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4화 (94/1,303)

94화 다학제 (3)

수혁은 섣불리 손을 드는 대신 행크를 바라보았다.

암만 봐도 행크는 뭔가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움찔거리기만 하고 있을 뿐, 딱히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갑상샘 전 절제술을 하도록 할까요?”

그의 눈앞에서 결론을 짓고 있는 이비인후과 교수나 영상의학과 교수들은 전부 프로였으니까.

아니, 당대의 석학들이라는 표현을 써도 아깝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런 이들의 의견에 대놓고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특히 행크처럼 내내 이들의 위업을 가까이에서 보아 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잠시, 잠시만 더 영상을 보죠.”

해서 기껏해야 한다는 소리가 이런 것뿐이었다.

하지만 이비인후과도 영상의학과도 떠 있는 영상에서 뭔가 새로운 정보를 취합해 내지는 못했다.

이미 한 가지 생각에 경도된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 탓이었다.

“저…….”

그때 고민하던 수혁이 입을 열었다.

[옳지, 잘한다.]

바루다의 끊임없는 응원과 격려에 힘입은 채였다.

“응?”

당연하게도 이비인후과 교수의 시선이 수혁을 향해 내리꽂혔다.

마치 ‘이건 뭐야?’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정말 처음 보는 친구였으니까.

심지어 가운도 처음 보는 가운이었고.

말하자면 이 병원 사람이 아니라, 어디 딴 곳에서 연수 온 친구란 뜻이었다.

“아……. 아까 아침에 봤던 그 친구 아닌가?”

그런데 여태 입을 다물고 있던, 저기 구석 언저리에 있던 사람이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이비인후과의 대부 커밍스 박사였다.

비록 이과 전문의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를 알고 있다는 건 이비인후과 중에선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세요?”

“뭐, 잠깐 얘기 좀 나눴지. 아주 똑똑한 친구 같던데……. 얘기나 좀 들어보지. 행크 교수도 괜히 다학제에 연수생을 데려오진 않았을 거 같고.”

그 말에 행크가 아주 반갑다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아까 오전에 외래 같이 봤는데…… 종양에 대한 지식이 아주 해박합니다. 한번 의견을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수혁은 발언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어째……. 난 좀 운이 좋은 거 같지 않냐?’

알아서 커밍스와 같은 대가가 자리를 펴 줄 줄이야.

어떻게 된 게 바루다를 만난 이후로는 운이 쫙쫙 피는 느낌이었다.

[저를 만난 거부터가 천운 아닐까요?]

‘그……. 그거야……. 그럴 수도 있겠지.’

처음에는 솔직히 불운이라고 여겨지기도 했었지만.

요즘에 와서는 천운이라고 여겨질 때가 훨씬 더 많았다.

바루다가 아니었다면 지금 수혁이 누리고 있는 것들 중 태반을 누릴 수 없었을 테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수혁. 다들 쳐다보고 있어요.]

‘아, 아. 그렇지.’

[잘할 수 있지요, 수혁?]

‘당연하지. 한두 번 하냐?’

[믿습니다.]

바루다는 정말로 수혁을 믿는다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았다.

수혁은 그의 신뢰를 한몸에 받으며 입을 열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기 전에……. 아까 환자 병력을 다시 한 번만 더 들을 수 있을까요?”

“1년 전부터 덩이가 있었는데 진료받지 않았다는 거 말인가요?”

수혁의 말에 앞에 나가 있던 이비인후과 레지던트가 약간은 귀찮다는 어투로 대꾸했다.

물론 수혁은 이제 그런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일일이 상처받을 단계는 지난 지 오래였다.

덕분에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저을 수 있었다.

“아뇨. 그거 말고. 여기 입원한 적이 한 번 있던데요?”

“아……. 근데 그건 갑상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 병력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아예 언급도 하지 않고 넘어간 것을 보면.

하지만 성대 소견을 띄워 놓은 화면에는 얼핏 보였다.

