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기적 (2)
“아직은 이르죠.”
수혁은 인사를 받아 주는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지팡이를 짚은 채 엡스를 따라 수술실로 향했다.
‘기분이 묘한데.’
정말로 그러했다.
[왜요?]
‘원래 이런 상황이면 기분이 진짜 좋아야 하잖아?’
[지금까지 수혁의 행동 양상을 보면 그래야 하긴 하죠.]
‘이상한 단서 붙이지 말고.’
[저한테 자꾸 공감을 원하는 게 이상한 겁니다.]
‘후. 아무튼.’
수혁은 자신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걷는 엡스를 바라보았다.
엡스는 그런 수혁의 얼굴에서 복잡한 감정을 읽어 낸 모양이었다.
원래 내과 의사로 오래 살다 보면 그런 능력이 생기는 법이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심리적으로 힘든 환자들과 의사들을 많이 보게 되니까.
심지어 그게 자기 자신이 되기도 했고.
“왜 그래요? 닥터 리? 진단이 마음에 안 들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수혁은 뒤편을 바라보았다.
이미 꽤 복도를 걸어온 후였기에 뭐가 보이진 않았다.
특히 벌써 환자 엘리베이터로 이동해 버린 장 폴은 흔적조차 없었다.
하지만 수혁의 눈에는 교활하기 짝이 없던 그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장 폴이라는 죄수는 어떤 죄를 지었을까요?”
“뭐 자세하게는 알 수 없죠.”
엡스는 다 알겠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원래 재소자들의 범죄 이력은 적어도 의사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제아무리 의사들이라도 사람이지 않은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 교도소에 있는 죄수라면 적어도 살인은 저질렀을 겁니다.”
“살인…….”
“게다가 하반신이 불편한데도 딱히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죠?”
“네.”
“그 말은 상당히 거물이라는 뜻이에요.”
미국의 교도소는 일정 부분 정글 같은 곳이라고 보면 되었다.
약육강식이라는 말이 거기만큼 잘 통용되는 곳도 없다는 뜻.
거기서 장 폴과 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대개는 먹잇감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멀쩡히 잘 살아 있다는 건 그만한 무형의 힘이 있다는 얘기였다.
엡스는 비록 본인이 교도소에 가 본 적은 없었지만, 진료하면서 주워들은 덕에 어느 정도는 그들의 생리를 알고 있었다.
“나쁜 놈 중에서도 나쁜 놈이라는 거네요?”
“뭐……. 그렇죠.”
“그런 놈을 치료해 주는 게 옳은 걸까요?”
“아.”
엡스는 수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수혁이 아직 레지던트 2년 차에 불과한 애송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긴……. 아직 어리지.’
레지던트 2년 차라는 직함만 해도 어린데, 수혁은 그 2년 차 중에서도 어린 편이었다.
미국에서는 일반 대학을 나온 후, 의대에 진학하는 형태가 보편화되어 있는 데다가.
일반 대학을 스트레이트로 졸업하기보다는 휴학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스티브만 해도 수혁보다 4살이나 더 위였다.
‘무리는 아냐.’
비록 진단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경험이 부족했다.
엡스는 그나마 수혁에게 인간적인 면이 있기는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입을 열었다.
“닥터 리. 의사는……. 환자에 관해서 가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알고는 있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되네요.”
“처음엔 그럴 거예요. 저도 제가 치료한 환자가 범죄를 저질러서 교도소에 들어간 걸 알게 된 적이 있어요. 뭐……. 이런 식으로 진료를 다시 보러 와서 알게 된 건데.”
“아.”
“하지만 그런 경우만 있는 건 아닙니다. 사람은 변해요.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저는 좋은 쪽으로 변하는 사람도 많이 봤어요.”
솔직히 엡스도 이미 인생 살 만큼 산 장 폴이 바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그 장 폴 때문에 바뀔 가능성이 있는 다른 사람들의 치료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의사는 의사가 아니게 될 테니까.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환자의 가치에 관한 판단은 삼가야 한다는 의견엔 이견이 없었다.
