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3화 (83/1,303)

83화 천재의 증명 (3)

“흠흠.”

수혁은 바루다의 정신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하윤을 보니, 역시나 학교는 물론이요, 병원 전체에까지 유명할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1등 졸업에…… 일도 잘하지…….’

보통 1등 졸업을 한다고 해도 3월부터 두각을 나타내기는 무척 어려운 법이었다.

특히 3월에 도는 과가 응급실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아무리 똑똑한 애도 바보처럼 어정거리기 일쑤였으니까.

‘소문이 벌써 좋아.’

근데 하윤은 노티 하나만큼은 상당히 딱 부러진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때론 나름대로 임프레션도 잡아서 노티를 한다는 평인데, 정확도가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런 인재가 내과를 지원한다고 해서, 벌써 여러 교수님 입가에 미소가 드리워지고 있을 정도였다.

“뭐, 별거 아냐. 우연히 공부했던 내용이라.”

수혁은 그런 하윤이 자신을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본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제발…… 체통을…….]

바루다는 그런 수혁에게 끊임없이 조언과 핀잔을 먹였지만 별 소용이 있진 않았다.

이미 수혁의 온 정신은 바루다가 아닌 하윤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아……. 와 전 진짜 처음 들어봐요.”

다행히 하윤은 수혁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딱히 이성으로 좋아한다기보다는 사람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편이 더 맞기는 하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대화는 별 무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말판이랑 조금 비슷하기는 한데…… 로이스 디에즈 증후군은 훨씬 더 심해.”

게다가 내용 자체가 의학적인 내용이다 보니 더더욱 물 흐르듯 이어지고 있었다.

“왜 그런 거예요?”

“그건…….”

수혁은 그렇게 계속 대화를 하려다 말고, 응급실 스테이션 쪽을 돌아보았다.

응급실 레지던트 하나가, 하필이면 제일 무서운 털보가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연차가 수혁보다 위이긴 해도 수혁을 이렇게 대놓고 볼 수는 없을 터였다.

내과는 응급의학과 입장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노티를 해야만 하는 과이지 않은가.

수혁이 원장 아들이 아니더라도 굳이 척을 질 이유는 없다는 뜻이었다.

그 말은 역시나 좀 더 시간을 끌게 되면 하윤이 곤란해질 거란 얘기이기도 했다.

“근데 너 안 가 봐도 돼? 응급실 무섭지 않아?”

“아……. 저 이제 오프예요.”

“응? 아, 그러고 보니…….”

수혁은 그제야 하윤이 아까와는 조금 다른 차림새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 봐야 옷도 머리도 그대로에 신발만 크룩스에서 운동화로 갈아신은 참이긴 했지만.

이만하면 가운만 벗는다면 바로 나갈 수 있는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선배도 오프 아니세요?”

하윤 또한 수혁의 신발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평소라면 크룩스를 신고 있을 텐데, 수혁 또한 운동화 차림이었다.

“귀신같네?”

“방금 알았어요. 생각해 보니까 제가 오프 거의 바로 전에 선배 불렀더라고요. 죄송해요.”

“아냐, 아냐. 그럴 거 없지. 어차피…….”

수혁은 무조건 네 잘못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약간은 거칠지 않나 싶을 정도로 거센 기세였다.

[어지럽지 않아요?]

해서 바루다가 또다시 깝죽거렸으나, 지금까지 그랬던 거처럼 별 소용이 없었다.

수혁은 이미 온전히 하윤과의 대화에 정신을 쏟고 있었고.

게다가 지금은 시계를 보고 있었으니까.

원래 예정된 오프 시간인 8시에서 20분가량 지체되어 있었다.

그 말은 이 복잡한 환자를 불과 30분도 채 안 돼서 진단 내리고 합당한 과에 보냈단 뜻이었다.

“별로 안 늦었잖아.”

수혁은 자신의 실력에 새삼 놀라며 이렇게 대꾸했다.

자연스럽게 응급실을 빠져나가면서였는데, 하윤 또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었다.

사실 수혁은 지팡이를 짚어야 해서 보통 사람들보다는, 특히 성질 급한 보통의 의사들보다는 훨씬 느린 것이 정상인데도 그랬다.

‘역시 착해.’

[네 착합니다. 착한 거예요. 착각하지 마세요.]

