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4화 (84/1,303)

84화 미국 가야 돼 (1)

‘잘한 거 같냐?’

수혁은 하윤과 저녁을 마치고, 하윤을 기숙사까지 데려다준 후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내내 바루다에게 의견을 물어 가면서였는데, 솔직히 바루다도 이렇다 할 의견을 내기가 좀 그랬다.

[모르겠습니다.]

‘몰라? 인공지능이 그런 것도 몰라?’

[하윤의 반응이 전형적이질 않습니다……. 원래 같았으면 아까 유전자 형질 얘기 꺼냈을 때 게임 끝났어야 합니다.]

바루다는 그가 지금까지 수혁의 머릿속을 뒤져 내 관람했던 수많은 드라마, 만화 그리고 영화 등등을 떠올렸다.

그중에서 수혁과 하윤, 이 둘과 같은 관계는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았다.

끊임없이 이상한 주제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남주.

그런데 그 남주를 나무라기는커녕 눈을 빛내는 여주.

영화로 나왔다가는 대번에 망할 거 같은 그런 스토리 아니던가.

‘분위기는 좋지 않았나?’

[그……. 그랬던 거 같습니다.]

현실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바루다가 보기에도 이번 저녁 식사는 상당히 괜찮았으니까.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대화의 태반이 질환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 상당히 이상했지만.

아무튼, 이어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일단 하윤의 표정이 무척 좋더군요.]

‘그렇지? 그랬다니까.’

수혁 또한 눈만 감으면 하윤의 미소가 떠오를 듯 선명했다.

거의 한 시간 넘게 그 얼굴을 보다 온 참이니 그럴 만도 했다.

바루다는 마치 꿈꾸는 듯 변해 버린 수혁을 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너무……. 들뜨진 마십쇼.]

평소와는 달리 톡 쏘는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걱정이 담뿍 묻어 있었다.

‘왜?’

[수혁, 다리가 불편하지 않습니까? 이성 관계에서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할 겁니다.]

‘음. 그건……. 그렇긴 하지.’

[제가 다리 관련한 연구를 찾아보고 있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치료가 어렵습니다. 오늘 분위기가 좋긴 했습니다만, 너무 기대하진 마십시오. 그러다 상처를 받을까 우려됩니다.]

상처받을까 우려가 된다니.

수혁으로서는 약간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하윤은 꿈도 꾸지 말라는 말투가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웬일이냐? 네가 날 그렇게 다 걱정을 해 주고?’

[데이터 분석 결과 실연당한 수혁의 지적 능력은 그 이전과 비교했을 때 절반도 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과거 데이터에 나와 있는 사항이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죠.]

‘이 새끼가 아주 정성껏 돌려 돌려 까네?’

[까는 게 아니라…….]

‘일단 있어 봐. 나라고 뭐 연애 경험이 없는 줄 아냐? 그냥 호의 정도라는 건 나도 안다고.’

수혁은 잠시 예과 시절 연애 경험을 떠올리다가, 이내 병동 스테이션 컴퓨터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1년 차 때부터 살고 있다시피하고 있는 당직실이 있는 그 병동 스테이션인데, 이젠 이 컴퓨터도 거의 수혁 개인 컴퓨터처럼 되고야 말았다.

원장 아들이라는데 누가 감히 와서 사용하겠는가.

해서 늘 자리가 비어 있었고, 이렇게 수혁이 오면 곧장 수혁이 쓸 수 있었다.

‘환자 CT나 좀 보자.’

[아, 아까 그 환자 말씀이시죠? 좋습니다.]

‘어이구……. 범위가…….’

[일반적인 대동맥 박리가 아니군요. 역시 로이스 디에즈 신드롬에 합당한 소견입니다. 수술 후 조직 검사에서도 아마 비슷한 소견을 보일 겁니다.]

‘그러고 보니 수술은 잘되고 있나?’

수혁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환자 차트를 띄웠다.

간호 기록을 보니 벌써 수술방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아직 종료가 뜨진 않은 상황이었다.

[어떻게 진행이 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

‘그러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수술방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망할 놈의 다리가 문제였다.

억지로 들어갈 수야 있겠지만.

너무 힘겨운 일이었다.

들어가서 지팡이를 짚으며 돌아다니는 건 민폐였고.

‘일단은 기다려 봐야지. 아마 새벽이나……. 아침은 되어야 끝날걸.’

