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95화 (95/1,303)

95화 도장 깨기 (1)

“어……. 안녕, 안녕하세요.”

수혁은 8시쯤 내과 의국에 들어섰다.

이것도 아주 늦은 시간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매일 6시에 강제로 일과를 시작했던 수혁에게는 대단히 여유로운 일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때문에 그의 손에는 차가운 김이 내려앉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달짝지근한 빵 하나가 들려 있었다.

[흠, 이제 좀 봐 줄 만해졌군요.]

그런 수혁을 향해 스티브는 쩔쩔맨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정도로 굽신거리며 인사를 건넸다.

만약 수혁이 인격자였다면 ‘에이, 왜 이래요.’라는 식의 반응을 보였겠지만.

수혁이나 바루다나 딱히 그런 훌륭한 위인은 못 되지 않던가.

오히려 조그마한 원한도 꾹꾹 눌러 담아 두는 편에 속했다.

환자에게라면야 당연히 그렇지 않겠지만.

같은 의사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네. 뭐. 오늘은 호흡기인가요?”

해서 수혁은 그대로 스티브의 굴욕적인 인사를 받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티브의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어제 연수생 신분인 수혁이 5시에 칼퇴근을 하고 난 후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넌 공부 좀 더 해야겠더라.’

‘아니, 아니. 이건 공부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에요. 걔 레지던트라며. 이게 말이 돼?’

회의가 열렸더랬다.

외래 볼 때부터 슬금슬금 놀라 있던 행크가 다학제에서 빵 터져 버리지 않았는가.

해서 행크는 딱 5시 반쯤에 시간 되는 레지던트들을 불러 모아선 입을 털어 댔다.

‘교육 시스템에 뭐가 있을 거야. 개인이 아무리 우수해도…… 그건 한계가 있어.’

물론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수혁에게도 아주 훌륭한 개인 지도 교사가 붙었지 않은가.

다시 말하자면 지금의 수혁을 만든 건 수혁의 개인적인 노력도 있긴 하지만, 태반은 그 교육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다만 행크가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었다.

수혁에 대한 교육 시스템이란 것은 이 세상 그 어떤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다는 점.

‘그러니까 가서 배워. 구슬리든 뭘 하든 어떻게 가르치는지 배워. 그게 스티브, 네가 할 일이다.’

아무튼, 그러한 연유로 스티브는 실로 어마어마한 짐을 떠안고 말았다.

당연히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뭐 어쩌겠는가.

레지던트 주제에 교수가 까라면 까야지.

게다가 어제 종일 직접 두 눈으로 보지 않았는가.

수혁이 지금 아이오와 주립 대학교 병원에 있는 그 어떤 레지던트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그……. 가실까요? 외래는 어제 거깁니다.”

“아, 같은 곳이에요?”

“완전히 같은 곳은 아니고요. 옆쪽에 또 마련되어 있습니다.”

“아하. 하긴 호흡기랑 혈종이랑 같은 진료실을 쓰는 건 좀 이상하죠.”

그렇지 않은가.

가뜩이나 암 환자들은 면역이 떨어져 있는데 비말 감염의 온상인 호흡기 외래를 같은 곳에서 여는 건 안 될 일일 터였다.

의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있는 일이었다.

“네, 그렇죠. 네네.”

“그럼 앞장서세요. 따라갈게요. 이거 먹으면서 가도 되죠?”

수혁은 당연히 그래야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거의 무슨 윗사람이 아랫사람 부리듯 하는 태도였는데, 스티브로서는 따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어제 좀 친절하게 대해 줄걸…….’

뒤늦은 후회가 일었으나 뭐 어쩌겠는가.

이미 물은 엎질러져 버렸고,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네네. 따라오세요…….”

해서 스티브는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래도 한국인데……. 뭐 그렇게 특별한 점이 있을까요?’

‘한국 가 본 적도 없으면서 밑도 끝도 없이 무시하지 마! 서울이 시카고보다도 크다고!’

머릿속에서는 어제 행크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에 빙빙 맴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 봐야 정말 한국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지만.

아무튼, 수혁 앞에서는 좀 더 조심해야겠단 생각이 들기는 했다.

“아, 수혁. 얘기는 들었어요.”

