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I 닥터-106화 (106/1,303)

106화 헨리 (2)

‘좋네.’

수혁은 그 후로도 맥주 한두 잔을 더 마시곤 기숙사로 돌아왔다.

배정받은 방은 게스트 룸 중에서도 꽤 좋은 편에 속하는 방이라 상당히 널찍했다.

아마 시카고 시내에 있는 건물이었다면 침대 하나 덜렁 들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래도 약간은 외곽에 있어서 그런지 나름 테라스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ASMR이라…….]

수혁은 그 테라스에 살짝 기댄 채 밖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시카고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이제야말로 미국에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오와는 미국이라기보다는 시골에 더 가까운 곳이었으니까.

[딴 생각 그만하고. 헨리에 대해서 생각해 봐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 생각은 뭐 하러 해.’

[얼굴만 모르지, 정보는 꽤 많이 알아냈잖아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걱정이야, 인마. 너무 캐물은 거 같아.’

[다들 꽐라 되어 있었으니까, 걱정 마시죠. 내일 무슨 대화 나눴는지 기억 못 할 인간들이 거의 절반은 될 겁니다.]

‘음.’

수혁은 바루다의 말에 의문을 표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보기에도 연구소 직원들은 적당한 음주를 넘어 폭음 수준으로 마셔 재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화이자 연구원들 정도면 상당한 엘리트들일 텐데.

술 마시는 것만 보면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헨리나 고민해 봐요.]

‘잠깐. 나도 술 마셨잖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아, 어쩐지 데이터 정리가 잘 안 되더라.]

‘차라리 자고 일어나서 하는 건 어때?’

같이 마신 사람들이 죄다 꽐라가 된 상황 아니던가.

아무리 수혁이 다리 핑계 대면서 꺾고, 또 꺾어 마셨다고 해도.

워낙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이었다.

힘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건 안 됩니다.]

하지만 바루다는 아주 단호했다.

너무 단호해서 조금은 황당할 지경이었다.

‘뭐야, 왜 안 돼. 다 느껴진다며. 어지러워, 지금.’

그래서 수혁은 자신의 힘듦을 어필했다.

[안 됩니다, 그래도.]

‘왜!’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안 좋……. 아니, 기억이 잘 안 남는데……. 지금 자 버리면……. 아무것도 안 남아요. 한 번이라도 되짚어 줘야 됩니다.]

‘하…….’

수혁은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해서 한숨만 쉬었다.

‘영화에서는 몸 안에 너 같은 놈 하나 들어와 있으면 알아서 해독도 하고 하던데. 넌 안 돼? 어? 내 몸 좀 조정해서.’

[그게 가능했으면…… 가능하면 좋겠어요?]

어쩐지 몸을 빼앗기는 에이리언 같은 영화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아니, 와 소름 돋은 거 봐라, 이거.’

[그러니까 힘냅시다. 다 나한테 맡길 생각하지 말고.]

‘후…….’

그래서 수혁은 한숨과 함께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쉬었다.

그래 봐야 결국, 완전히 깨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어느 정도는 정신이 들었다.

[정리하면, 헨리는 52세 남성입니다.]

‘백인 남성이지. 이혼했고, 아이는 없고. 혼자 살고.’

[술 안 먹고, 교우 관계는 밝혀진 바 없군요.]

‘개판인데?’

헨리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인 듯했다.

수잔의 말에 따르면 그래서 일중독처럼 매일 연구소에 나온다고 했다.

아까 바에서 들을 땐 어느 정도 상사에 대한 악감정이 영향을 미쳤겠거니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정리해 보니 확실히 좀 이상한 사람이었다.

‘건강 검진에서 걸린 건 없었다고 했지? 근데 이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수잔이 연구실에 배달된 건강 검진 표를 잘못 들춰 봤다고 했습니다.]

‘잘못은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잘된 일이지?’

[네. 혈액 검사에서 걸린 게 없었으니, 만성 질환은 없는 셈이죠.]

‘그럼……. 역시 정신과적 질환 아닐까? ASMR이라니……. 난 그런 거 스피커로 틀어 놓는다는 사람은 처음 봤는데.’

[ASMR 관련한 논문 읽은 건 좀 있죠?]

‘논문인가, 그게.’

수혁은 바루다 때문에 닥치는 대로 읽어야만 했던 논문 더미를 떠올렸다.

