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귀국 발표회 (2)
“수혁아!”
“나랑 가자!”
“나랑!”
아주 잠깐 사이에 화이자 학회에 가면 연구비를 딸 수 있다는 이상한 소문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그게 또 완전히 헛소문은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 수혁과 친하지도 않았던 교수들조차 수줍게 손을 들고 있었다.
[쟤들은 왜 들어.]
‘쟤들이라니. 교수님들이야.’
[교류도 없잖아요? 특히 저놈 저거. 내분비내과 서효석 저거.]
‘저 새끼……. 아니, 저분은 별로긴 하지.’
[방금 입 모양으로도 새끼라고 한 거 같은데? 괜찮은 거예요?]
‘뭐. 괜찮아. 자기한테 욕하는 건 줄도 모를 걸?’
서효석.
다른 병원 그리고 다른 과에 비하면 거의 천사 판이라고 할 수 있는 태화 의료원 내과 의국의 이단아였다.
원래 교수가 되면 안 될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아버지 그리고 장인 백으로 들이밀어서 된 인간이었다.
‘하필 이번 달부터 저 인간이네.’
[뭐……. 병원 안 나오게 만들면 좋아하잖아요? 알아서 하면 되죠, 뭐. 여태 그랬는데.]
‘그건 또 그렇긴 하다.’
수혁은 꼴 보기 싫은 인간으로부터 고개를 애써 돌린 후, 자기를 애정하는 3인을 바라보았다.
이현종, 신현태 그리고 조태진.
다른 교수 중에서도 당연히 에이스 중의 에이스인 수혁을 이뻐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저렇게 체통도 안 지켜 가면서까지 이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지?”
“수혁아, 나 아빠다.”
“원래 혈육 간에 이런 거 하는 거 아니다, 수혁아.”
다들 나이도 잡술 만큼 잡수신 데다가, 사회적 지위까지 있는 사람들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셋이 하나같이 손을 번쩍번쩍 들어 가면서, 심지어 이현종은 최근 오십견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이게 뭐 그냥 학회 하나 가려고 그러는 것이겠는가.
수혁이랑 어떻게든 시간을 보내고, 될 수 있으면 자기 과로 교수 만들려고 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어서 수혁은 더더욱 고마웠다.
[빨리 말씀하시죠. 당신은 더는 저와 함께할 수 없습니다.]
‘알겠…… 미쳤냐? 쇼미더머니 좀 그만 봐, 인마.’
[재밌던데.]
수혁은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바루다를 조용히 시킨 후, 심호흡을 했다.
그리곤 우선 이현종을 바라보았다.
이현종은 당연히 자기가 뽑힌 줄 알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저 사람은 절대 갈 수 없다는 걸 아마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테니까.
“원장님.”
“아빠라고 해, 아빠.”
“아니…… 여기서는 좀…….”
“괜찮아. 아빠라고 해라, 아들아.”
“그런 문제가…….”
수혁은 웅성대는 다른 이들을 민망하다는 얼굴로 한차례 둘러보고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빠…….”
“옳지.”
“아빠는 못 가요…….”
“그래, 역시. 응? 난 왜 못 가, 이 새꺄!”
이현종은 방금까지 그렇게 살갑게 대해 준 주제에 돌연 욕설을 내뱉었다.
아마 욕을 먹은 게 수혁이 아니었다면 오줌이라도 지렸을 터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원장이었으니까.
하지만 수혁은 이미 너무 오래 이현종을 겪어 온 몸이었다.
[또, 또 저러네.]
‘하루 이틀이냐.’
이현종은 원래 저런 인간이었다.
해서 수혁은 쪼는 대신 한숨을 푹 쉬고는 말을 이었다.
“이거 일정……. 겹치잖아요.”
“취소할게.”
“아니……. 원장님 내년에 심장학회 학회장인데, 거기 안 가려고요?”
“어? 그거랑 겹치니?”
“네.”
“아, 이런 망할.”
역시나 합당한 이유를 듣자마자 이현종은 허허하고 나지막이 욕을 내뱉더니 힘없이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조태진이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뭐니 뭐니 해도 현대 의학의 화두는 역시나 암이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치매를 비롯한 항노화에 관한 연구와 항암에 관한 연구가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된 세상이었다.
