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파티 (2)
“자자, 이쪽으로. 저기 엘리슨 과장님 계시고.”
“아, 안녕하십니까. 늦었습니다.”
수혁은 집주인 행크의 안내를 따라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렀다.
정원 우측으로는 상당히 커다란 수영장이 있었는데, 변화무쌍한 중부 날씨를 견디기 위해 아크릴인지 뭔지 모를 투명한 뚜껑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딱 여름에만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지린다.]
‘그런 단어 좀 쓰지 마.’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저는 딥러닝…….]
‘알았어, 미안해. 나도 그만 쓸게.’
[딜.]
‘후.’
수혁은 바루다의 상스러운 반응에 한숨을 푹 쉬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못했다.
솔직히 그도 놀랐으니까.
[정원이 참 좋네요.]
‘그러니까. 아니, 교수 연봉이 얼마나 되는 거야. 대체?’
[단위가 다르다고는 듣긴 했는데……. 아마 아이오와의 싼 집값도 어느 정도는 영향을 미칠 겁니다.]
‘아, 그런가.’
하긴 생각해 보니 여긴 도시가 아니라 시골이었다.
사는 사람들은 도시라고 부르는 거 같긴 한데, 서울 시민인 수혁이 보기엔 어딜 보나 시골이었다.
그러니 싸기는 할 터였다.
그렇다 해도 집이 너무 크고 좋긴 했지만.
“아, 저기 있네. 닥터 황. 아까 말했던……. 닥터 리예요.”
“오. 반가워요.”
닥터 황이라고 불리는, 혈액종양내과 소속이지만 진료 없이 연구만 하는 사내는 테라스에 앉아 있었다.
수혁도 다리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건 무리였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황 옆에 앉았다.
“그래. 여기 앉아 있으면 바비큐 갖다 줄게.”
행크는 그런 수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굳이 지팡이 짚고 다니는 수혁을 끌고 다닐 생각은 없었기에 그러했다.
“네, 교수님. 감사합니다.”
“아니, 아냐. 손님이니까, 편히 있어. 그냥 먹고 마시고 즐기면 돼.”
행크는 진심으로 그러길 바란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황을 향해 윙크를 보냈다.
엘리슨과 했던 말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한국말로 해도 되죠?”
“아, 네네.”
황은 행크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대뜸 한국말부터 꺼냈다.
어차피 언어의 어려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던 수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갑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 왔어요? 아, 태화라고 했나?”
“네. 태화 의료원에서 왔습니다.”
“거기……. 사실 제가 막 교수 될 때까지만 해도 완전 신생이었는데.”
한 40대만 됐어도 이런 말이 진짜 우습게 들렸을 텐데.
황이라는 사람은 60은 다 되어 보였다.
그 말은 곧 태화 의료원이 이제 막 개원했을 때 전문의를 땄을 거란 얘기였다.
어쩌면 이현종과 동년배일 수도 있어 보였다.
“아……. 네.”
“아, 저는 아선 병원 출신이에요. 거기서 교수 하다가……. 여기로 연수 와서 눌러앉았죠.”
“연수 와서요? 그게 되나요?”
“그럼요. 미국은 대부분이 소개장이면 취직이 되기 때문에 다 가능합니다. 와서 잘만 하면 다 돼요.”
“아…….”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다.
어차피 교수가 되면 1, 2년은 연수를 가게 되는데, 그때 간 병원에 아예 남을 수 있다니.
[그럼 이런 집에 살 수 있는 겁니까? 이런 바비큐를 먹고?]
수혁보다도 오히려 바루다가 더 발광했다.
워낙 좋은 고기를 워낙 정성스럽게 구워 대서 그런 모양이었다.
‘넌 무슨 기계가 기름기를 이렇게 좋아하냐.’
[자동차 같은 기계는 아예 기름 먹고 달리지 않나요?]
‘넌……. 넌……. 아니다. 됐다.’
수혁은 그런 바루다를 향해 핀잔을 늘어놓으려다가 역시나 한 방 먹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얘기가 좀 부족했나?’
그게 황에게는 불만족의 표시로만 느껴졌다.
