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천재의 증명 (1)
“이수혁이다.”
“이번에 뭐라고? 조식구 탐식증? 뭐 그거 맞췄다며.”
“저 선생님 아니었으면 그 환자 죽었을 거라던데.”
“신현태 교수님이 앞에서 무릎 꿇었다는 소문도 있더라. HLH 프로토콜이 뭔지 몰라서.”
“대박……. 그게 뭔데?”
“나도 모르지. 교수님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알어.”
수혁이 응급실에 등장하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중 태반은 안대훈 때문이라고 보면 되었다.
녀석은 당시 현장에 같이 있었다는 감격과 더불어 수혁에 대한 미칠 듯한 존경심으로 인해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입을 털어 대고 있었다.
원래 말이라는 것이 그렇듯 사람을 거쳐 갈수록 과장이 더해지고 있었는데, 대략 1주일이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미쳤나. 신현태 교수님이 왜 무릎을 꿇어.’
그걸 듣고 있는 수혁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아마 속으로는 꿇었을 겁니다. 모르십니까? 이미 태화 의료원 최고의 천재는 이현종이 아니라 이수혁입니다.]
‘그야……. 뭐…….’
[물론 제 덕이죠.]
‘넌 좀…….’
[아닙니까?]
‘맞기는 맞는데…… 좀 조용히 해 봐. 환자 보러 왔잖아.’
수혁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끄럽게 구는 바루다를 진정시킨 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가 봐도 환자를 찾는 모양새였는데.
그걸 본 누군가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선배!”
우하윤이었다.
이제 3월 응급실도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 봤을 때보다는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일단 머리만 봐도 그랬다.
‘감았네.’
[대단하군요.]
‘뭐가?’
[제가 들여다본 인턴 때 수혁은 머리를 거의…….]
‘시끄러워, 인마. 집중해. 흉통 환자야, 흉통.’
응급실에 와서 제일 빨리 진료받는 방법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의사 부르고, 성질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 봐야 눈총만 받기에 십상일 뿐, 절대로 진료 순서가 바뀌진 않았다.
그냥 들어올 때부터 가슴을 부여잡고 들어오면 그게 장땡이었다.
흉통은 그만큼 모든 의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주요 증상이었다.
[그래 봐야 18살짜리 환자 아닙니까? 아마 별거 아닐 겁니다.]
‘그건…… 그건 그렇긴 하지. 그럼 빨리 보고, 나가서 맛난 거나 좀 먹자.’
[네. 하필 오프 15분 전에 콜이 와서…….]
‘그래도 연락이 오면 받긴 받아야지. 아무튼, 빨리 보자고. 너 말대로 별거 아닐 수 있어.’
물론 모든 환자의 흉통이 의사들의 비상한 관심을 끄는 건 아니었다.
너무 젊은 환자의 흉통은 대개 양성 질환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좀 덜한 경향이 있었다.
둘이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누는 사이, 하윤이 다가왔다.
“환자분은 저쪽에 계십니다.”
“아, 그래. 환자 히스토리는 좀 어때?”
수혁은 마침 응급실을 지나다가 콜을 받고 온 참이라 유선상으로는 이것저것 묻지를 않은 상황이었다.
딱 환자의 나이, 이름 그리고 증상인 흉통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렇게 통화를 나눈 장본인이 바로 우하윤이었기 때문에, 하윤은 부리나케 지금껏 자신이 문진한 바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 일단 환자분이 통증이 있다고 한지는 이틀째라고 합니다. 근처 내과 의원 방문해서 나이트로글리세린 1정을 투약받았으나 전혀 호전되지 않아서 온 거고요.”
“나이트로글리세린?”
나이트로글리세린은 협심증이 의심될 때 써 볼 수 있는 약이었다.
동네 내과에서 아무한테나 주는 약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자연히 수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 진짜 흉통인가.]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네. 기저 질환으로는 뇌전증이 있어서 페니토인 300mg 복용 중입니다.”
“페니토인? 얼마나?”
“14년…… 인가? 정도 됐다고 합니다.”
“지금 18살인데 14년이 됐다고?”
“네.”
뇌전증이 4살부터 있었다는 뜻이었다.
[소아 뇌전증이라. 음.]
수혁은 아까 응급실에 왔을 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얼굴로 하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걸었다.
“음……. 심전도는 어때?”
