병이 뭔지도 모르면서 무턱대고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아버님.”

하지만 수혁 또한 더는 애송이 1년 차가 아니었다.

적어도 의학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결코 양보하지 않는 법을 배웠단 얘기였다.

“병이…… 뭔지도 몰라? 열이 이렇게 나는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의심되는 질환을 떠올릴 수 있었고, 그 질환이 맞는지 검사를 하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어제 그렇게 많은 검사를 하고서…….”

보호자는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불안에 떠는 것인지 모르겠는 얼굴이었다.

소리는 치고 있지만 별로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단 뜻이었다.

[확실합니다.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안심부터 시켜 드리기를 추천합니다. 그것도 안 되면 아예 협박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더욱이 수혁은 단지 추측만 하는 게 아니라, 바루다의 조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화를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아버님. 지금 하려는 검사가 가장 중요한 검사입니다. 이 검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어제 시행한 검사들을 통해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잠시 비켜 주시죠. 진단만 되면 치료는 바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어……. 그…….”

“비켜 주시죠. 진단이 느려지면, 치료도 느려집니다.”

“알겠……습니다.”

수혁은 바루다의 말대로 안심시키기와 협박을 적절히 섞어 보호자를 옆으로 비켜서게 했다.

“환자분. 이 검사는 조금 아플 수 있어요.”

“아……. 그래도……. 그래도 치료만 되면…….”

“네. 최대한 안 아프게 해 드릴게요.”

오히려 환자 설득은 쉬웠다.

워낙 열이 많이 나는 데다가, 정신 상태가 좋지 않다 보니 뭔가 다른 생각을 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대훈아. 너는 인턴 샘한테 현미경 하나만 들고 오라고 해. 나 이거 준비하는 동안.”

“혀, 현미경이요?”

“어. 여기서 바로 보고 진단 내릴 거야.”

“아……. 아, 네! 네! 선생님!”

대훈은 그게 가능한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이수혁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역시! 저 사람은 천재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였다.

그사이 수혁은 환자를 옆으로 눕게 한 후, 바지를 살짝 아래로 걷어 내렸다.

커튼은 친 상태긴 했지만, 보호자 마음엔 당연히 들지 않는 처사였다.

“검사를 위해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검사예요.”

“누, 누가 뭐랍니까.”

하지만 수혁이 말 한 마디를 보태자 불만 하나 터뜨리지 못했다.

수혁은 그렇게 보호자를 조용히 시킨 후, 골반 뼈 근처를 베타딘으로 슥슥 문질러 닦았다.

범위는 꽤 넓었는데, 혹시 감염이라도 생기면 정말 큰일이기에 그러했다.

“자, 마취하겠습니다.”

“네…….”

“따끔해요.”

그리곤 바루다의 조언을 따라 마취 주사를 이리저리 찔러 넣었다.

환자는 수혁이 말했던 것보다 통증이 훨씬 덜했기 때문에 아까보단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후.’

반면 주사기를 집어 든 수혁의 얼굴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어렵지 않습니다. 해 봤잖아요.]

‘어렵진 않지. 힘들어서 그렇지.’

[운동도 좀 하고 그러십쇼.]

‘내 몸 관리는 네가 한다며.’

[그건 죽지 않을 정도의 관리라고 보시면 됩니다.]

‘망할.’

골반 뼈를 뚫어서 골수를 빼내야 하는 검사이기 때문이었다.

그 자체도 어려웠지만, 일단 힘이 제법 들었다.

체중을 온통 실어야 할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루다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었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아니, 3도 정도 틀어서. 그래요. 그렇게.]

특히 이미 CT를 찍어서 골반 뼈 구조를 파악하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옳지. 나온다. 잘됐습니다.”

덕분에 수혁은 무슨 피 검사 하듯이 골수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어찌나 시간이 짧게 걸렸는지, 이제 겨우 인턴이 현미경 끌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을 지경이었다.

“어. 이거 나머지는 검체실로 내리고. 요만큼만 밀어서 지금 보자.”

수혁은 그런 대훈과 인턴에게 각각 지시를 내린 후, 곧장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을 화면이 잡혔다.

하지만 이미 수천 장의 골수 사진을 보아 온 바 있는 수혁과 바루다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조식구 탐식증이 맞네.’

[그걸 일으킨 것도 뭔지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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