해서 좀 더 성심성의껏 자신의 얘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행크와 엘리슨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역시나 한국어로 마음껏 떠들어 댈 기회가 흔치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딱 교수가 된 지 7년째에 넘어왔죠. 연수를 왔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여건이. 9시부터 6시까지 근무하고 칼퇴. 세상에, 칼퇴라니. 대학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칼퇴하는 사람 본 적 있습니까?”
“어……. 거의 없죠.”
진짜 내일모레 은퇴하시는 분들 말고는 칼퇴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수혁은 언제 퇴근해야 자신이 계약한 시간에 퇴근하는 건지도 잘 몰랐다.
남들은 근무 계약서라는 걸 쓴다고 하던데.
레지던트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냥 병원에 살 뿐이었다.
물론 주당 88시간 근무가 자리 잡으면서 옛날보다는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애초에 88시간이라는 거 자체도 비인간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긴 다들 그런다니까요. 지금도 봐요. 주말에 어디 이렇게 파티를 해. 근데 여긴 매주 한다니까요?”
“매주요?”
“네. 하루는 이 집에서 하루는 저 집에서. 사이들은 또 어찌나 좋은지……. 뭐 미국인들은 정이 없다 어쩐다 하는데 그거 진짜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한 번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면 거의 가족이에요.”
“가족…….”
진짜 가족도 없는 수혁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얘기였다.
하지만 동시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얘기이기도 했다.
이현종이나, 신현태, 조태진 등도 수혁을 진짜 가족처럼 대해 주고 있었으니까.
다들 너무 바빠서 그렇지, 그렇지만 않았으면 벌써 몇 번은 집에 초대해 주고도 남았을 터였다.
[연봉, 연봉을 물어봅시다. 왜 제일 중요한 건 얘길 안 해 줘.]
‘너 진짜 많이 변한 거 알지?’
[그래서 안 궁금해요?]
‘제일 궁금하지.’
솔직히 중요한 건 돈 얘기 아니겠는가.
하지만 또 제일 꺼내기 어려운 게 돈 얘기이기도 했다.
특히 상대가 처음 보는 사람일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
“오. 뭐 궁금한 거 있어요?”
“혹시 황 교수님도 이 근처에 사시나요?”
“이 근처? 아, 그럼요. 병원 교수들은 거의 여기 살아요. 난 걸어왔어요, 오늘.”
“이런 데는 비싸지 않나요? 전 행크 교수님은 금수저라서 이런 데 사시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수혁은 바루다의 코치를 받을 수 있지 않던가.
아주 자연스럽게 화제를 돈 쪽으로 돌릴 수 있었다.
“아……. 여기가 렌트비가 좀 비싸긴 하죠. 보통 연수생분들은 여긴 못 살아요.”
“그런데 교수님들은 거의 다 여기 사신다고요?”
“우리야 월급을 충분히 받으니까…….”
“얼마나 되는데요? 아, 혹시 실례가 되는 질문이었을까요?”
더구나 수혁은 연기도 상당히 받쳐 주는 편이었다.
연구 교수 신분으로 계속 연구에만 매진해 온 황 교수로서는 도저히 당해 낼 재간이 없었다.
“아니, 아뇨. 실례라니. 천만에…… 궁금할 수 있죠. 뭐……. 다른 사람들 연봉은 사실 잘 몰라요. 저는…… 대강 한 40만 달러 정도를 받습니다.”
“허…….”
40만 달러면 거의 5억 가까이 되는 액수였다.
수혁이 알기로 이현종 원장도 이렇게 많이는 못 받았다.
[대박. 미국이다, 미국. 돌아가지 맙시다!]
바루다 또한 환장하기 시작했다.
수혁은 뛰는 가슴을 애써 부여잡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연구 교수님이라서 특별히 많이 받으시는 건 아닌가요?”
더 자세히 캐묻기 위함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황 교수는 파닥거리기만 했다.
“에이, 아니죠. 연구 교수라서 적은 거죠. 물론 연구 교수 중에서는 많은 편입니다. 저는 여기저기서 펀딩을 많이 받아서. 그래도……. 임상 교수들보다는 아무래도 적죠.”
“그래요? 더 많다고요?”
“그럼요. 환자를 보는데 당연히 더 많죠. 행크 정도는 제가 대강 알긴 아는데…….”
“오.”
수혁은 굳이 ‘얼마예요?’라고 묻는 대신 눈을 빛냈다.