“아, 여기 있습니다.”
수혁은 여러 루트를 통해 내과 지원 예정인 인턴들에 대해 듣고 있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수석 졸업자이면서 내과에 지원하겠다고 나서 준 하윤도 끼어 있었다.
‘일 잘한다더니, 정말이네.’
[빠릿빠릿하군요.]
흉통 환자를 노티하면서 심전도를 찍지 않는 놈들도 있는 세상 아니던가.
그 와중에 심전도 뽑은 것을 들고 다니는 인턴이 빛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흠.”
수혁은 곧장 하윤에게서 넘겨받은 심전도를 들여다보았다.
몇 가지 정보를 그 즉시 파악할 수 있었다.
[정상 소견이군요.]
일단 심근경색은 아니었다.
‘박동수가 90이야. 운동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빨라진단 건……. 통증이 심하거나, 출혈이 있다는 거지.’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요.]
‘그렇지.’
다른 누군가가 보았더라면 그냥 정상이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판독에 정상이라고 쓰여 있으니까.
“심전도는 정상이었습니다.”
여기 있는 우하윤처럼.
“두고 봐야지. 임상 양상이랑.”
하지만 수혁은 약간의 의심을 더할 수 있었다.
지금껏 직접 쌓아 온 경험과 더불어 바루다와 함께 쌓아 올린 막대한 양의 지식 그리고 케이스 덕분이었다.
“저분입니다.”
“아.”
환자는 하윤의 손가락 끝이 위치한 곳에 앉아 있었다.
통증이 무척 심한지 눕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이건 그냥 근육통 소견은 절대 아니란 뜻이었다.
[눈 사이가 멀군요.]
게다가 환자의 특징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바루다가 방금 언급했던 것처럼 눈 사이가 무척 멀었다.
단순한 외모적 특징일 수도 있겠지만.
의학적 원인이 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었다.
“가족 중에 뭐 심장병 있으셨던 분은 없나요?”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수혁의 말에 환자는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고아예요.”
“선생님. 보육원에서 자랐다고 합니다.”
그와 동시에 하윤 또한 아까 자신이 물었던 바를 알려 주었다.
“아, 그렇군요.”
수혁은 자신과 같은 처지인 환자를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원래도 환자를 볼 때 최선을 다하는 편이었지만.
어쩐지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통증은 어떤가요?”
“가만히……. 가만히 있으면 좀 나은데……. 움직이면 엄청 아파요. 어지럽고.”
“어지럽다라.”
증가한 심박동 수.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통증.
그리고 어지럼증.
[나이를 고려하면 말이 안 되는데…….]
‘대동맥 박리를 의심할 만한 소견이지?’
[그렇습니다.]
대동맥 박리란 말 그대로 대동맥이 찢어지는 병이었다.
그렇다고 막 밖으로 터져서 피가 튀어 나가는 건 아니었고, 대동맥을 이루는 여러 벽 중 안쪽 벽이 찢어지면서 그 안으로 피가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즉 밖으로 관찰되는 출혈은 없지만, 상당한 양의 피를 잃은 것과 같은 상황이 된다는 뜻이었다.
환자의 심장박동 수가 올라가고, 어지럼증이 발생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질환이었다.
게다가 놓치게 되면 환자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병이기도 했다.
“일단……. 흉부외과 콜할래? 심초음파 좀 해 볼게.”
응급실에서 해야 할 일 중 가장 급한 것은 당장 놓쳐선 안 될 질환을 감별하는 것이었다.
해서 수혁은 심초음파를 준비하기로 했고, 하윤에게는 흉부외과 콜을 부탁했다.
인턴에게 다른 과 콜은 언제나 부담스러운 것이었지만.
하윤은 안대훈과 함께 이수혁을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게다가 내과 지원을 희망하는 인턴이었고.
“네, 선배. 근데……. 뭐라고 노티를 드려야 할까요?”
“아. 임상 증상 토대로 볼 때 대동맥 박리 의심된다고, 그렇게 말하면 바로 내려올 거야.”
“대동맥 박리.”
하윤은 수석 졸업한 우수한 재원이었지만.
아직은 기껏해야 인턴일 따름이었다.
그것도 이제 겨우 3월 턴.
그런 그녀에게 지금 상황에서 대동맥 박리를 떠올리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면 되었다.
