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02화 (102/1,303)

102화 파티 (1)

“오늘 닥터 리 오는 거지?”

엘리슨 내과 과장이 손에 든 와인 병을 행크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아, 그럼요. 제가 이따 데리러 가려고요.”

“직접?“

“직접 가야죠. 차도 렌트 안 해 놨던데.”

“차가 없어? 아니, 그럼 생활을 어떻게 하고…… 아, 다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네. 아무래도. 그냥 버스 타고 마트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데요.”

“흐음…….”

엘리슨은 생활적인 불편이 혹 수혁의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에 대한 인상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뭐……. 그냥 이대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단기 연수생으로 왔던 수많은 친구가 모조리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으로 오게 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또 의외로 적지 않은 수의 외국인 의사들이 장기 연수를 오고, 그 연수 끝에 아예 눌러앉는 경우도 있기는 했다.

“닥터 황. 뭐 한인 교회라도 데리고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지금 행크를 도와 바비큐 설비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황이 그와 같은 케이스였다.

한국에 있을 때도 심심하면 캔서지와 같은 유수의 학술지에 논문을 실어 댔던 실력파였는데, 이곳에 2년간 연수를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버렸더랬다.

연구 여건이 아무래도 이곳이 더 좋다 보니 더 많은 논문을 쓰고 있었고.

듣기론 가족들하고도 사이가 훨씬 좋아졌다고 했더랬다.

아무래도 여긴 훨씬 여유로웠으니까.

‘이 양반하고 얘기하다 보면 좋은 인상이 생길지도 모르지.’

해서 엘리슨은 닥터 황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아, 이수혁 선생 말입니까?“

“네. 이수혁.”

“그렇지 않아도 오늘 오면 얘기나 해 보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 주고받은 메일 상에서는 종교가 없다고 하긴 했었는데.”

“뭐……. 꼭 종교가 있어야 교회에 갑니까. 닥터 황도 처음엔 무교였던 거 같은데.”

“하하. 하긴 그랬죠.”

미국에서 한인 교회란 존재는 비단 예배만 드리는 공간 그 이상을 의미했다.

주변 한인 커뮤니티 그 자체를 의미하는 곳도 적지 않았으니까.

“오. 오늘 고기……. 이거 어디서 떼 온 거야?”

황과 얘기하던 엘리슨이 행크 옆에 두둑이 쌓여 있는 고기를 들여다보더니 혀를 내둘렀다.

뭔가 육질이 남달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 이거요. 텍사스에 있는 사촌이 보내 줬어요.”

“아……. 농장 한다고 했던가?”

“네. 근데 뭐 거의 접었어요.”

“왜? 엄청 크게 한다더니.”

“땅에서 기름이 나더라고? 지금 재벌이에요.”

“허…….”

엘리스는 아까보다도 더 격렬하게 혀를 내둘렀다.

소문으로만 듣던 셰일 가스 재벌이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을 줄이야.

물론 행크의 놀라움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행크는 얼마 전 놀러 온 사촌을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

“벤틀리를 타고 왔더라고. 부럽게시리.”

“벤틀리……. 뭐, 행크. 자네도 부지런히 모으면 살 수는 있지 않아?“

“부부가 각각 한 대씩 끌고 왔어요.”

“아.”

“현자 타임 오더라니까요, 하하.”

“현자 타임?“

“아, 닥터 리한테 배운 말이에요. 이럴 때 쓰는 말이래.”

“많이 친해졌구나, 잘했어. 잘했어.”

엘리슨은 그 날, 그러니까 왓슨을 보여 주었던 날을 떠올렸다.

‘죽도록 굴리라 이거지.’

원래도 교육에 퍽 관심이 많았던 그가 남다른 결심을 하게 된 날이었는데.

정말로 그날 이후로 스티브를 비롯해서 각 연차별로 똘똘해 보였던 애들을 죽으라고 굴리기 시작했더랬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한 가지 깨닫게 되는 바가 있었다.

이수혁은 절대 이런 식으로 굴려 대는 거로 탄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야……. 그냥 똘똘한 의사지만.’

이 상태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과연 어떻게 될까.