외래 진료실 안쪽에 마련된 교수실에 들어서자 안쪽에 미리 와 있던 닥터 엡스가 인사를 건네 왔다.

아이오와에서는 정말, 정말 드문 흑인이었다.

[아이오와에서는 처음 보네요.]

‘그러게.’

심지어 수혁은 지난 3일 동안 거리를 제법 쏘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흑인을 보는 게 이게 처음일 지경이었다.

물론 수혁은 그런 생각을 겉으로 드러낼 정도의 애송이는 아니었다.

스티브와는 질적으로 다르단 뜻이었다.

애초에 지금껏 어울렸던 사람들이 레지던트가 아니라 교수들이었지 않은가.

그것도 그냥 교수가 아니라 학회 중진 수준의.

자연스럽게 눈치가 늘 수밖에 없었다.

“아, 엡스 교수님. 반갑습니다.”

“그래요. 음……. 행크가 그렇게 칭찬하는 건 처음 봤는데……. 오늘도 재미나게 해 봅시다.”

“네, 교수님.”

“아, 불편하겠지만, 이거 끼고요.”

“아……. 네.”

수혁은 엡스가 가리킨 쪽에 놓인 마스크를 집어 들었다.

그냥 일반적인 수술 마스크가 아니라 N95 마스크였다.

국내에서는 미세먼지 거르는 용으로 더 많이 쓰이는 녀석이었지만, 실제로는 감염 방지용으로 만들어진 마스크였다.

[읍. 답답한데요? 잉?]

바루다는 그 마스크에 대한 감흥을 말하다 말고 뭔가 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생각해보니 수혁은 무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내과 레지던트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가 본 환자 중에서는 심지어 슈퍼 박테리아에 감염된 환자들도 있을 지경이었다.

[근데 이걸 처음 끼네.]

‘어? 아, 그러고 보니까…….’

[이 미친 태화 놈들이? 매일 위험에 노출을 시켜?]

‘이거 비싸잖아.’

[아무리 비싸도 그렇지. 미쳤나? 감염 위험에 노출시켜?]

‘생각해 보니까 그렇긴 하다…….’

수혁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마스크를 끼고 있는 스티브나 엡스 그리고 다른 직원들을 둘러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대한민국은 아직까지도 결핵 청정국이 아니지 않은가.

불치병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 걸리면 그 독한 약을 몇 달은 먹어야 하는 병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는 얘기였다.

호흡기내과는 그 질환에 걸린 환자들을 메인으로 보는 과였고.

[그거 몇천 원 아까워서 지급도 안 해 주고…….]

‘이런 거 보면 확실히 미국이 다르긴 달라.’

어제 외래 볼 때부터, 또 다학제에 들어갔을 때도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여긴 배려가 온 군데에 다 번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배려는 오직 환자만 위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의료진은 물론이요, 다른 직군의 직원들까지 모조리 배려해 주는 시스템이었다.

다소 착취적이라고까지 보이는 한국의 대학 병원과는 많이 달랐다.

“환자 왔네. 2번 방으로 가, 스티브. 닥터 리도 같이 가죠.”

“네, 교수님.”

수혁이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2라고 쓰인 곳에 불이 들어왔다.

이런 식으로 환자가 준비되었음을 담당 간호사가 알려주면 일단 레지던트와 연수생 또는 실습 학생이 먼저 가서 진료 보는 시스템을 취하고 있었다.

솔직히 진료에 매우 효율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래도 교육은 되겠어. 그렇지?’

[당연하죠. 어제 행크 보니까 쥐잡듯이 묻던데요?]

하지만 우수한 전문의를 만드는 시스템이었다.

한국의 대학 병원 레지던트였다면 지금 스티브처럼 직접 외래에서 환자를 볼 기회는 거의 없었을 터였다.

기껏해야 응급실에서나 보지, 단독 외래가 열리는 건 3년 차 때부터인 데다가 그 외래라는 것도 주당 1타임 정도 수준이었으니까.

‘휴……. 여기서 구슬려서 태화 의료원 시스템을 물어봐야 하는데…….’

스티브는 약간은 심각한 얼굴이 된 수혁을 돌아보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떠올렸다.

오히려 수혁이 이곳의 교육 시스템을 부러워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수혁 개인이 유별나게 똑똑하다는 건 좀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아주 옛날이라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21세기 아니던가.