[그럴 겁니다. 대동맥 박리가 이만큼 진행한 경우엔 재건술을 해야 할 텐데, 평균 수술 시간이 대략 8시간 이상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자자.’

해서 수혁은 애써 쓰린 속을 달래며 잠들었다.

꿈에 어렴풋이 두 다리로 뛰는 꿈을 꾸었는데, 깨고 보니 역시 개꿈이었다.

신경이 다친 통에 굵기마저 가늘어져 버린 왼쪽 다리만 덜렁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 다리를 볼 때마다 그 사고가 떠오르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마다 사고가 없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냐……. 그랬다면 바루다를 만날 수 없었을 거야.’

물론 한 사람의 인생에 있던 다리는 아주 중요한 신체 기관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과 의사의 길을 택한, 그것도 세계 최고의 내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게 된 수혁에게는 바루다가 더 소중했다.

실제로 이 바루다 덕에 온갖 혜택이란 혜택은 다 받고 있지 않던가.

타닥.

타닥.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혁은 일단 머리만 대충 감아 낸 후, 당직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곤 곧장 자신의 자리처럼 쓰고 있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환자 수술이…….’

[끝났군요. 3시간 전에.]

수혁이 우울한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귀신같이 입을 다물고 있던 바루다가 비로소 끼어들었다.

수혁은 잠시 이 녀석이 좀 귀여워졌다는 생각을 하다가 이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단 테이블 데스는 아니네. 중환자실로 갔어.’

[수술 기록을 보시죠.]

‘오케이.’

[상행 대동맥 2.6cm가량 재건하고……. 대동맥 밸브도 재건했군요. 하행 대동맥도 7.2cm 재건. 엄청 큰 수술이었습니다. 확실히 태화 의료원 흉부외과 수준이 높군요. 이런 수술을 해서 살려 놓다니.]

수혁은 그게 다 이현종 덕분이라는 말을 하려다 말고 계속 수술 기록이나 읽어 나가기로 했다.

‘육안으로도 대동맥의 확장이 동반되었다고 하는데……. 음? 아직 유전자 검사 의뢰가 안 들어갔잖아?’

[새벽에 끝난 수술이라 그럴 수 있습니다. 혹시 모르니 협진 노트에 의견 남겨 주시죠.]

‘아, 그게 좋겠네.’

비록 수혁은 지금 혈액종양내과를 돌고 있는 상황이긴 했지만.

조태진 교수 앞으로 입원해 있는 환자들만 보기엔 조금 많이 심심한 상황이었다.

루틴한 환자들 보는 것 정도는 이제 수혁이나 바루다에게는 너무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수혁은 약간 가서 고생한다는 느낌으로 환자를 찾아다니고 있었는데.

바루다는 데이터 수집 목적의 배회라고 명명했다.

<로이스 디에즈 증후군 감별을 위한 유전자 검사 시행하시고, 해당 질환일 가능성이 임상적으로 무척 높으니 일단 ‘안지오텐신 리셉터 블록커’를 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수혁이 막 이렇게 적어 놓고 있을 때쯤, 그의 뒤에 서 있던 누군가가 헛기침을 해 댔다.

고개를 뒤로 돌려 보니, 이현종이 서 있었다.

아주아주 재밌는 것을 보았다는 표정을 지은 채였다.

“로이스 디에즈 증후군? 이런 환자가 있었어?”

‘그런 게 있었으면 바로 나한테 알렸어야지.’ 뭐 이런 비슷한 표정 또한 짓고 있었다.

수혁이 바루다의 요구 반, 자신의 필요 반에 의해 환자를 찾아다니고 있다고 한다면.

이 양반은 순전히 자기의 의지로 반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었다.

“아, 네. 어제 오프 나가기 전에 응급실에서 잠깐 봤습니다.”

“유전자 검사도 한 게 아닌데…… 진단이 되디?”

“환자가 흉통을 주소로 왔는데, 대동맥 박리가 상행 대동맥 그리고 하행 대동맥 거의 전반에 걸쳐 있었습니다.”

“얼굴이나 이런 데 특이점도 있었고?”

“네.”

“흠…….”

이현종의 표정이 점점 더 흥미롭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이쪽저쪽으로 갸웃거리다가 이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오전 스케줄 뭐 있지?”

“아, 원장님. 오늘 진료부 회의 있으십니다.’

전화를 받은 이는 비서였다.