‘역시……. 안대훈 선배 말이 맞아.’
덕분에 그걸 해 낸 수혁이 무슨 신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때마침 수혁 뒤로 응급실 조명이 떨어지고 있어서 후광도 있어 보였고.
“알겠습니다, 선배!”
“응, 그래. 부탁 좀 할게.”
수혁은 어쩐지 아까보다 씩씩해 보이는 하윤의 답을 뒤로한 채 다시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여전히 등을 펴지 못한 채 앉아서 헉헉대고 있었다.
통증이 매우 심한 모양이었다.
“검사를 좀 해 볼게요.”
“네? 아, 네.”
“누울 수 있어요?”
“누우면…… 아픈데…….”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아주 잠깐이면 돼요.”
“으……. 알겠어요.”
환자는 무척이나 싫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일단 눕기는 누웠다.
어마어마한 통증이 있는 상황 아니던가.
이런 상황에서 의사 말을 어길 수 있는 환자는 극히 소수라고 보면 되었다.
챠륵.
수혁은 환자가 눕자마자 커튼을 치고는, 옆 처치실에서 들고 온 초음파 기기를 매만졌다.
레지던트 2년 차 주제에 여느 순환기내과 펠로우를 연상시킬 만큼이나 능숙해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이현종 밑에서 돌 때는 진짜 심장 초음파 검사를 도맡아서 하기도 하니까.
말도 안 되는 특혜라고 수군덕대는 이들도 있기는 했지만.
수혁이 보여 주는 성과를 보고 나서는 모두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적어도 앞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게 좀 차갑습니다.”
“아, 네.”
환자는 차마 수혁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심장 초음파를 하려면 웃옷 목 있는 곳을 아래로 끌어 내려서 해야 했기 때문인데, 당연히 수혁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게 박리냐 아니냐.
그것만 중요했다.
[음! 대동맥 뿌리 부근이 확장되어 있군요.]
‘역류도 있어. 제대로 박동이 안 돼.’
[확실히 대동맥 박리를 시사하는 소견입니다. 좀 더 정확히 보려면 경식도 초음파를 보는 게 좋겠지만…….]
‘그건 나 아직 할 줄 몰라. 너무 침습적이야.’
[뭐, 이것만으로도 흉부외과 쪽에서는 만족할 겁니다. 더 검사가 필요하다면 알아서 진행하겠죠.]
‘그렇지. 음.’
사실 여기까지만 해도 내과의 역할은 일단 끝난 셈이었다.
흉통으로 온 환자의 원인 질환이 대동맥 박리였다는 것을 알아냈으니까.
수혁도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여기서 손을 뗐을 터였다.
하지만 이 케이스는 뭔가 좀 이상했다.
[원인이 대체 뭘까요?]
환자의 나이가 18살이지 않은가.
보통 이런 병이 생기기에는 너무 어린단 뜻이었다.
‘소아 뇌전증에 양쪽 눈 사이의 거리…….’
[선천성 질환의 가능성을 의심하는군요.
‘아닌 거 같아?’
[아뇨 타당한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의 척추 측만증도 동반이 되어 있으니, 더더욱 의심되긴 합니다.]
‘흠.’
이런 경우엔 기저 질환을 확실히 감별해 주는 편이 좋았다.
애써 대동맥 박리를 치료했는데, 환자가 다른 이유로 사망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일단 전신 검진을 하시죠. 어차피 흉부외과에서 오려면 시간이 좀 있습니다.]
‘오케이.’
해서 수혁은 급히 환자를 살피기 시작했다.
아까 살폈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지만 더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눈 사이의 거리와 척추 측만증 정도가 전부였다.
“아 해 보실래요?”
“네? 아, 네.”
다음은 목이었다.
다소 뜬금없는 요청이었지만 환자는 받아들였다.
응급실에서 의사가 뭘 시키는데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목젖이 두 개로 나뉘어 있군요.]
‘이만하면 뭔가 떠오를 거 같은데.’
[결체 조직의 약화를 일으키는 선천성 질환일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목젖이 두 개로 나뉘는 현상은 정상인에서도 대략 2% 확률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긴 했다.
하지만 대동맥 박리가 일어난 환자에서 관찰되는 목젖 두 개는 아무래도 좀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지금껏 쌓인 지식이 많아도 너무 많은 수혁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알겠다, 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