‘아니, 누가 뭐래?’

[뭐라고 안 그러게 생겼습니까? 지금 얼굴 벌게가지고…….]

‘괜찮아 어두워서 안 보여.’

[어둡기는! 대낮처럼 환한데!]

바루다는 잠깐 자신을 상대해 주다가 휙 하고 돌아서 버린 수혁을 향해 투덜거렸다.

옛날 같았으면 이 정도만 해도 수혁이 개무시를 할 수는 없었을 텐데.

‘자, 이제 조용히 하시고.’

[조용히는 무슨!]

[씹어요? 어? 씹네?]

[이수혁!]

이젠 수혁의 내공이 쌓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바루다를 무시할 수 있게 된 참이었다.

심지어 바루다가 계속 떠들어도 별 변화가 없을 정도였다.

“혹시 약속 있으세요?”

하윤은 수혁이 속으로 바루다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질문을 던졌다.

수혁에게는 상당히 솔깃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속? 진짜 나 좋아하나?’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마냥 비난만 받을 정도는 아니지 않나 싶은, 그런 상황 아니겠는가.

[아니라니까요.]

물론 바루다의 의견은 달랐지만.

이런 것 따위는 수혁에게 더 중요한 정보가 되지 못했다.

의학적인 것 말고는 바루다도 틀릴 때가 있지 않은가.

[평상시에도 곧잘 맞거든요? 그리고 수혁……. 거울을 좀…… 보세요. 수혁은 박보검이 아닙니다…….]

팩트로 때리는 건 좀 아프긴 했다.

하지만 수혁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흔들릴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이, 이왕 같이 나갈 거면…… 제 말이나 들으세요. 조언해 드리겠습니다, 수혁.]

게다가 이제 바루다는 수혁과 자신이 운명 공동체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수혁이 어디 가서 대접받으면 자신도 대접받게 된다는 걸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수혁과 함께 레지던트 생활을 해 왔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걸 반대로 말하면 수혁이 병신 되면 자신도 병신 되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아니, 없어. 그냥 바람이나 좀 쐬려고 했지. 왜?”

해서 수혁은 상당히 적절한 대사로 하윤의 질문에 대꾸할 수 있었다.

[좋아요. 아시죠? 제가 수혁 머릿속에 있던 드라마, 영화 싹 분석한 거.]

‘전에도 그렇게 했다가 조진 적 있지 않냐?’

[그때는 수혁을 주인공에 맞춰서 그랬습니다. 이젠 안 그래요.]

‘이젠 어디에 맞추고 있는데?’

수혁은 하윤의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 바루다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차피 별로 좋은 얘기가 나오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그랬다.

[유해진?]

‘뭐……. 그 정도면 아주 나쁘진 않네.’

[닮았잖아요.]

‘닮았…….’

닮지는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때 마침 하윤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녁 드실래요? 저도 밥을 못 먹어서요. 어차피 기숙사 들어가면 혼자 라면이나 먹을 거 같은데.”

“아……. 너도 기숙사로 들어왔구나.”

“네. 시간 나도 도저히 집에 갔다 올 정신은 없더라고요.”

하윤은 자신도 모르게 집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태화 의료원과 마찬가지로 강남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감히 오프 때 항상 가 볼 엄두가 들지는 않았다.

근무 자체가 길기도 하거니와, 너무 힘들어서 그냥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서 더 자는 게 이득이었기 때문이었다.

수혁이야 집 자체가 없었던 사람이었기에 기숙사 삶에 대해서라면 기가 막히게 잘 알고 있었다.

“하긴 그렇지. 그럼…….”

수혁은 그대로 말을 이어 나가려다가, 바루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쓸데없는 말만 하고 있던 녀석이었지만 지금은 썩 영양가 있는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병원 바로 맞은편에 모던 한식집이 있습니다. 특이하게 와인을 내오는 집이니 분위기 좋을 겁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며칠 전에 이현종과 신현태의 대화 내용을 저장해 두었습니다.]

‘이건 왜 저장해? 의학 지식도 아닌데.’

[맛집이라지 않습니까. 잊었습니까? 그 둘, 병원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식도락가입니다.]

바루다는 있지도 않은 혀를 날름거리는 듯한 말투로 주절거렸다.