어마어마한 명의가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냥 한국에 잔류한다면야 큰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만약 미국에 와서 다른 병원으로 가게 된다면 어찌 되겠는가.

‘좋은 관계를 쌓아 둬야 해.’

미국에 올 생각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이 떠오를 수 있도록.

같은 시간, 무려 내과 과장 엘리슨의 가슴에 불을 지핀 수혁은 아직 숙소에 있었다.

공부하고 있느냐고 하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또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케이스 숙지했습니까?]

‘어. 근데 우리 이거 언제까지 해야 해?’

[아직도 천 케이스 정도 남았는데요?]

‘아니, 그새 그렇게 많이 빼돌렸다고?’

[시간이 좀만 더 있었으면 열 배는 빼돌렸죠.]

‘허…….’

수혁은 바루다가 빼돌린, 그러니까 왓슨에 엘리슨을 비롯한 수많은 내과 교수들이 심혈을 기울여 입력 놓은 케이스를 숙지하고 있었다.

[자, 다음은……. 오 이거 재밌겠네.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갑자기 발생한 폐렴.]

‘음. 흥미가 좀 생기긴 하는데.’

[그쵸? 그렇다니까. 공부가 재미없는 게 아니에요.]

‘아니, 근데 이미 네가 저장한 건데……. 이거 그냥 내 머리에 넣어 주면 안 돼?’

재미고 나발이고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가.

이럴 거면 그냥 책을 읽고 말지.

뭐하러 그 난리를 피웠나 싶었다.

[거참……. 남은 죽도록 고생해서 빼 온 건데, 그걸 홀랑 먹으려고요?]

‘아니……. 그건 아는데…….’

[게다가 이거 입력한 사람들이 누군지 아십니까?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병원의 주축들이라고요.]

‘알아, 아는데.’

물론 지금 바루다가 전달해 주는 케이스는 어디서도 발간되지 않을 만한 내용이긴 했다.

아무래도 케이스 리포트 형식으로 발표되는 건, 그 환자가 죽었건 살았건 적어도 절차상에 실수가 없는 케이스가 대부분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대놓고 ‘아, 우리가 실수해서 환자가 잘못되었다’라는 걸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하지만 이건 좀 달랐다.

모든 케이스가 여과 없이 들어와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도 있었고, 아예 첫 단추를 잘못 끼어서 헤매기만 하다 환자를 놓치게 된 케이스도 있었다.

‘쉽게 얻을 수 없는 자료라는 건 알겠어. 근데……. 그래도 시간 들일 필요 없잖아? 그냥 데이터베이스화하라고.’

[후.]

수혁의 말에 바루다가 실로 오랜만에 벌레 보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머릿속에 형상화된 녀석의 모습이 어찌나 리얼한지 식은땀이 다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뭐, 뭐 인마.’

[저라고……. 이 지루한 작업이 좋아서 하겠습니까?]

‘좋아하지 않냐? 나 괴로워하는 거 보면서 좋아하잖아.’

[제가요?]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진짜 부숴 버리고 싶어지니까, 그만둬.’

수혁은 정말로 어떻게 하겠다는 듯 포크를 집어 들었다.

바루다는 그게 다 헛된 협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굳이 성심성의껏 대꾸해 주었다.

[뭐, 인정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딥러닝을 통해 진화하는 인공지능 바루다니까요. 제 유일한 입출력자인 수혁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고, 닮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말을 이렇게 얄밉게 하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아, 알았으니까.’

수혁이 바루다와 1년 넘게 지내면서 한 가지 뼈저리게 배운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루다와는 어지간하면 대화를 오래 이어 나가지 말라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우세를 점하는가 싶을 때도 있긴 하겠지만.

십중팔구는 말리기 십상이었다.

‘돼, 안 돼. 그것만 말해 봐.’

[안 됩니다.]

‘왜?’

[이게……. 음. 제가 연산 기능이랑 데이터 축적을 수혁의 뇌에 하는 건 알고 있죠?]

‘설마 그걸 모르겠냐?’

바루다가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하면 운동실조까진 아니더라도, 약간의 현기증은 느껴질 지경 아니던가.