이미 털어놓는 모드가 된 황 교수는 그것만 해도 충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 한, 두 배?”
“와…….”
“어디 가서 얘기하진 말고요.”
“물론이죠. 이런 얘기 할 필요는 없죠.”
그런 것 치고는 꽤 치밀하게 캐묻기는 했지만.
아무튼, 제일 궁금했던 돈 얘기를 듣고 나자 비로소 연구실 자체에 대한 의문이 슬슬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수혁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닥터 황에게 이것저것을 캐물어 댔다.
중간중간 수혁의 외래 도장 깨기에 감명했던, 혹은 빈정 상했던 교수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연구실도 가려고? 조심해, 닥터 황. 이 친구 이거 보통내기가 아니더라고.”
“솔직히 교수 아닌가 의심스러워. 왜 그렇잖아. 동양인들은 다들 어려 보여서.”
“펠로우십 혹시 관심 있으면 얘기하라고. USMLE 따긴 해야겠지만……. 솔직히 닥터 리 정도면 우리가 추천서 써 줄 수 있지. 별문제 안 될 거야.”
그중에서는 심지어 펠로우십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흔히 한국의 의사 면허는 미국에서는 쓸모없다고 알려져 있긴 했지만.
실제로도 대부분 그러했지만.
정말 실력이 좋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예외 규정을 두고 있었다.
인종의 용광로 역할을 하며 성장해 온 국가답게, 여전히 우수한 인재에 대해서는 문을 열어 두고 있다는 얘기였다.
[진짜 고민되게 만드네요? 이 사람들?]
‘그러니까 말이야. 아무리 봐도……. 여기 대우가 태화보다는 좋을 수밖에 없겠지?’
[일반적으로는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너도 느꼈구나.’
[네. 닥터 황은 주류는 아니네요.]
제아무리 영어를 잘하고 실력이 좋아도 주류에 들어가 있지는 못한 듯했다.
연봉이나 기타 대우에서 불이익을 받고 있는 거 같지는 않아도.
알게 모르게 보직은 받지 못하는 듯했고.
게다가 닥터 황은 어딘지 모르게 외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다들 가족 같은 사이라고 얘기를 하긴 했지만.
글쎄.
닥터 황은 조금 다른 듯했다.
‘어차피 나는 2년 차잖아. 고민할 시간은 있으니까…….’
[물론입니다. 지금처럼 실력을 증명하기만 하면 기회가 있긴 할 겁니다. 게다가.]
‘이번에 얻은 케이스, 솔직히 도움이 될 거 같긴 해.’
[한국에서도 쓸 만하겠지만, 여기서도 통할 겁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케이스 자체가 미국에서 얻어 낸 케이스였으니까.
한국에서는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들도 제법 섞여 있었더랬다.
심지어 같은 질환인데 경과가 다른 경우도 있었고.
모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케이스라고 보면 되었다.
그걸 홀랑 빼 온 것만으로도, 이번 미국행은 어마어마한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 있었다.
“황 교수님, 오랜만이네요.”
대화는 이제 거의 잡담 수준으로 변해 있었다.
의대생 때 어땠고, 미국 와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고 정도?
해서 점점 텐션이 떨어져 가던 찰나에 누군가 인사를 건네 왔다.
다들 편하게 입고 있는 와중에 혼자 정장을 정말 멋지게 빼입은 흑인 사내였다.
목소리조차 젠틀하기 그지없어서 수혁은 저도 모르게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로니! 언제 왔어요?”
지금까지 내내 앉아 있기만 하던 닥터 황이 그 흑인 사내를 보자마자 부리나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상하 관계에 있든지, 갑을 관계에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런데도 로니라는 사람은 그저 젠틀했다.
“방금요. 오랜만에 연구소 사람들 보러 왔다가, 황 교수님은 여기 계신다고 해서.”
“아……. 그 네. 연구비 받은 건 잘되어 가고 있습니다. 곧 결과를…….”
“아뇨, 아뇨. 그런 얘기 하러 온 거 아닙니다, 하하. 근데……. 이분은 처음 보는 분 같은데요?”
“아아. 닥터 리. 이쪽은 로니예요. 화이자 연구 총책인데……. 제 가장 큰 스폰서입니다. 아니, 아마 여기 있는 교수들 대부분에게 그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