의사란 감히 다른 사람의 생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그 생명에 관한 가치에 관심을 두게 된다면 그건 너무나도 가혹한 일이었다.
환자에게도 그렇고, 의사에게도 그러했다.
“음.”
“닥터 리. 오늘 닥터 리는 한 사람의 납 중독을 진단했고, 어쩌면 하반신 마비까지 치료해 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단한 일을 한 거예요.”
“하지만 장 폴은…….”
“그 대상을 장 폴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어렵겠지만, 그래야만 합니다. 교수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의 의사 선배로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수혁은 당장 답을 하진 못했다.
하지만 뭔가 엡스의 말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일단 데이터베이스화하겠습니다. 나중에 한번 더 생각해 보시죠.]
‘그래, 그게 좋겠어.
[지금은 일단 수술에 집중하죠. 이런 기회는 흔치 않을 겁니다.]
‘하긴. 그렇지.’
언제 신경외과 수술을 들어가겠는가.
태화 의료원으로 들어간다면 그런 요청이 받아들여진다고 해도 시간이 없어서 못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해서 수혁은 우선은 눈앞의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래요, 닥터 리. 이쪽입니다. 여기로 들어가면 됩니다.”
“네.”
수혁은 그렇게 참관실 안으로 들어갔다.
참관실 내부엔 모니터도 하나 놓여 있었고, 커다란 창을 통해서는 수술실을 거의 수직으로 내려다볼 수 있게끔 방이 튀어나와 있었다.
무너지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게 하는 시설이었지만.
뭐가 어찌 되었건 안은 잘 보였다.
“안에 잘 들립니까?”
수혁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만 했기 때문에, 마이크와 신경외과 레지던트 그리고 마취과 등등이 이미 들어와 있었다.
아니, 장 폴도 엎드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서 얼굴이 보이진 않았지만.
제법 긴장한 티가 났다.
앞쪽으로 튀어나온 손잡이를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네. 잘 들립니다.”
“오케이. 수술이 잘 돼야 욕이 안 들어갈 텐데.”
“잘되겠죠.”
“자, 그럼 마취 시작해 주세요.”
마이크는 듣는 레지던트로 하여금 섬뜩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말을 하곤 마취과 쪽을 바라보았다.
마취과는 척추 마취에 이어 수면제를 환자의 팔뚝에 꽂힌 라인에 집어넣었다.
“잠들었습니다.”
“좋아. 시작.”
마이크는 연신 사방을 두리번거리던 장 폴의 눈이 스르륵 감기는 것을 확인한 후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간호사가 즉시 국소 마취제부터 건네주었다.
인턴 때를 제외하고는 수술실에 아예 처음 들어와 보는 수혁으로서는 상당히 생소한 광경이었다.
‘마취를 또 거네?’
[이것에 관해서는 딱히 데이터가 쌓인 게 없군요.]
바루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가 수혁의 몸에 들어온 후로는 아예 수술실에 가 본 적이 없지 않은가.
그쪽 관련해서는 논문을 읽어 본 적도 없었고.
심지어 이렇게 간단한 술기에 관해서는 교과서에도 잘 안 쓰여 있었다.
직접 수술실에서 배워야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잘 먹은 거 같아? 마취?”
“네.”
“오케이. 칼.”
마이크는 확실히 신경외과였다.
쩨쩨하게 의료 기기 이름을 풀로 부르거나 하지 않았다.
“당길 거.”
“벌릴 거.”
“잡을 거.”
이 사람이 기구 이름을 모르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용도만 부르고 있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간호사는 용케 다 알아듣고 그때그때 적절한 기구를 건네준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당길 거 달라고 할 때마다 다른 걸 건네주는데, 그게 다 상황에 들어맞았다.
‘대단한데? 수술을 읽는 건가?’
[경험이겠죠. 딱 보니까 잘 맞는 팀 같은데.]
‘이런 것도 시스템인가?’
[아마도요.]
생각해 보면 내과 진료를 보거나 할 때도 꼭 같은 교수마다 정해진 간호사가 들어왔고, 정해진 직원이 들어왔더랬다.