최근 워낙 ASMR이 핫하다고 해서 관련한 것도 몇 개 읽기는 했었는데.

솔직히 논문이라고 불러 주기엔 너무 조악한 것뿐이었다.

기껏해야 사람 열 명 정도 두고 설문 조사한 것들 정도였다.

[하긴 정신건강의학과 쪽에서 정식으로 나온 논문은 없었죠.]

‘당연하지. 학문적으로 접근하기가 좀 어렵잖아?’

ASMR을 들으면 심리적 안정 효과가 있다는 결론을 낸 논문들은 꽤 있었다.

물론 편의상 논문이라고 부르는 거지, 실제론 거의 전문가 의견 수준에 불과한 것들이지만.

아무튼, 수혁이 보기엔 그 결론 자체도 문제가 많았다.

그게 이론적으로 성립이 되려면 같은 자극에 대해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여야 했으니까.

하지만 해당 보고서를 보면, 어떤 사람은 종이 찢는 소리에 반응하고, 또 어떤 사람은 빗소리에 반응하는 등 거의 모든 사람이 각기 다른 자극에 반응했다.

[근데……. 수잔의 얘기를 들어 보면 헨리는 딱 하나의 ASMR만 듣는 거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 맞아. 안 가리고 듣는 거 같은데.’

[그렇다면 ASMR 자체로 인한 안정감을 원하는 게 아닌 거 아닐까요?]

‘그럼 왜 틀어 놔? 미쳐서?’

[그게 의문이군요.]

‘일단 이 정도 했으면 됐지? 낼 직접 보고. 보고 얘기해 보자.’

[흠……. 알겠습니다.]

바루다는 수혁의 혈관이 점점 더 확장되어 오는 것을 느끼곤 수혁의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이미 아세트알데하이드의 혈중 농도가 너무 올라와서 더 시간을 끌어 봐야 유의미한 대화를 이어 나가기도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저기 오는군요.]

다음 날 수혁은 1층 식당에서 나오는 토마토 수프로 속을 달랜 후, 약속된 시간인 10시까지 연구소로 향했다.

딱 봐도 인상 더러워 보이는 백인 아저씨 하나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저게 헨리구나.’

[아랫사람들이 싫어할 만하네요.]

나 기분 나쁘다는 아우라를 온몸으로 내뿜어 대고 있는 사람을 대체 누가 좋아하겠는가.

“닥터 리?”

아무튼, 헨리는 터덜터덜 걸어와서는 안경을 고쳐 잡으면서 수혁을 바라보았다.

아마 수혁이 직접적인 아랫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오금이 다 저려 왔을 터였다.

하지만 천만다행하게도 수혁은 딱히 헨리와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호감을 사 두면 좋기야 하겠지만.

딱히 여기서 관계가 끝나도 손해 볼 건 없다는 뜻이었다.

“아, 네. 헨리 소장님 되시나요?”

“로니에게 얘기는 들었어요. 뭐……. 상당히 흥미로운 논문을 썼다던데. 관상동맥……. 심장은 늘 재밌는 주제지.”

이제 보니 로니는 정말 수혁이 보내 준 논문을 읽은 모양이었다.

그걸 헨리에게 전달해 준 것 같았는데, 다행히 헨리는 심장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네. 하하. 공부할 때마다 늘 새롭습니다.”

“아무튼, 피차 바쁜 사람이니. 후딱 돌고 끝냅시다. 닥터 리도……. 시카고 여행이나 다녀오면 그게 더 나을 테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헨리의 퉁명스러움이 어디로 사라지진 않았다.

그는 정말로 수혁을 안내해야 하는 이 귀찮은 일을 빨리 끝내길 원하는지 무척 빠르게 걸었다.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지팡이를 짚고 있는 수혁을 배려하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이 인간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바삐 걸어갈 뿐이었다.

‘성격 더럽네.’

[근데…….]

‘근데 뭐?’

[분석 결과 뭔가 좀 괴로운 거 같은데요?]

‘숙취가 있나?’

수혁이 보기에 저 표정은 흔히 술 마신 다음 날 볼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바루다는 어제 정리했던 정보를 상기해 냈다.

[저 인간 술 안 마신다고 하던데요?]

‘아 그렇네.’

