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6화 (86/1,303)

86화 미국 가야 돼 (3)

덜컥.

결국, 병리과 문은 열리고야 말았다.

바로 앞에서 원장이라는 사람이 뻗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병리과 과장으로서는 도저히 이 이현종과 이수혁을 홀대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개인적인 이유였는데 동시에 절대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회의 중인데…….”

“NEJM 실어다 준 게 누군데, 회의를 운운하고 있어.”

“에이 그건……. 저도 동참하긴 했잖아요.”

“너 나 아니었으면 거기 실었겠냐?”

“그건……. 그건 아니긴 하죠.”

“다음에 또 싣고 싶지? 그럼 말 들어.”

“네네. 알겠습니다, 원장님.”

일전에 수혁이 알아 낸 관상동맥의 해부학적 변이에 대한 논문에 과장의 이름도 실리지 않았겠는가.

병리과가 워낙에 해부학적인 지식이 깊기도 하고, 또 그에 대한 자료가 방대해서였는데.

실제로 그 기여도가 어마어마하지는 않았더랬다.

그 사실을 과장 또한 알고 있었기에 설설 기고 있었다.

“이거 환자 등록 번호거든? 검체 좀 보여 줘. 현미경은 우리가 알아서 볼게.”

“아, 네. 그…….”

“왜 이렇게 헤매?”

“아니, 제가 직접 슬라이드 찾아본 건 워낙 오래돼서요.”

“적폐네, 적폐야.”

이현종의 말에 과장의 표정은 상당히 볼 만해졌다.

지금 적폐란 단어에 어울릴 법한 행동을 하고 있는 건 과장이 아니라 이현종이었기에 그러했다.

하지만 진짜 적폐는 눈앞에서 대놓고 운운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꾹 참았다.

기껏해야 수혁의 동정 어린 눈빛이나 받을 수 있을 따름이었다.

[이현종이 진짜 세기는 세네요.]

‘실력 있는데, 지위까지 높잖아. 학번도 높고.’

[그럼 수혁도 높아지면 저렇게 되는 겁니까?]

‘왜. 갑질하고 싶어?’

[수혁은 하기 싫나요?]

‘그건…….’

당연히 아니라는 말이 나올 거 같았는데.

막상 듣고 보니 선뜻 나오지 않았다.

갑질을 당해 보기도 하고, 소소한 갑질을 해 보기도 하다 보니 확실히 좋은 게 좋았기 때문이었다.

[노력합시다, 우리. 다행히 실력은 제가 받쳐 주니까요. 수혁이 처신만 제대로 하면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니, 너 약간 의도가 불순해진 거 같은데.’

[제 유일한 입출력자인 수혁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해 두죠. 물론 세계 최고의 진단 및 치료 목적 내과 의사를 만들겠다는 목표는 흔들림 없습니다. 수혁도 이 점은 양지해 주십시오.]

‘나도 그렇거든?’

둘이 이러쿵저러쿵 싸워 대는 사이, 레지던트 하나가 뛰어와 이현종을 현미경실 안으로 일단 데려다 주었다.

현미경은 무려 너덧 명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고, 디지털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설비도 갖추고 있었다.

원래 일하는 곳에서 쓰는 현미경보다 훨씬 좋았는데 이건 교육용이었다.

연구용이기도 했고.

“검체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 그래. 고마워.”

“아닙니다, 원장님.”

레지던트는 이현종과 수혁이 각자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밖으로 향했다.

과장은 같이 나갈 생각을 하기보다는 그냥 이현종 원장 옆자리에 앉았다.

약간 황당한 일이었다.

회의네 뭐네 하고 있었으니까.

“뭐야?”

“아시잖아요. 사실 회의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할 말도 없어요. 매주 똑같은 사람끼리 하는 거 뭐…….”

“그걸 핑계로 문을 안 열려고 했어?”

“죄송해요. 근데 대체 뭔 검체 때문에 온 거예요?”

과장은 그렇게 물으면서 수혁의 눈치를 살폈다.

생각해 보니까 이 두 사람 콤비가 현재 태화 의료원 최고의 천재 콤비이지 않던가.