비서는 그야말로 짙은, 짙은 한숨을 두 번인가 내쉬고는 진료부 회의란 아주 커다란 일정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보통의 원장이라면 여기서 알았다고 하고 끊겠지만.

이현종은 달랐다.

“일단 나 없이 시작 좀 하고 있어.”

“네? 그건 안 됩니다! 원장님 없이 무슨 진료부 회의를 해요.”

“나 어차피 오늘 회의 있었던 것도 모르는 사람이야. 들어간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어?”

“아니…… 그…….”

실로 맞는 말이긴 했다.

여태 이현종은 회의를 잘 안 들어오기도 했지만.

본인이 주관해야 하는 회의에서도 졸 정도로 무심한 편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아주 여러 차례 싫은 소리를 들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이현종의 논리가 워낙 단단했기 때문이었다.

“돈 버는 건 경영 전략부에서 알아서 하라고 해. 뭘 진료부에서 돈 얘기를 해. 다들 진료 보느라 바쁜데. 나도 지금 뭐 딴 거 하러 가는 게 아니고 환자 보러 가는 거니까, 알아서 해. 알아서.”

“아니……. 원장님…….”

“갈 때 샌드위치랑 커피 사 갈게. 햄 모차렐라 치즈로. 그거 젤 좋아하지?”

“그건 맞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나 간다.”

“원장님!”

이현종은 그렇게 막무가내로 각 과 과장들이 모이는 회의를 제치곤 재차 수혁을 바라보았다.

수혁은 처음 이현종을 볼 때부터 이미 이 원장이라는 작자가 자신과 함께 환자를 찾아가 볼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만 한 회의까지 제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약간은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해? 안내해.”

이현종은 그런 수혁을 보며 너무도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수혁으로서는 조금 곤란한 상황이었다.

“어……. 네. 근데 흉부외과 중환자실에 있는데…….”

“어? 왜? 우리가 안 받았어?”

이현종은 심장 관련한 환자는 다 자기가 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흉부외과 쪽도 충분히 황당하게 생각하겠지만.

수혁이 보기에도 퍽 황당했다.

“수술해서요. 우리가 수술하는 과는 아니잖습니까.”

말 그대로 내과지 않은가.

왜 수술 케이스까지 건드는 건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수술만 하고 나머지 관리는 우리가 하면 되지. 중환자 우리보다 잘 보는 과가 있어?”

물론 이현종의 논리는 언제가 완벽했다.

아니, 완벽하다기보다는 억지를 쓸 수 있었다.

“그거야……. 그렇긴 하죠.”

게다가 이현종, 이수혁 한정으로 하면 사실이기도 했다.

현재 이 커다란 태화 의료원을 통틀어 봐도 여기 있는 이 둘만큼 환자를 잘 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일단 가서 보고. 받아 오자.”

“저 근데……. 저 아직 혈종 도는데.”

“응? 아 맞다. 너 아직도 레지던트지.”

“아직도라뇨……. 이제 2년 차인데. 대외적으로는 그래도 아들인데 너무 관심 없으신 거 아니에요?”

“하하. 너무 잘하니까 그렇지. 하하.”

이현종은 민망하다는 듯 껄껄 웃고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전화를 받은 사람은 역시나 조태진이었다.

“어, 태진아.”

“네, 원장님.”

“너 어디냐?”

“저……. 이제 병동 회진 돌려고 병동 가고 있어요.”

“수혁이랑?”

“네. 아, 얘랑 도니까 요번 달은 아주 편한데요?”

조태진은 아주 쌩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수혁은 그냥 교수라고 보면 되었으니까.

수혁이 맡은 환자는 정말이지 단 한 순간이라도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어……. 그래, 오늘 회진은 너 혼자 돌아.”

“네?”

“내가 수혁이 잠깐만 빌릴게.”

“아니……. 무슨, 안 돼요.”

“오늘 하루만 빌릴게.”

“아니…… 아니, 왜요!”

“떽. 원장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래. 너도 현태 닮아 가냐? 막 개겨?”

“아니 그건 아니고요.”

“그럼 끊어.”

“어…….”

그리고 이현종은 그런 조태진의 기분을 완전히 잡쳐 놓은 후 수혁을 바라보았다.

남을 기분 나쁘게 하면 할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건지.

아니면 희소병 환자를 보러 가게 된 사실이 좋은 건지.

아주 밝은 얼굴이었다.

“다 됐다. 가자, 수혁아.”

“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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