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2화 (92/1,303)

92화 다학제 (1)

“정말, 정말 대단했어.”

행크는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병원 3층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서 음식을 씹어 대면서였다.

생긴 것만 봐서는 무조건 고기만 먹을 거 같았는데, 정작 행크가 먹고 있는 건 샐러드였다.

“아뇨. 어차피 정해진 프로토콜에 대해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수혁은 가만히 행크의 입안으로 사라져 가는 양상추, 토마토, 치즈 등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마른 몸에 어울리지 않게 두껍고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수제 버거를 먹는 중이었다.

[이 맛이야. 음. 햄버거는 미국인가.]

수혁의 입맛도 당연히 이쪽을 선호하기는 했지만.

태반은 바루다 때문이라고 보면 되었다.

유일한 입출력자인 수혁의 건강을 지켜야 하니 어쩌느니 떠들어 대는 것이 무색할 만큼이나 열심히 기름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프로토콜을 다 아는 게 대단한 거야. 혈액종양 파트……. 그중에서도 내가 맡고 있는 고형암은 항암 프로토콜이 계속 변하고 있잖아. 레지던트들은 진짜 못 따라온다고.”

행크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석에서 샌드위치를 질겅거리고 있는 스티브를 가리켰다.

사실 스티브가 그렇게 많이 부족한 사람인 건 아니었다.

레지던트 땐 혈액종양내과만 도는 게 아니지 않은가.

그 수련의 목표가 혈액종양내과 전문의가 되는 데 있는 것도 아니었고.

내과의 전반적인 지식과 술기 능력을 갖춘 일반 내과 전문의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근데……. 그걸 닥터 리는 하고 있던데. 혹시 혈액종양내과 지망하고 있나?”

때문에 레지던트들이 아주 업데이트된, 또는 아주 고차원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기대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특히 행크와 같은 혈액종양내과 의사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암은 다른 질환에 비해 아직 현대 의학이 풀어야 할 숙제가 산더미처럼 남아 있는 분야였으니까.

솔직히 혈액종양내과 의사들에게도 어려운 분야였으니까.

그런데 수혁은 오늘 외래에서 시종일관 압도적인 지식을 보여 준 참이었다.

당연하게도 혈액종양내과 지망이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 아닙니다. 아직 세부 분과는 정하지 못했습니다.”

“오, 그렇지. 당연히……. 응? 못 정했다고?”

“네. 아직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항암 요법을 그렇게 잘 알고 있어?”

행크는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수혁은 비단 그 다양한 암종의 병기와 그에 따른 특성은 물론이요, 치료법에 나타날 수 있는 합병증, 그 합병증에 대한 관리법까지 줄줄줄줄 읊어 댄 참이었다.

벌써 10년도 넘게 혈액종양내과 전문의로 살아온 행크조차도 놀라 자빠질 정도로 정확했거늘.

지망도 아닌 분야였단 말인가.

행크는 급기야 입에 넣었던 치즈를 흘리고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냥……. 제가 보는 환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내과 의사는 공부한 만큼 환자를 살릴 수 있으니까요.”

“허…….”

너무도 훌륭한 대답이었다.

내과 의사는 공부한 만큼 환자를 살릴 수 있다니.

행크는 허허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또다시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바로 오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쓸 만한 레지던트에 해당했던 스티브가 이렇게 모자라 보일 수가 있다니.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크, 진짜 연기력 하나는 죽여줍니다.]

수혁의 답변에 감명을 받은 건 역시나 행크뿐만은 아니었다.

도리어 수혁의 머릿속에 자리한 바루다가 더 크게 놀랐다.

[내과 의사는 공부한 만큼 환자를 살릴 수 있다. 와……. 이거 어디서 읽은 겁니까?]

‘그냥 떠올랐어.’

[좌우명처럼?]

‘아니, 그냥 어떻게 답해야 멋지게 답했단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생각했더니 바로 떠오르던데.’

[오…….]

바루다는 진심으로 감복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표정이라고 해 봐야 언젠가 수혁이 지었던 표정을 재현하는 것뿐이었지만.

‘그, 그거 하지 마.’

수혁이 잠시 자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기시감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바루다는 감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수혁은 천재군요.]