한가한 시간도 아니고, 예정된 시간도 아닌데 이렇게 둘이 갑자기 들이닥쳤다는 건 반드시 뭔가 있다는 뜻일 터였다.

‘또 NEJM……?’

1 저자나 교신저자를 받긴 어렵겠지만.

NEJM의 2 저자라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군요.]

‘그러니까. 이건 내 눈에도 훤히 보이네.’

바루다는 그런 과장의 얼굴을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수혁도 남몰래 동참했으나 결코 티를 내지는 않았다.

[잘해 주긴 합시다. 아무리 이현종이 석좌 교수라 해도 정년이 10년 안 남았습니다. 그때까지 자립할 힘이 있어야 합니다.]

‘자립할 힘이라.’

신현태도 있고 조태진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현종처럼 멱살 딱 잡고 버텨 주진 않을 터였다.

아니, 그럴 만한 능력이 되지 못했다.

그들은 내과 안에서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교수들이었으니까.

물론 앞으로 더 클 수도 있겠지만, 이현종만큼 클 수 있냐고 하면 고개가 절로 저어졌다.

[네. 여기저기 발 넓은 교수가 되어야 합니다. 병원은 실력만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아냐?’

[수혁이 보는 걸 저도 보니까요.]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약간은 밑도 끝도 없는 듯한 말이기도 했고.

하지만 수혁도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병원 정치라는 게 사실 진짜배기 국회 정치랑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정치질이 교수의 행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해서 수혁은 최대한 친절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과장은 당연하게도 그 미소에 더 밝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로이스 디에즈 의심되는 환자가 있다고 해서. 아직 유전자형은 안 나왔는데, 검체 어떻게 보이나 좀 보려고. 사실 나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거든.”

“아? 그럼 케이스 리포트……?”

“응? 아니 무슨 모든 환자를 다 논문으로 연결해. 그런 건 아니고. 그럴 정도로 드물긴 한데…….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병이야. 그 병인지만 알아보면 어렵지 않아.”

“아…….”

과장은 눈에 띄게 실망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이내 나중에라도 또 논문을 쓸 기회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허허 웃어 보였다.

‘저기 이수혁이라는 친구가…… 장난 아니라고 했었지.’

과장은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 전.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이현종이 아직 레지던트였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이현종 주변에 있던 교수들은 모두 노가 났더랬다.

논문 쓰는 기계가 있는데, 그게 자기 아랫사람이 아니던가.

이현종 덕에 부교수에서 정교수 단 사람이 한 트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 친구가…… 포스트 이현종이 되지 않으려나.’

과장은 그런 기대를 품으로 계속 따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지간한 레지던트였다면 과장씩이나 되는 교수의 이러한 어필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렸을 텐데.

[애쓰네요.]

‘그러게. 참……. 애쓰시네.’

수혁에게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이미 이현종이나 신현태 등등에게 이보다 더한 어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깄습니다.”

그사이 레지던트 하나가 검체를 들고 왔다.

슬라이드라고 해서 달랑 한 장이 아니라, 아주 여러 장이었다.

검체가 워낙에 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아, 줘 봐.”

“네.”

“수혁아 네가 조정할래? 나 사실 현미경 잘 못 봐.”

이현종은 그렇게 전달받은 슬라이드를 수혁에게 전해 주었다.

옛날 같았으면 한 번쯤 겸양을 떨었을 수혁이었으나, 이젠 더 그렇지 않았다.

[어필하시죠. 나는 천재다, 한번 외치세요!]

‘미친놈아.’

물론 바루다의 말을 따라 난데없이 ‘천재다’라고 외치지도 않았다.

“네. 제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저 담담하게 슬라이드를 받아 현미경 위에 올려놓고는 능숙하게 배율을 조정해 들어갈 따름이었다.

[그래요, 이렇게.]

당연히 바루다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였다.

의학적인 지식 같은 거야 수혁도 신경 써서 최대한 기억을 하려고 하지만.

이런 단순 기술 같은 것까지 기억하는 건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이놈 봐라.’

물론 남들은 바루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수혁이 대단해 보일 뿐이었다.

이현종이야 그냥 그렇다 치고 있었지만.

과장은 상당히 놀란 상태였다.

