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89화 (89/1,303)

89화 첫인상 (2)

‘뭐래?’

수혁의 안내를 맡은 것으로 보이는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 내과 3년 차 닥터 스티브는 절대 수혁은 들을 수 없을 만한 크기의 소리로 중얼거린 참이었다.

제아무리 수혁이 바루다를 탑재하고 있다고 해도 안 들리던 게 들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당연히 그의 말을 들을 수는 없었다.

[후진국에서 온 놈 가르쳐야 한다고 귀찮아하는군요.]

하지만 볼 수는 있었다.

그리고 바루다는 입술을 읽어 낼 수 있었고.

수혁에게도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공지능에게는 퍽 쉬운 일 같았지만.

‘후진국?’

[미친놈인가? 감히 이 바루다 님을 탄생시킨 대한민국을 후진국이라고 해? 죽일까요?]

‘응? 죽인다니……. 뭔 소리야, 인마.’

[제 위대한 조국을 비하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조국이라니…….’

바루다의 반응은 아주 의외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또 그럴 수도 있나 뭐 이런 생각도 들긴 했다.

아무튼, 녀석의 말대로 대한민국은 녀석을 만들어 준 나라였으니까.

인공지능 주제에 어딘가에 소속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좀 이상하긴 했지만.

[스티브……. 이 자식…….]

‘아니, 너 갑자기 내 몸 통제하고 그러는 건 아니지?’

수혁은 바루다의 격렬한 반응에 우려를 표했다.

혹시나 바루다가 자신의 몸을 이용해 스티브를 죽이거나 위해를 가할까 봐서였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180을 훌쩍 넘고, 100kg도 넘어가 보이는 스티브를 한쪽 다리가 불편한 수혁이 어떻게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아무튼, 아주 없던 일도 아니지 않던가.

이전에도 바루다가 수혁의 입 정도는 통제했던 일이 있었으니까.

비록 아주 잠깐이었고, 아주 간단한 발화이기는 했지만.

[무슨 소립니까? 제가 무슨 기생수도 아니고. 그런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 그렇지?’

[그래도 복수는 해야겠어요.]

‘무, 무슨 복수?’

[의사가 할 만한 복수라는 게 달리 있겠습니까?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겠습니다. 후진국에서 온 의사한테 발리면 어떤 표정이 될지 벌써부터 궁금하군요.]

‘그……. 뭐, 그래.’

동기가 불순하기는 한데.

뭐가 어찌 되었건 결론이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았다.

바루다가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아마 이곳 미국에서라도 녀석과 대적할 수 있을 만한 의사는 거의 없지 않겠는가.

사실 태화 의료원이면 세계적인 수준인데, 거기서도 그랬으니.

[일단 스티브에 대해 알아보죠……. 아, 이현종이 이 병원과 주고받았던 메일에 스티브에 관한 파일이 있었네요.]

‘응?’

[특이한 이력이네요. 부모가 둘 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교직원이라 평생 여기서 살았습니다. 미국에서는 보통 고등학교, 대학교, 병원 모두 지역이 다르다던데. 아무튼, 전형적인 시골 사람이군요.]

‘여기가 시골인가?’

[공항에서 숙소 올 때 양옆으로 펼쳐져 있던 옥수수밭 못 보셨습니까?]

‘아, 하긴.’

대학 건물이 워낙 장엄하게 들어서 있어서 초라하다는 인상을 주진 않지만.

그렇다고 화려한 동네는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서울과 비교하자면 그 비교가 미안해질 정도로 처졌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적어도 수혁은 아까보다는 좀 더 너그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청년이 지껄인 말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에 반해 바루다는 정반대로 사고를 굴렸다.

[감히 깡촌 출신이 대한민국 최고 기업 태화 그룹의 총아인 나를 무시했다 이거지?]

사실 스티브가 무시했던 건 바루다가 아니라 수혁이었지만.

돌아버린 바루다는 이미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한숨을 쉬고 있던 스티브가 물끄러미 수혁을 바라보았다.

