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7화 (87/1,303)

87화 미국 가야 돼 (4)

“네?”

다음 달이라면 결국, 다다음 주라는 얘기였다.

수혁의 눈이 동그래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8월인 줄로만 알고 준비를 안 하고 있었으니까.

“뭘 그렇게 놀래? 미국 가는 건 알고 있었잖아.”

“그건……. 그야 그렇지만……. 8월이었잖아요.”

“아……. 그랬나?”

이현종은 태화 의료원 내과 의국이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 병원과 자매결연을 맺은 이래.

그러니까 지난 10년간 매번 8월에 보내 왔었다는 사실을 곧장 떠올리지는 못했다.

매번 가장 우수한 레지던트를 보내 오긴 했지만.

심지어 그중에서 무려 9명이나 되는, 즉 90%에 달하는 인원이 지금 이 태화 의료원 교수 또는 교수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종의 개인적인 관심을 끈 이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자신이 제일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 무리는 아니었다.

“예. 저 그래서…… 그때 휴가까지 맞춰 놨는데…….”

“그랬어? 그럼 그것도 옮겨. 너 언제 미국 가 보겠냐, 또.”

“아니…….”

원장이야 휴가 옮기는 게 쉽겠지만.

일개 레지던트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 병원이라는 곳은 그야말로 마른오징어도 쥐어짜면 물이 나온다는 심정으로 사람을 굴려 대는 곳이지 않은가.

그중에서도 레지던트는 말 그대로 거주민 수준으로 굴려 댔기 때문에 사람 하나 빠지는 게 엄청 큰일이었다.

“걱정 말고. 현태가 알아서 처리하기로 했어.”

“아, 과장님도 아시는 거예요?”

“너 왜 그 말 하면서 안도했다는 표정이 되냐?”

“아니……. 그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현종보다는 신현태가 이런 종류의 일 처리하는 데 있어서는 훨씬 신뢰가 갔다.

이현종은 약간 보통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다다음 주야. 그……. 너 외국 나가 본 적 있냐?”

그랬기에 수혁의 다소 무례할 수 있는 반응에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신 참 스승의 마음으로 질문을 던졌다.

돌연 수혁의 어려운 가정형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요즘 애들이 흙수저네, 흙수저네 떠들어 대지만…….’

적어도 의대생 중에 수혁만큼 집안이 어려웠던 애는 없을 터였다.

이현종 때와는 달리 부모에게 아무 도움 받지 않고 의대에 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되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수혁이 고아에 보육원 출신이었다는 걸 알았을 땐 정말로 놀랐더랬다.

의대에 들어온 것도 놀라웠지만, 수혁에게는 짙은 그늘이 져 있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머리가 좋은 것보다도…….’

멘탈이 강한 것이 수혁의 가장 큰 강점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다리 다친 것도 신경 쓰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을 정도였으니.

때문에 이현종을 비롯한 다른 교수들은 수혁의 어려운 사정을 자주 깜빡하곤 했다.

다행히 이번엔 그나마 세심한 편에 속하는 신현태가 귀띔을 해 줘서 미리 챙길 수 있었다.

“아, 아뇨.”

역시나 수혁은 외국에 나가 본 경험이 전혀 없었다.

바루다 또한 토종 인공지능이었기 때문에 외국에 대한 지식이라곤 수혁이 지금까지 본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알아낸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외국에 나가기 위해서 뭐가 있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비자는 챙겼어?”

“비자요?”

“여권은.”

“아.”

“안 물어봤으면 사고 칠 뻔했네.”

이현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대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이제 오세요?”

비서였는데, 상당히 반가워하고 있었다.

“아니, 이리로 좀 와 봐.”

“오늘 회의라니까요?”

“안 끝났어?”

“아직요. 그러니까 빨리 와요.”

“네가 와야 하는데. 지금 급한 일 터졌어.”

“하아.”

비서는 이현종과 상당히 격 없이 지내는 편이었다.

이현종이 워낙에 그런 성격인 데다가, 이 비서와 같이 일한 지가 오래된 덕이었다.

때문에 이현종은 비서에게 익숙했고, 비서 또한 이현종에게 익숙했다.

“뭔데요.”

해서 비서는 어차피 더 말을 섞어 봐야 전혀 소용없을 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그 우리 수혁이 일인데.”

“이수혁 일이요?”

수화기 너머로 무언가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비서가 몸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 참, 여기 별관에서 암센터 가는 길.”