‘논문만 잘 쓰는 줄 알았는데…… 현미경도 잘 보네?’

어지간한 레지던트들보다 더 빨리 현미경을 조정하고 있는 데다가, 딱 중요해 보이는 지점을 잡아 냈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대동맥 단면입니다. 벌써 좀 이상해 보이는데요?”

“그래? 정상이랑 달라?”

수혁의 말에 이현종이 질문을 던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병리과는 그의 전공이 아니었으니까.

그렇다는 것은 곧 내과 레지던트에 불과한 수혁이 이걸 아는 건 정말 이상하다는 얘기였는데.

수혁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네, 여기 지금 40배율인데…… 일단 400배율로 올려서 보면……. Medial myxoid degeneration이 아주 명확하게 보입니다. 즉 연결 조직이 약화되어 있습니다.”

“맞아?”

이현종은 무조건 맞겠지 하는 얼굴로.

그러니까 아주 뿌듯한 얼굴로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에 반해 과장은 정말이지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쳤나.’

일단은 욕이 튀어 나갈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 낸 것이 제일 큰 성과였다.

방금 수혁의 표현은 실로 정확하다 못해 대단한 수준이었으니까.

‘이걸……. 이 소견이 그렇다는 걸 어떻게 안 거야.’

세포 단위로 일어나는 변화를 알아맞힌 셈이었다.

솔직히 지금 1년 차부터 4년 차까지 다 데려온다고 해도, 방금 수혁이 말한 것처럼 정확하고 또 빠르게 정답을 맞힐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교수인 자신도 수혁보다 조금 늦게 맞힌 거 같았으니까.

“맞냐고.”

이현종은 아까보다도 더 확신에 찬 얼굴로 과장을 바라보았다.

과장의 얼굴에 피어난 표정을 보아하니, 과연 수혁이 맞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아 네. 맞습니다.”

“병리도 잘하네.”

“그, 그러니까요. 뭐……. 따로 가르치나요?”

“말이 되냐? 내가 할 줄 모르는데 뭘 가르쳐.”

“그럼 어떻게…….”

“나도 몰라, 쟤는 진짜 그냥 천재야.”

“그……. 그렇네요.”

과장은 뭔가 다른 말을 하려다 말고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배우지 않은 것을 안다는데 천재지 그럼 달리 뭐라 불러야 한단 말인가.

이현종은 그런 수혁이 자기 제자라는 게 너무도 자랑스러운 듯 껄껄 웃다가, 다시 수혁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니까. 이 환자 로이스 디에즈 맞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좋아. 진짜 이렇게 보이는구나. 음. 거참 세상엔 신기한 병이 많단 말이지.”

이현종은 그렇게 말을 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신기한 병에 대한 소견은 다 봤으니 되었다는 얼굴이었다.

“뭐 해? 가자, 이제.”

“아, 네.”

수혁은 진짜 이렇게 남의 과에 폭풍처럼 왔다가 별말도 없이 가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는데.

뭐 어쩌겠는가.

원장인데.

그것도 역대 원장 중에서 제일 힘이 센.

과장조차도 별말 못하고 인사만 올릴 따름이었다.

끼익.

그렇게 이현종은 깡패처럼 들어왔다가 강도처럼 방을 나섰다.

그리고 내과 병동이 있는 암센터 쪽을 향해 되돌아가기 시작했는데, 속도가 그렇게 빠르진 않았다.

애초에 별로 서두를 이유도 없거니와.

수혁이 느렸기 때문이었다.

둘이 대화할 시간이 상당히 생겼다는 뜻이었다.

“신기한 병이지?”

“아, 네. 근데 예후가 좋지 않아서…….”

“빨리 진단해서 약을 줬으면 또 모르겠는데…… 이미 한번 터져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당연히 처음에는 의학 얘기였는데.

돌연 이현종이 주제를 틀었다.

비서에게 걸려 온 전화를 끊고 나서였다.

“아……. 맨날 회의야. 아.”

“왜 그러세요?”

“내가 얘기했었나?”

“네?”

“너 미국 가는 거 있잖아.”

“아, 네.”

“그거 승인 났어. 다음 달 신현태 스케줄이지? 그때 미국 가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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