[술 냄새도 나지 않고요. 밤새 술을 마셨다고 하기엔 머리 모양도 단정하고, 턱수염도 잘 깎여 있습니다. 상처도 없는 거로 보아, 알코올 사용 장애일 가능성은 적습니다.]

‘셜록 흉내 내지 말라니까.’

[보이는 걸 어떡합니까?]

‘후.’

수혁은 바루다의 잘난 척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바루다의 말이 다 사실이긴 했다.

털이 진하지 않은 동양인에서는 몰라도, 서양인에서는 턱 주변의 상처 여부가 전날 음주 또는 만성적인 알코올 사용 장애를 가늠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헨리는 상처가 나 있기는커녕 아주 깨끗하기만 했다.

‘그럼 일단 술은 아니고. 뭐가 괴로운 거야? 속이 쓰린가?’

[그런 것치고는 커피를 들고 있군요.]

‘음. 그것도 그렇네. 뭐지?’

수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지런히 헨리의 뒤를 따랐다.

입구 안쪽으로는 보안 검색대가 놓여 있었는데, 이건 수혁이 미리 머리 쪽의 부상을 말해 둔 덕에 별문제 없이 통과가 되었다.

어차피 소장인 헨리가 직접 데리고 들어가는 길이었기에 경비원들도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기도 했고.

“에이.”

검색대에서는 기계 특유의 윙 소리가 났는데, 헨리는 그 근처를 지나면서 인상을 좀 더 찌푸렸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눈치채지 못했을 변화였지만.

수혁이나 바루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방금 봤냐?’

[네. 검색대 통과하면서 인상을 찌푸렸어요.]

‘설마하니 엑스레이를 느낀 건 아닐 테고.’

[공상 과학입니까? 당연히 아니죠.]

‘그럼…….’

[소리. 소리로 인한 불편이군요.]

‘이명이구나.’

이명.

귀에서 나는 소리라고 보면 되었다.

대개 일시적으로 겪고 넘어가는 수준에 그치겠지만.

심한 사람들은 24시간 이명이 들리기도 했다.

딸깍.

헨리는 빠르게 검색대를 통과한 후, 곧장 자기가 주관하는 연구실에 들어섰다.

그리곤 정말 딱 들어서자마자 스피커를 켰다.

스피커에서는 듣기 좋은 음악이 나오는 게 아니라, 수잔이나 다른 연구원들이 내내 불평해 댔던 그 이상한 ASMR이 흘러나왔다.

이번엔 종이 찢는 소리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불쾌할 수 있는 소리였다.

[표정이 좋아졌군요.]

‘이게……. 사실 백색 소음 같은 거지?’

[그렇죠. 수잔은 단순히 ASMR에 의한 팅글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실은 이명이 소거되면서 고통이 사라진 거구나.’

[이상하군요. 검진 결과에서는 청력이 정상이라고 했다던데. 보통 난청이 동반되지 않는 이명은 이런 식으로 심하게 나타나지 않는데.]

이명의 발생 기전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얘기들이 참 많지만.

일단 난청으로 인한 뇌에 대한 소리 자극의 소실이 트리거가 된다는 것이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물론 정상 청력에서도 스트레스 또는 컨디션 저하 또는 경추 디스크와 같은 근골격계 질환으로 인해 이명이 발생하기도 했지만.

그런 종류의 이명은 난치성 이명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뭐……. 청신경 종양이라도 있는 거 아냐?’

[화이자의 연구소장인데 MRI 한번 안 찍어 봤을까요?]

‘하긴……. 그럼 뭐야? 청력도 정상이고, 뇌종양도 없는데 이명에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수혁은 재차 헨리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수혁에게 보여 줄 무언가를 급히 챙기고 있었는데, 확실히 아까보다 훨씬 나아 보였다.

그래 봐야 보기 좋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까처럼 짜증이 솟구칠 정도는 아니었다.

“음. 여기서 연구 중인 건……. 일단 비아그라 후속 연구랑……. 음? 뭘 그렇게 봅니까?”

헨리는 자료 몇 가지를 추리다가 수혁의 시선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읍시다.]

수혁은 무례하게 느껴졌나 싶어서 잠시 당황했으나.

바루다는 역시 그런 게 없었다.

생각해 보니까 못 할 것도 없을 거 같았다.

의사가 진료하겠다는데 때와 장소가 뭔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냅다 질렀다.

“혹시 이명 있으세요?”

[아니,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물으란 건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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