수혁이나 바루다나 전부 그 화면을 보고 의심하기 시작한 바였다.

이게 정말 단순 갑상샘 암일까에 대한 의심을.

“하지만 환자의 병력 아닙니까? 한 번만 읽어 주실 수 있어요?”

해서 수혁은 다시 한번 레지던트를 몰아붙였다.

레지던트는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혁이야 연수생 신분이니 아무것도 아닌 놈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에게 멍석 깔아 준 행크는 엄연한 교수가 아닌가.

심지어 커밍스는 그 이름을 딴 교과서가 있을 만큼이나 이비인후과에서는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 네. 음. 환자는 10년 전 양측 경부 임파선 종대 및 발열 등을 주소로 본원 외래 방문 후 엡스타인 바 바이러스(EBV) 진단되어 입원 치료받은 병력이 있습니다. 이거 말고는 특별한 병력이 없습니다. 기저 질환도 없어요.”

“네. EBV에 감염된 병력이 있군요.”

“네.”

레지던트는 수혁이 강조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뭔 뜻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행크는 달랐다.

그는 어렴풋이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갑상샘암에서 성대 마비가 선행되는 경우가 어디 흔하겠는가.

그것도 기껏해야 유두암종에서.

다만 뚜렷한 근거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을 따름이었다.

“다시 영상으로 돌아오면……. 이 환자는 EBV에 감염된 병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갑상샘 좌측 상단 그리고 동측 레벨 2에 비대해진 임파선을 보이고 있습니다.”

해서 수혁이 단정적인 어투로 말을 이어 나갈 때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물론 이비인후과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이게 갑상샘암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음. 좌측 상단은 갑상샘이지, 임파선은 아니지 않나?”

“아뇨. 잘 보십쇼. 갑상샘의 캡슐을 깨고 나간 형태 아닙니까? 갑상샘 유두암종에서, 그것도 저만 한 사이즈에서 캡슐을 깨고 나가는 것이 일반적인가요?”

“일반적…… 이지는 않지. 하지만.”

“우연일 수도 있죠. 하지만 교수님. 우리는 의사입니다. 과학자라는 뜻이죠. 우연에 기대기보다는 근거에 주목해야 합니다.”

수혁은 무려 처음 보는 외국인 교수의 말을 끊고,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럼에도 딱히 무례하다는 인상을 주진 않았다.

그의 설명이 지나칠 정도로 흡입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좌측 상단 측 임파선에 생긴 암이 갑상샘 캡슐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한 소견일 겁니다. 그렇다면 이만한 사이즈에서 반회 후두 신경을 침범하여 성대 마비를 일으킨 것도 설명이 됩니다.”

“EBV 감염 후에 발생한 비호지킨 림프종이다……. 이 말인가?”

“네, 바로 그렇습니다.”

“음.”

여기까지 설명을 들은 이비인후과 교수는 그만 입을 다물고야 말았다.

말을 듣고 보니, 기껏해야 1cm 남짓한 갑상샘 유두암이 캡슐을 뚫고 나가서 반회 후두 신경까지 먹었다는 자신의 의견보다는 눈앞의 조그마한 수혁이 얘기한 의견이 훨씬 타당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상에서도 비호지킨 림프종처럼 보이긴 합니다. 물론 영상만으로 진단을 내리진 않지만……. PET CT를 찍었나요?”

심지어 영상의학과는 벌써 비호지킨 림프종일 거라고 생각을 바꾼 거로 보였다.

그의 시선이 곧 핵의학과 교수를 향했다.

핵의학과 교수는 아주 당황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네? 아, 아뇨. 갑상샘암에서 누가 PET까지 찍습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요즘은 1cm 미만의 갑상샘 유두암에서는 수술을 안 하고 지켜봐도 정기적인 검사만 해 준다면 안전할 수 있네, 어쩌네 하고 있는 마당 아니던가.