팀워크가 잘 짜인 상태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다는 느낌이랄까.
외래에서도 그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수술실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지이익.
수혁이 바루다와 더불어서 부러움의 시선을 던져 대고 있을 때쯤, 마침내 마이크가 파편에 도달했다.
절개는 아주 작게 세로 방향으로 나 있었는데, 딱 봐도 저것만 째고 수술하기란 무척 어려워 보였다.
마이크의 실력과 경험도 물론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긴 할 테지만.
수혁이 볼 때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건 일명 내비게이션이라고 불리는 장비였다.
‘저건 뭐여?’
[아까 찍는 MRI 장비를 토대로……. 지금 어딜 건드리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장비 같은데요?]
‘엄청 좋네?’
[그래 봐야 저보단 후지죠.]
‘왜 기계 얘기만 하면 경쟁심을 불태워. 아예 다른 기계잖아.’
[말이 그렇다는 거죠.]
수혁은 투덜대는 바루다를 뒤로한 채, 다시 수술 장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니터로도 일부 보였고, 유리창을 통해서도 일부 보였다.
하필 마이크의 뒤통수가 카메라를 가리고 있어서 완전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뭘 하고 있는지 정도는 대강이나마 알아차릴 수 있었다.
땡그렁.
곧, 장 폴의 우측 다리 위약의 원인으로 생각되었던 탄환 조각이 빠져나왔다.
철로 된 곡반 안에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가 아주 싱그러웠다.
“읍.”
그와 동시에 잠들어 있던 장 폴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려고 했다.
머리가 기구에 고정이 되어 있지만 않았다면.
아마도 신경 근처에 있던 것이 빠져나가면서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실제 팔꿈치 근처를 모서리 같은 곳에 부딪혀 본 적이 있다면 아마 대강은 공감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찌릿한 느낌은 한낱 수면제 따위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아, 깼네? 잘됐네.”
마이크는 전혀 당황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어차피 깨우려고 했는데 잘됐다는 말을 하면서 장 폴의 머리 쪽으로 이동했다.
“지금 말 완전히 알아들어요?”
“으. 네.”
마취를 해 놔서 통증이 있지는 않았지만.
아주 기묘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누가 등을 열어 놨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장 폴은 인상을 잔뜩 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고정된 탓에 헐떡이는 느낌이 더 강하긴 했지만.
아무튼, 마이크는 대강 알아먹었다.
“자, 그럼 오른쪽 무릎 굽혀 봐요.”
“네? 저 무릎 못 움직이는데요?”
“아니, 해 보라고. 그거 하려고 수술받은 거예요.”
“이, 이 상태에서요?”
장 폴은 자신이 비록 의학을 배운 적은 없지만.
등을 연 상태에서 뭘 하라고 요구하는 의사는 없어야 정상일 거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잠깐 ‘아, 드디어 내가 막살아 온 것에 대한 진짜 벌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하지만 마이크는 진지했다.
“해 봐요.”
“음.”
장 폴은 그래, 내가 의술에 알면 얼마나 알겠냐는 생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물론 혈관 찾는 일은 어지간한 의사보다 잘할 자신이 있긴 했지만.
그가 여태 찔러 넣은 건 약이 아니라 마약뿐이란 사실을 상기했다.
“음.”
“움직여 봐요.”
“음?”
“오.”
“지금……. 이거…….”
“움직이네. 근육이 하도 약해서 그렇기는 한데……. 움직여.”
장 폴의 오른쪽 다리가 움직이는 걸 본 것은 비단 마이크 뿐은 아니었다.
참관실에 있던 교도관도 엡스도 스티브도 보았다.
물론 이 기적이 가능하게 한 수혁도.
“우, 우아! 이거 진짠가!”
장 폴은 그야말로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흠.”
이상한 일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찝찝한 기분이 있었는데.
막상 다리를 움직이며 기뻐하는 장 폴을 보고 있자니, 살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의사는 사람을 고쳐야 하는 건가 보다.’
[그래야 돈을 버니까요?]
‘아니, 아니. 너는……. 아니다,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