딱히 이론적인 배경이 없다고 해도 현상만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한 변화가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미 수혁의 뇌에 있는 정보야 당연히 제가 좀 더 단단하게 축적할 수 있지만, 수혁이 인지하지 못했던 정보는 그게 안 돼요.]

‘오,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순진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런 소리 하니까 열 받는데요?]

‘뭔 열을 받아, 기계 주제에.’

[알 것 같아요. 열 받는 단어가 어떤 상태를 지칭하는 건지.]

바루다는 거기까지 말하다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봐야 나오는 건 헛소리겠지만.

아무튼, 수혁은 귀를 기울여 주었다.

아까처럼 시도 때도 없이 케이스나 읊어 대는 것보단 이게 나았으니까.

[어쩌면 정말 제가 이렇게까지 진화한 건 수혁 덕분일 수도 있겠네요.]

‘아니, 그건 전적으로 내 덕분이라니까? 네가 그랬잖아. 왓슨은 눈, 코, 귀가 없어서 망했다고.’

[아니……. 어쩌면 그게 전부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라고?’

[네. 음. 아, 누가 문 두드리는데요?]

‘행크 교수님인가 보네.’

수혁은 바루다가 대체 어떤 말을 하려고 했던 건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있는 행크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쪽에서 수혁에 대한 꿍꿍이속을 지닌 것처럼, 수혁 또한 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유지해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니던가.

태화 의료원에서 과분할 정도로 잘해 주고 있긴 했지만.

미국에도 끈을 만들어 두면 좀 더 든든할 테니까.

“안녕하세요. 행크 교수님.”

“어, 그래. 준비는 다 했어?“

“네. 이대로 가면 됩니다.”

“그래, 그럼 이쪽으로 오지.”

해서 수혁은 가능한 가장 친절해 뵈는 미소를 띤 채 문을 열었고.

행크 또한 마찬가지로 친절해 뵈는 미소로 그를 맞아 주었다.

그리곤 끌고 온 차에 수혁을 태웠는데, 무려 머스탱이었다.

부아아아앙.

조용하기만 하던 병원 앞 사거리를 꽉 메우는 엔진음이 울려 퍼지는가 싶더니 쭉 하고 차가 앞으로 뻗어 나갔다.

[이거지. 이거야.]

‘이젠 먹는 거 말고 차에도 욕심을 내셔?’

[수혁에게는 잘된 일 아닙니까? 제가 욕심을 내면 낼수록.]

‘아, 뭐……. 그건 그런데.’

욕심이라니.

인공지능이 할 법한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수혁은 이번에도 그쪽으로는 생각을 뻗어 나가지 못했다.

“파티가 예상했던 것보다 좀 커져서 말이야. 내과 사람들은 일단 다 왔고. 연구소 직원들도 많이 왔어. 연구소에는 한국인들도 좀 있거든. 닥터 황이라고 혈액종양내과 전문의 선생도…… 연구 전문 교수로 있고.”

행크가 느닷없이 차 지붕을 까더니 무척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꽤 솔깃한 내용이 담겨 있기도 했다.

연구 전문 교수가 한국인이라니.

뭔가 들어 본 내용이 참 많을 듯했다.

“아, 잘됐네요. 연구 쪽으로 궁금한 게 많았는데.”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다들 기다리고 있으니까, 빨리 가자고.”

“네. 어, 좀 빠른데요?“

“괜찮아. 여기 차도 없고. 경찰도 없고.”

“아니…….”

옆을 돌아보니 행크는 사람이 돌변한 것과 같은 얼굴로 액셀을 밟아 재끼고 있었다.

운전대만 잡으면 변하는 인간들이 있다더니, 미국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아무튼, 그 덕에 수혁은 정말이지 금세 행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허미 시벌.]

그 집을 보자마자 바루다는 일단 욕부터 박았는데, 수혁으로서는 전혀 핀잔을 줄 생각이 들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크냐.’

[행크 연봉이 얼마기에 이런 집에 살까요? 미국은 재산세도 꽤 비싸다던데.]

‘수영장 보소?’

[중부는 날씨도 구려서 수영장 쓰지도 못할 텐데.]

‘미국이라…….’

[일단 이현종 원장 집도 가 보고 결정해야겠지만……. 이보다 좋을까요?]

‘아닐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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