“일단 일로 와요. 영어는 하죠?”

아주 도발적인 발언이었고, 이건 수혁의 기분 또한 상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 새끼 봐라? 영어는 하냐고?’

사실 바루다가 없을 땐 그렇게까지 훌륭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진 못했지만.

아무튼, 기분이 나쁜 건 나쁜 거 아니겠는가.

그 점에서만큼은 바루다도 수혁과 통했다.

강대한 적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쓸데없이 시비를 걸 만큼 멍청하지도 않았고.

“네, 잘합니다.”

해서 이렇게 대꾸를 했더니, 돌아오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와, 자기 입으로 잘한다고 말하는 동양인은 처음 보네. 진짜 잘해요?”

심지어 일부러 더 빨리 말하는 느낌이었다.

물론 바루다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연산 처리 속도가 오히려 스티브보다 훨씬 더 빨랐으니까.

“네. 근데 어디 가는 거죠?”

“아. 일단……. 교수님 인사부터 하려고요. 닥터 앨리슨이라고 혹시 알아요?”

스티브는 네가 알 리가 없지, 하는 얼굴로 수혁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에게는 퍽 아쉽게도 수혁은 앨리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앨리슨이면 순환기내과 쪽이군요.]

‘심혈관계 논문에 자주 이름이 보이더라.’

[그중에서 제일 유명한 논문이라고 한다면 역시…….]

심지어 그가 쓴 논문도 줄줄 꿰고 있었다.

“네. 작년 12월에 미국 심장 학회지에 실렸던 ‘향후 5년간 심혈관계 질환을 겪을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인자들’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오……. 오. 그, 그랬군요.”

바루다는 약간은 당황한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스티브를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 새끼, 이거 모르고 있던 모양인데요?]

‘그러게. 잘난 척만 할 줄 알지 공부는 안 하는 거 같아.’

사실 수혁도 바루다를 만나기 전이라면 공부보다는 오프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나가서 놀까, 또는 어떻게 해야 전문의 따고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에 대해 더 심도 깊은 고민을 했을 테지만.

이미 사람이 바뀐 상황이지 않은가.

어지간한 대학 교수들보다도 더 공부를 중요시하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요.”

“네. 그러죠.”

아무튼, 앨리슨 교수의 연구실은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진 않았다.

원래 내과 의국이 있는 층 전체가 교수 연구실로 쓰이고 있는 곳이라 그러했다.

아무래도 땅덩이가 좁은 서울보다는 땅 씀씀이가 넉넉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교수님, 한국에서 온 이수혁입니다. 오늘부터 한 달간 연수 예정입니다.”

노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선 스티브는 앨리슨에게 고개를 숙인 후, 수혁을 소개했다.

“아.”

앨리슨 교수는 짤막한 신음을 흘려 대곤 수혁을 아주 묘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게……. 이현종 교수가 자랑하던 그 친구란 말이지?’

원래 같으면 수혁과 같은 연수생을, 그것도 한 달짜리 단기 연수생을 알아보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은 그 자체가 상당히 좋은 병원일 뿐만 아니라 교육이 아주 잘 이루어지고 있는 병원으로 유명했기에 그러했다.

이번 달만 해도 수혁처럼 단기 연수생으로 오는 인원이 너덧은 될 지경이었다.

물론 연수생들이 내는 돈이 재정적으로 도움이 되는 게 제일 큰 이유이긴 했지만.

아무튼, 한 과의 과장이 단기 연수생을 알아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빨리 보여 주고 싶어서 일정을 당겼다고 했었는데……. 흠.’

이현종은 비단 한국에서만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월드 스타 이현종이겠는가.

심지어 한번은 국제 심장 학회 회장 후보로 거론된 적도 있더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의 위상이 그렇게까지 높지는 못한 데다가, 한국의 순환기내과 의사 중 이현종을 질시하던 사람들의 입김으로 인해 무산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이현종은 앨리슨도 인정하는 명의였다.