그런데 PET CT를 찍기는 왜 찍는단 말인가.

전신 전이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인데.

“아니, 비호지킨 림프종이 의심되는데 안 찍었어요?”

“네? 아니……. 그……. 방금까지는 교수님도 갑상샘…….”

핵의학과 교수는 할 수만 있다면 들고 있던 마우스로 영상의학과 머리라도 후려칠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차마 손을 움직이지는 못했는데, 영상 쪽의 직급이 훨씬 위인 까닭이었다.

미국은 자유롭네, 어쩌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직업에 한해서였다.

의사 사회는 미국도 만만치 않게 좁았다.

아니, 오히려 더더욱 좁다고 보면 되었다.

여긴 추천장이 취직이나 이직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으니까.

“병력을 몰랐으니까 그렇죠. 아귀가 딱딱 맞는구만. 선생님 이름이 뭐라고요?”

“이수혁입니다.”

“이수혁……. 한국인?”

“네. 태화 의료원 내과 레지던트 2년 차입니다.”

“아……. 태화. 혹시 이하언 교수라고 압니까?”

태화에 있으면서 이하언을 모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현종만큼은 아니었지만, 영상의학과 쪽에서는 만만찮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수혁은 그의 수제자 격인 김진실 교수와도 협업해 온 마당 아닌가.

“네. 저희 영상의학과 복부 파트 교수님입니다.”

“거긴 꾸준히 우수한 사람이 나오네, 흠.”

수혁의 답변을 들은 영상 교수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어 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감명 깊게 들은 모양이었다.

물론 다들 그렇게 놀라고만 있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던 행크는 벌써 계획을 싹 바꾸고 있었다.

뭐 그냥 조금 바꾸는 게 아니라, 아예 진단부터 싹 갈아엎고 있었다.

“지금……. 비호지킨 림프종일 가능성이 제기된 이상 수술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일단 수술부터 뒤로 미뤘다.

동반된 암이 다른 암이 아니라 갑상샘 유두암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비호지킨 림프종도 예후가 아주 나쁜 암에 속하지는 않지만.

갑상샘 유두암에 비할 바는 아니지 않은가.

“갑상샘 좌측 상담 임파선에서 세침 흡입 검사 시행해 주시고……. 이비인후과에서는 왈데와이어 환(Waldeyer’s tonsillar ring: 입천장, 혀 편도 등, 비호지킨에서 전이가 잦음) 내시경으로 확인해 주시고요. 아, PET CT도 찍읍시다.”

그리곤 척척 진단 계획을 얘기해 주었다.

모두 타당한 얘기였기에 그 누구도 토를 달거나 하진 못했다.

아니, 사실 타당하지 않은 얘기를 했다고 하더라도 토를 다는 사람이 있진 않았을 터였다.

전부 행크가 이 얘기를 할 수 있게 해 준 장본인인 수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영상 소견에 병력……. 그리고 이상한 행태만 가지고 여기까지 얘기를 이끌어 올 수 있단 말이지?’

물론 막상 해봤는데 꽝이 나올 수도 있었다.

정말로 우연히 갑상샘 유두암종에서도 이런 행태를 보이는 녀석이 있을 수는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혁에 대한 평가가 절하될까?

그건 아닐 터였다.

레지던트 주제에 이만한 논리를 펼칠 수 있는 내과 의사는 없을 테니.

‘태화라…….’

‘이수혁이라 이거지.’

덕분에 다들 태화 의료원 또는 수혁이란 이름을 머릿속 깊숙한 곳에 새기게 된 순간이었다.

[다들 깜짝 놀랐군요.]

‘당연하지. 무시하고 있었을 텐데.’

[뭐 이대로 만족하고 지낼 건 아니죠?]

‘그럼. 내일은 어디 외래지?’

[스티브가 보여 준 스케줄에 따르면 호흡기내과입니다.]

‘호흡기라…….’

[내일은 거길 뒤집읍시다.]

‘좋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