‘넌……. 인공지능이라는 애가 왜 이렇게 먹는 걸 밝히냐…….’

[미각에 대한 데이터 분석입니다.]

‘웃기지……. 아니다, 됐다.’

뭐가 되었건 이번엔 도움이 된 셈이었다.

수혁이 알고 있는 병원 근처 맛집이란 곳은 결국, 그가 학생 때 친구들과 드나들던 허름한 분식집이나 이름 없는 치킨집 또는 피시방이었으니까.

하윤도 여기 학생이었으니 그런 곳에 같이 가도 별 부정적인 반응은 없겠지만.

어쩐지 수혁이 그러기가 싫었다.

“하윤아, 그럼 요 앞에 ‘작’이라고. 한식집 있는데, 거기 갈래? 음식들이 퓨전이라 맵고 짜기보다는 좀……. 슴슴하다고 하더라.”

“아 전 처음 들어봐요. 근데 맛있을 거 같아요. 이름이 짧으니까 되게 있어 보이네요.”

“그렇지? 바로 건너니까 금방 갈 수 있을 거야.”

문제는 음식점이 딱 정해지자마자 마땅히 더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바루다도 쉽게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보통 이럴 때 이제 비가 와서 여주인공을 안던데.]

영상으로 연애를 배운 놈 아니던가.

심지어 알콩달콩한 감정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놈이기도 했고.

수혁은 잠시 내가 왜 이따위 놈의 조언을 들으려고 했을까 하는 한탄을 내뱉은 후, 언제든지 자신 있는 화제를 꺼냈다.

“아, 아까 로이스 디에즈 증후군 얘기하다가 말았지?”

바로 의학 관련한 얘기였는데.

다른 누군가와 만나면서 이런 얘기를 꺼냈다간 바로 차여도 할 말이 없을 법한 그런 주제였다.

의학도 지루한데, 이름도 낯선 로이스 디에즈라니.

“아, 맞아요.”

하지만 하윤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일반인이 아니었다.

의대를 무려 1등으로 졸업한 재원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과에 관심을 보이는 열혈 의학도였다.

“그건 어떤 병이에요?”

게다가 아까 자신이 초진으로 봤던 환자와 관련한 얘기이기도 하지 않은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이러면 바로 차이던데…….]

바루다는 그런 하윤의 반응이 이상한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 반해 수혁은 이게 바로 똑바로 된 반응이라는 듯한 얼굴로, 그러니까 아주 뻔뻔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혈관이랑 두개 안면 쪽 발달하고 관련한 유전자 돌연변이가 원인이야. 유전자 이름이 뭐더라, 아, 그래 TGFBR 1, TGFBR 2. 요거 두 개.”

“아…….”

유전자 이름까지 떠드는 사람이 소개팅에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바루다는 아마 김치로 뺨을 후려 맞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장면을 보기 전까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실제로 방영이 되었기에 가능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하윤은 그야말로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TGF 시그널하고 연관된 질환인가요?”

“어, 어 그렇지. 그렇지. 아는구나?

“그래서 결체 조직의 연결이 약해지는구나……. 주된 증상은 그럼 뭐예요?”

“일단 안구 격리증이 특징이고, 목젖이 두 개로 갈라지거나 좀 심하면 경구개가 나뉘어.”

“아……. 그렇겠네요.”

“또 대동맥이 꼬이거나, 대동맥 박리가 아주 잘 생기지. 대동맥이 단단하게 형성이 되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어.”

“어……. 그럼 예후가 안 좋겠는데요?”

당연한 일이었다.

대동맥이 약해서 생기는 박리라면 언제든지 재발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수혁은 여기까지 대화만으로 유추해 대는 하윤을 보며 잠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다가, 잠시 병원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다고 환자가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 환자를 떠올리며 대꾸해 주었다.

“좋지 않지. 그래도……. 딱 맞춰서 적절한 약을 쓰면 더 오래 살 수 있어.”

“어떤 약인데요?”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더 얘기하자. 배고프다.”

“아, 네. 선배. 선배랑 있으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어요.”

하윤의 말에 수혁은 또다시 행복 회로를 돌려 대기 시작했다.

‘진짜 좋아하는 거 아님?’

문제는 이번엔 바루다도 딱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사람이 좀 이상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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