“네네. 갑니다……. 뭐 준비해 갈 건 없어요?”

“음…….”

이현종은 잠시 수혁을 돌아보았다.

“너 지갑 있지?”

“지갑이요? 네.”

“그럼 키만 챙겨 와.”

“네.”

비서는 가타부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이현종이 시킨 대로 키를 챙겨서, 오라고 한 곳으로 올 뿐이었다.

“아, 왜요.”

표정이 그렇게 좋진 않았지만.

“넌 비서가 되어서는 원장 앞에서 그렇게 얼굴을 구기냐?”

“원장이 원장 일을 안 하니까 그렇죠.”

“어이구.”

맞는 말이긴 해서 이현종은 더 뭐라 하진 않았다.

대신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얘, 다다음 주에 미국 가야 하는데. 비자도 없고 여권도 없어. 해결 좀 해 줘. 건강 검진 서류는 어차피 뭐 작년에 한 거 있어서 될 거야.”

“네? 비자랑 여권?”

“그래. 어렵지 않잖아.”

“그럼 원장님이 해 주시지.”

“난 회의 들어가야지.”

“와……. 진짜……. 와…….”

비서는 차마 욕은 하지 못하고 원장과 수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원장을 바라볼 때는 ‘이게 사람인가’ 하는 얼굴이었고, 수혁을 바라볼 때는 ‘이게 사람인가요?’ 하는 얼굴이었다.

물론 이현종은 남의 눈 따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곧장 자리를 떴다.

정말 저대로 회의를 들어갈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비서는 원장이 시킨 일은 해야만 했다.

“그, 이수혁 선생님 맞으시죠?”

“네. 아이고, 괜히 저 때문에.”

“아뇨, 아뇨. 원장님 원래 그래요. 그리고 진짜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그렇구나.”

“일단 비자부터 해결하죠.”

“네, 대사관으로 가나요?”

“음.”

비서는 수혁의 말을 듣고는 아, 이래서 자기를 붙여 주었구나 하는 얼굴이 되었다.

원장 앞에서도 딱히 표정 관리를 안 했던 사람인지라 수혁 앞에서는 더더욱 거침이 없었다.

“왜, 왜요?”

“그……. 단기 체류는 그냥 여기서 신청하면 돼요. 아, 여권이 없구나. 하…….”

그는 잠시 한숨을 푹 쉬더니, 차 키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원장님 차 타고 갑시다. 다행히 여기 강남구청은 3일이면 나오니까……. 얼추 시간은 될 거예요.”

“아, 네.”

수혁은 그렇게 비서를 따라 이현종의 차를 탔다.

[와우, 차 좋네요.]

‘그러게. 확실히 원장이 좋긴 좋다.’

[할 수 있습니다. 40대 원장 해 보죠.]

‘너 왜 이렇게 세속적이 됐어…….’

[그래서 싫어요?]

‘아니, 좋다고.’

태화 의료원의 원장은 곧 태화 그룹의 임원 대우를 받는 사람이란 뜻이었다.

당연하게도 에쿠스 차량이 지급되었다.

원래는 기사도 지원이 된다는데, 이현종은 그 돈을 그냥 비서에게 더해 주고 있었다.

비서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연봉을 받게 된 셈이었고, 그게 그가 이현종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자, 갑니다.”

“네.”

수혁은 그렇게 비서의 도움을 받아 여권도 발급받고, 비자도 발급받았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좋은 일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수혁이나 바루다에게는 그러했다.

[군 면제군요, 수혁.]

‘그러게. 다리 다친 게 또 이렇게 전화위복이 되네. 원래도 뭐……. 대강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국가기관에서 공식으로 인정을 받아서 그런가 좀 더 기분이 좋았다.

구청 직원에 따르면 수혁은 당연히 현역 면제인 데다가, 예비군은 물론이고 민방위도 면제였다.

병원 차원에서 장애 등록을 해 주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친구들이 부러워하겠네.’

수혁은 손에 들린 10년짜리 복수 여권을 촤라락 펼쳐 들고는 중얼거렸다.

확실히 10년이라 그런가, 친구들이 들고 다니던 1년짜리 단수 여권보다 훨씬 두꺼웠다.

[내일이군요. 짐 다시 한번 챙기시죠.]

‘아, 그럴까. 이것도 도와주셔서…… 참 감사하네.’

바루다의 말에 침대에 누워 있던 수혁은 벌떡 일어나 비서가 사다 준 캐리어 가방을 뒤적거렸다.