‘천재? 천재까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는 좋은 편이지.’

[연기의 천재…….]

‘연기라니, 새꺄. 나도 진짜 환자 생각하긴 한다고. 기억 안 나냐? 밤새 가면서 남의 환자도 보던 일이?’

[그건 의사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일 아닙니까?]

‘그……. 아니다, 됐다.’

수혁은 바루다가 프로그래밍 된 인공지능이라는 걸 상기한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깡통 녀석이 언제 의대를 다녀 보고, 또 언제 선후배들을 만나 봤겠는가.

만약 그랬다면 이런 말을 이토록 뻔뻔스러운 얼굴로 늘어놓지는 못했을 터였다.

세상엔 그렇지 않은 의사가 훨씬, 훨씬 많았으니까.

“아, 이럴 게 아니라…….”

수혁이 바루다와 함께 쓸데없는 일로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행크는 그 많던 샐러드를 후룩 비워 버렸다.

그야말로 후루룩.

그리곤 수혁의 어깨를 쿵쿵 두드려 댔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두드릴 때마다 누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때리는 듯한 느낌이 일 지경이었다.

“억.”

“오후에는 뭐 해? 닥터 리?”

물론 행크는 고통을 선사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아주 밝은 표정을 지어 가며 수혁을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 미소마저도 상당히 위압적이고, 또 공포스럽긴 했지만.

“그……. 저는 모릅니다.”

“아 참. 연수생이지. 스티브, 너는 알지? 네가 담당이잖아.”

해서 수혁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고, 행크의 시선은 스티브를 향해 돌아갔다.

찬밥 신세가 되어 묵묵히 밥만 먹고 있던 스티브였던지라 이미 밥을 다 먹은 지 오래였다.

“어…….”

“어? 몰라? 설마?”

행크는 뭔가 후진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다른 교수가 저렇게 해도 무서울 텐데.

행크의 인상은 미국에서도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자연히 스티브의 태도가 빠릿빠릿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연수생 첫 주는 오후에 진료 스케줄은 빕니다.”

“왜?”

“시차 적응 문제도 있고……. 병원 위치 안내도 필요하고요. 길 잃는 연수생도 있어서요. 오후엔……. 음. 크리스티앙이 안내를 해 줄 계획이었습니다.”

“닥터 리, 안내가 필요해요?”

행크가 보기엔 병원 안내 같은 건 하등 쓸모없는 일이었다.

물론 수혁이 아니라 다른 연수생이었다면야 안내를 받든, 어디 짱박혀서 쉬고 있든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수혁은 너무 우수한 녀석 아니던가.

적어도 지난 10년간 가르쳐 온 레지던트에 학생, 연수생 모두 통틀어서 이렇게 인상적인 녀석은 처음이었다.

그런 녀석이 여기 고작 한 달 와 있는 것도 좀 서글픈 일인데, 그 시간을 허투루 써?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지도는 이미 데이터화 시켰습니다. 적어도 길 잃을 일은 없습니다.]

‘좋아. 뭔 놈의 안내야. 미쳤어? 미국까지 왔는데.’

[그러니까요.]

‘뭐……. 선배들 보면 대충 놀면서 보낸 모양이긴 하더라만…….’

그리고 그건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그 또한 미국에 온 이상 시간을 그냥저냥 보낼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으니까.

태화 의료원도 분명 좋은 병원이지만, 발전 가능성 또한 있는 병원이지만.

여긴 미국 아니던가.

명실공히 전 세계 의학을 선도하는 나라라고 보면 되었다.

이곳에 올 만한 가치가 있을지 또는 와서도 성공 가능성이 있을지 여부를 반드시 이번 한 달 안에 확인해야만 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어제 대강 지리는 익혔습니다.”

“오. 그렇다는데?”

“그럼……. 그럼 아무것도 예정된 스케줄은 없습니다.”

“거참. 대강대강 하네.”

행크는 뭔가 자기 병원이 얕잡아 보일까 봐 걱정이라도 된다는 듯한 얼굴로 스티브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스티브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행크는 딱히 그를 문책하거나 하진 않았다.