현대 의학은 정말이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온 나머지, 개인의 역량이 점점 중요치 않게 되어 가는 중이었다.

하루에도 너무 엄청난 지식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개인의 뛰어남보다는 아무래도 시스템이 더 중요했다.

물론 수혁처럼 너무 뛰어나다면 예외가 되겠지만, 그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똑똑.

둘이 서로의 시스템을 부러워하고 있는 사이 둘은 2번 방 앞에 도달했다.

스티브는 조심스럽게 유리창이 달린 문에 대고 노크를 했고, 안에 있던 환자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덜커덕.

그제야 스티브는 방 안쪽으로 향했다.

다시 한번 마스크를 확인하고서였다.

그걸 본 수혁 또한 마스크를 재차 확인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도 무조건 하는 겁니다. 사비로라도 합시다.]

본인도 불안하기도 했고.

바루다 또한 워낙에 성화를 해 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니까……. 기침 때문에 병원에 오시게 됐군요?”

그사이 스티브는 환자가 들고 온 소견서를 들여다보며 질문을 시작했다.

소견서에는 벌써 1년 이상이나 환자의 기침이 계속되었고, 치료를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고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환자의 인상이 그렇게 좋지는 못했다.

[미드에서 많이 나오는 범죄자 인상이군요.]

‘환자한테 그러지 마, 인마.’

[수혁도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요?]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재차 환자를 바라보았다.

비쩍 마른 얼굴에 목까지 올라온 문신.

그리고 붉게 물든 눈.

어떻게 봐도 좋은 일 하는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구만 뭘.]

‘그래……. 솔직히 그래 보이긴 하는데……. 진료 보러 온 거잖아. 집중하자고, 집중.’

[네네.]

수혁은 날뛰는 바루다를 제압한 후, 스티브와 환자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응. 1년 넘게 치료받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더라고. 돌팔이 새끼 같으니. 진작 대학 병원에 보내 줄 것이지.”

“치료는……. 음.”

소견서에 적힌 약을 요약해 보자면, 정말이지 온갖 약을 다 쓴 상황이었다.

기침에 쓸 수 있는 약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시도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역류성 후두염에 쓰는 약도 끼어 있었다.

“엑스레이도 찍었다고. 그거 찍으면 다 알아내야 하는 거 아냐?”

“잠시만요. 사진을 좀 볼게요.”

스티브는 환자의 거친 말에도 별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진료를 해 나갔다.

수혁은 그의 꿋꿋함에 어느 정도 감명을 받았다.

‘이런 일이 잦은가 본데.’

[온갖 사람들이 다 오겠죠.]

‘이런 건 단점인데.’

[옆에 가드 있잖아요. 여차하면 제압해 줄걸요?]

바루다는 유리문 밖에 선 덩치 큰 사내를 말했다.

솔직히 안에 있는 환자보다도 더 사람이 더 미드에 나온 악당 같아 보이긴 했다.

유리를 통해 내부를 다 보고 있기 때문에 여차하면 달려와 줄 터였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없이 든든하기는 했다.

“닥터 리, 닥터 리가 볼 때는 좀 어때요?”

쓸데없는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으려니, 스티브가 질문을 던져왔다.

어제 오전만 해도 어림도 없을 일이었으나.

이미 수혁의 실력이 어떤지 보지 않았는가.

질문하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음. 약간……. 간질성 폐렴 소견이 보이는데…….”

“그런 것치고는 근데 1년이나 지났음에도 그렇게 폐 기능이 떨어져 있진 않습니다.”

“하지만 떨어지긴 했네요? 정상은 아니잖아요.”

“아, 네 그렇죠.”

“그럼 무조건 원인이 있겠죠?”

“그……. 네.”

스티브는 당연한 소리를 너만 안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어쩌냐는 표정이 되어 수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수혁은 그러한 스티브의 표정을 마주하고서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이미 원인이 뭔지 대강은 알 것 같아서였다.

물론 몇 가지 질문과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저기 위에 가드. 여차하면 오는 거 맞죠?”

“네? 아, 네. 당연하죠.”

“그럼 지금부터는 제가 직접 진료해도 될까요?”

“어……. 음. 네, 알겠습니다. 근데……. 무슨 질문을 하려고요?”

“일단 두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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