하도 옷이 없어서 캐리어를 사면서 옷도 같이 사야만 했더랬다.

그 외에도 변압 코드에 노트북을 비롯한 각종 기기들까지 죄다 들어가는 기내용 캐리어였다.

[전화 오는데요?]

그렇게 한참을 설레는 마음과 함께 짐을 뒤적거리다 보니, 바루다가 불렀다.

가운 호주머니에 넣어 둔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은 당직이 아니었으니까.

[방금 그 생각 굉장히 슬펐습니다. 당직이 아니면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라니…….]

‘시끄러워, 인마. 네가 맨날 공부하라고 닦달해서 그런 거 아냐.’

[그런 것치고는 원래도 딱히 가깝게 지내는 동기가 없지 않나요?]

‘몰라.’

수혁은 바루다의 멘탈 공격을 훌훌 털어 내고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1년 차 안대훈이었다.

‘아, 해결 안 되는 환자 있나 본데?’

[진짜 개념 없네요. 내일 출국인 사람을 부르다니.]

‘뭐 그래도 애는 착하잖아.’

[그냥 수혁을 숭배하죠. 그래도 추종자니까 일단 받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해서 수혁은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혹시……. 제가 감히 주무시는 걸 깨운 건 아닌지요?”

그러자 안대훈의 어쩐지 점점 더 공손해지는 말투가 들려왔다.

“아니, 아냐. 왜?”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께서 내일 미국 가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환자 얘기 아니구나?”

“네. 그건 아니고……. 저희 팬클럽이 가시는 길에 조촐한 선물을 하나 마련해서요.”

“어?”

수혁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의문을 표했다.

일단 선물을 마련했다는 것이 무슨 얘기인가 싶었고.

또 하나는 언제 팬클럽이 생긴 건지가 궁금했다.

“저희 지금 당직실 앞에 있습니다. 잠시만 나와 주시면 영광이겠습니다. 성가시면 그냥 문고리에…….”

“아니, 아니. 나갈게. 뭘 문고리에 걸어.”

“네,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너는……. 아니다.”

수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 대고는 밖으로 나섰다.

상당히 민망해하는 얼굴을 하고서였는데, 바루다는 그런 수혁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혁, 안대훈 입장에서는 수혁이 당연히 존경스러울 겁니다.]

‘이렇게까지 존경스러울까?’

[그럼요. 손대는 환자마다 살았지 않습니까?]

‘그건……. 이번 달은 좀 그랬지.’

제아무리 진단을 잘해 낸다고 해도.

제아무리 올바른 치료를 한다고 해도.

도저히 살려 낼 수 없는 환자들도 있기는 있었다.

현대 의학 최고의 의사가 되어 봤자, 현대 의학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달은 운이 좋았단 말도 좀 부족하게 느껴질 만큼 환자들의 예후가 다 좋았다.

아마 경험 적은 안대훈이 보기엔 그 모든 것이 다 수혁 덕이라 여겨질 수도 있었다.

“아, 선배!”

상념을 깨운 사람은 하윤이었다.

“어?”

“저희 팬클럽 부회장입니다.”

언제나처럼 극진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건 안대훈이었고.

“아…….”

그러니까 수혁의 팬클럽이란 결국, 이 둘이었다.

실망해도 좋을 만한 타이밍이었는데 어쩐지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단연코 안대훈 때문만은 아니었다.

둘이 내민 선물 때문만도 아니었고.

“선배, 아이오와는 진짜 깡촌이거든요. 밤에 진짜 심심하실 거예요. 이거 가져가시면 좀 나을지도 몰라요.”

“아……. 이거…….”

“전에 보니까 학생 때 만화책방 아르바이트도 하실 정도로 만화책 좋아하셨다고 해서. 많지는 않은데……. 이거 가져가세요.”

“그, 그래. 고마워.”

“그리고 이거. 미국 안 가 보셨다길래. 간단한 회화책이에요. 영어 잘하시겠지만 전 처음 외국인 앞에 서니까 떨리더라고요.”

“오……. 고마워.”

하윤이 앞에 서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녀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 준다는 것이 좋았다.

물론 여전히 바루다가 말해 준 대로 인간적인 호의 범주 안에 있기는 하겠지만.

‘아닐 수도 있지 않냐?’

[솔직히 모르겠네요. 우하윤은 이상한 인간입니다.]

아닐 가능성도 생긴 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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