원래 연수생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두고 시간 좀 죽이다가 돌려보내는 그런 존재들이었으니까.

1년 이상 오는 장기 연수생이라면야 모르겠지만.

단기 연수생들은 애초에 뭔가 배울 생각이 있어 보이는 녀석들이 적기도 했고.

‘어쩐지 얘한텐……. 뭔가 좀 보여 주고 싶어지는데.’

하지만 수혁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수혁의 입에서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 별거 없더라’ 하는 말이 나오면 정말 가슴이 아플 거 같았으니까.

“그럼 오후에 다학제 콘퍼런스에 참석하지.”

“다, 다학제요?”

그 말에 스티브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행크를 바라보았다.

행크는 그런 스티브를 뚱한 눈으로 마주했고.

“왜. 뭐 문제 있어?”

“무, 문제가 있죠……. 외래는 환자분께 연수생 참관 동의를 받을 수 있지만, 다학제는……. 그건 아니잖습니까.”

수혁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는 얼굴이 되었다.

[뭔 소리죠?]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연수생이 다학제에 오는 건 그냥 당연한 일이었을 터였다.

‘아니……. 그것보다 아까 그럼 일일이 먼저 동의를 받고 진행했다는 건가?’

[그런가 본데요?]

수혁은 잠시 학생 때를 떠올렸다.

실습 학생 시절에도 지금처럼 외래에 참관하고 심지어 수술방도 들어가고 했었더랬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참관을 환자에게 허락 맡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툭하면 고소가 진행되는 나라 아니던가.

아예 그럴만한 거리를 만들지 않겠다는 생각이 거의 전원에게 퍼져 있었다.

“동의는 받으면 되잖아?”

“아니……. 다학제 환자분들에게요?”

“그래. 내가 알아서 할게. 다학제 참석 인원에 닥터 리도 올려.”

“어……. 과장님…….”

“스티브. 혈액종양내과 과장은 나야. 내가 주관하는 다학제에 내가 참석자를 결정하지도 못해?”

“그……. 아닙니다. 음. 올리겠습니다.”

“그래.”

행크는 스티브를 먼저 콘퍼런스 룸으로 보낸 후, 수혁을 바라보았다.

“전화 좀 하고 갈 테니까, 내과 병동 5층 콘퍼런스로 오면 돼. 요샌 한국에서도 다학제 한다고 들었는데, 맞나?”

다학제란 한 명의 암 환자를 두고 연관된 과 의사들이 모두 모여 진단, 수술, 항암에 대해 토의하는 것을 뜻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병원에서 시행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태화 의료원 급에선 이미 활성화된 지 오래였다.

“네.”

“하긴, 태화 의료원은 좋은 병원이지. 하지만 차이가 좀 있을 거야.”

행크는 최근 한국에서도 꽤 좋은 논문이 나오고 있고, 우수한 치료 성적을 거두고 있는 병원들도 상당히 많다는 걸 떠올렸다.

하지만 여전히 차이는 있었다.

시스템이 아예 달랐으니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러니까.’

수혁도 그러길 바랐다.

솔직히 외래만 봐서는 여기가 태화 의료원보다 나은 점이 있는 곳인가 싶긴 했으니까.

확실히 환자 하나하나에 들이는 시간은 많았지만, 그렇다 해서 교수가 환자를 대면하는 시간까지 절대적으로 긴 건 또 아니었다.

더구나 조태진이 내리는 결론이나, 행크가 내리는 결론이나 비슷하기도 했고.

어느 정도는 기대감이 깎여 나가 버린 상태라고나 할까.

“네, 교수님.”

아무튼, 수혁은 제발 좀 다르길 바라며 콘퍼런스 룸으로 향했다.

바루다는 아까 말했던 대로 지도를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헐.’

[다르긴……. 한데요?]

그렇게 안으로 들어선 수혁은 화면에 떠 있는 명단과 할애된 시간을 보고 숨을 들이켰다.

‘8명이나 해?’

[각기 30분씩……. 4시간이에요.]

‘이 사람들 진료 안 하나? 정규 일과 없어?’

[이게……. 정규 일과 같은데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과 교수들이 이 시간에 모일 수가 없잖아요.]

‘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