‘뭐 딱히 특별해 보이는 건 없는데.’

지팡이가 좀 인상적이긴 했지만.

이건 엄밀히 말하면 약점이지, 개성은 아니지 않은가.

해서 앨리슨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화 의료원에서 왔죠? 앞으로 한 달간 잘 지내 봅시다. 아무래도 한국하고는 시스템이 많이 다를 거예요. 배워 가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스티브와는 또 다른 자부심이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배워 가는 게 있을 거라니, 어지간한 자신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지 않은가.

물론 어투나 표정 등이 사뭇 달랐기 때문에 그리 기분 나쁘게 들리진 않았다.

오히려 친절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네, 앨리슨 교수님. 평소 교수님이 쓰신 논문에서 많이 배웠는데, 이렇게 직접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특히 작년 12월에 미국 심장 학회지에 실렸던 ‘향후 5년간 심혈관계 질환을 겪을 확률을 예측할 수 있는 인자들’이라는 이름의 논문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아, 오. 그거 읽었어요?”

대학 병원 교수들의 특징을 특정하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워낙에 이상한 인간들도 많고, 또 워낙에 수도 많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점이 있기는 했다.

바로 자신이 쓴 논문을 읽은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다는 점.

제아무리 앨리슨이라고 해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네. N수가 10만 단위로 이루어진 연구는 드물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많은 변수까지 대입시킨 연구라……. 정말 인상이 깊었습니다. 유용하기도 했고요.”

“하하. 그거 쓰느라 고생깨나 했죠.”

앨리슨은 정말로 기분이 좋은지 껄껄 웃어 댔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읽기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이 고생하고 고민했던 지점을 딱 짚어 주었으니까.

그렇게 웃던 그는 돌연 창문 밖을 가리켰다.

아름드리나무가 사방에 널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쪽이었는데.

앨리슨이 가리킨 곳은 정원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거대한 건물이었다.

“아, 저기 제 연구소가 있어요. 시간 되면……. 안내를 해 줄까 하는데, 괜찮죠?”

“네, 물론입니다. 영광입니다.”

수혁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임상 수준이야 솔직히 태화 의료원이나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이나 별 차이가 있진 않을 터였다.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 수준이 떨어져서는 아니었다.

그저 태화 의료원이 너무 우수하기 때문일 뿐.

하지만 연구 역량은 비교하기가 좀 우스울 정도로 차이가 났다.

애초에 들이붓는 돈 차이가 어마어마하기에 그러했다.

[잘됐군요. 참고가 될 겁니다.]

‘그래, 뭐 배우는 게 있겠지.’

그런 연구소를 들러 본다면 뭔가 노하우를 얻을 수 있지 않나 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혁이 잠깐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앨리슨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 오늘 조영술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오늘 이수혁 선생 스케줄은 어떻게 되지?”

스티브를 향해 질문을 던지면서였다.

스티브는 호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수첩을 뒤적거리고 나서야 답을 할 수 있었다.

“네. 오늘은……. 혈액종양내과 행크 교수님 입원 환자 워크업하는 거 참관입니다.”

“아……. 스티브 선생이 지금 행크 주치의인가?”

“네.”

앨리슨은 고개를 끄덕이는 스티브에게서 수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럼 잘 보고……. 내일 오전에 콘퍼런스에서 보죠.”

“네, 교수님.”

그리곤 곧장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러자 순한 양처럼 있던 스티브가 돌연 태도를 바꾼 채, 수혁을 바라보았다.

“논문 그거, 여기 오느라 읽어 본 거죠? 잘됐네요. 앨리슨 교수님 까다로운데, 그나마 앨리슨 교수님 참관할 때 덜 혼나겠어요.”

지가 그렇게 사니까 남들도 그렇게 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수혁은 대번에 뭐라 할 생각이 들었는데, 의외로 바루다가 말렸다.

[외래에서 발라 줍시다. 내과 의사답게, 지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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