‘어휴, 감염이라니…….’
그에 비하면 옆에 서 있는 신현태 교수가 맡고 있는 감염내과는 약간 유행이 지나간 과였다.
신현태가 분과를 선택할 때야 뭐 감염내과가 모든 내과의 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란 뜻이었다.
물론 암 환자들도 면역 때문에 결국에는 감염내과의 도움을 받게 되기는 하지만.
적어도 현대 의학에 있어서 메인 타깃은 감염 쪽이 아니라 항암이었다.
따라서 조태진은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조태진 교수님.”
“어, 그래, 수혁아. 혈액종양내과 교수 조태진이야.”
심지어 먼저 이현종을 탈락시킨 수혁이 자신을 바로 이어서 호명했음에도 그러했다.
그가 알기로 화이자에서도 항암제 연구를 위해 태우고 있는 돈이 조 단위에 육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간과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교수님 저 날 되게 중요한 약속 있지 않나요?”
“응? 나 학회 아닌데?”
“학회 말고요.”
“학회 말고……?”
조태진 교수는 대체 학회 말고 나한테 이 중요한 일정을 제낄 만큼 소중한 게 뭐가 있나 하는 표정이 되었다.
수혁으로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평소에 그렇게 딸 바보라고 떠들어 놓고선……. 생일을 잊어?’
[미쳤네요. 죽을라고.]
‘그러니까……. 거기 성미 괄괄하던데.’
[전 아직도 그날이……. 잊히질 않습니다.]
‘어어 떨지 마.’
[으.]
바루다라는 인공지능마저 벌벌 떨게 할 만큼 무서운.
하지만 아마도 조태진에게는 자신을 쏙 빼닮아서 이쁘기만 할, 그의 딸 생일이었다.
평소 주에 하루는 꼭 집에 가서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 조태진을 생각해 봤을 때, 저 날 외국에 나갈 수 있는 확률은 제로였다.
“뭐야, 대체.”
수혁은 정작 그 사실을 떠올리지 못하는 조태진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신현태가 왜 그런지 알겠다는 듯한 얼굴로 껄껄 웃었다.
그리곤 조태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날 연수 생일.”
“어? 아. 아…….”
조태진 교수는 자신이 무려 딸 생일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에 좌절하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교수하겠답시고 가정을 등한시했던 세월이 수년이지 않았던가.
다른 과 교수들도 다 빡세긴 하겠지만.
그야말로 생명을 다루는 최전선에 있다시피 한 혈액종양내과 교수의 중압감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연수야, 아빠 저기 안 간다.’
미국 연수 갔을 때 이르러서야 비로소 딸 나이랑 생일을 헷갈리지 않게 되었을 정도로 매진했더랬다.
자신이 그런 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충격이었던 조태진은 그날 결심했다.
앞으로 절대 딸 생일 만큼은 놓치지 않기로.
“그럼 나지?”
아무튼, 두 강력한 경쟁자를 제끼게 된 신현태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찌나 자신만만해 보이는지 수혁조차 안 된다고 해 볼까 하는 유혹이 일 지경이었다.
“네, 과장님. 스케줄 괜찮으시면 저랑 함께 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 수혁은 감히 과장을 두고 장난을 칠 정도로 개념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오, 좋아.”
“자세한 얘기는 교수님하고 나누겠습니다. 그럼……. 제 발표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대강 마무리를 하고 단상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당연하게도 교수들과 그의 팬클럽이 우르르 다가왔다.
일단 미국에서 다녀온 지 얼마 안 된 탓에 반가워서가 첫 번째 이유였다.
“가서 살이 좀 찐 거 같은데?”
공항까지 마중 나와 주었던 이현종과는 달리 여기서 처음 보는 조태진이 수혁의 뱃살을 움켜쥐었다.
솔직히 쥘 때는 이렇게까지 많이 잡힐지 몰랐는지, 상당히 놀란 얼굴이 되었다.
“어? 이거 다 살이니?”
“그……. 네. 거기 햄버거가 맛있더라고요.”
“삼시 세끼 그것만 먹은 건 아니……. 먹었다고? 미쳤니? 너 그러다 인마. 심혈관 막혀!”
“운동…… 해야죠.”
“아니, 먹는 걸 줄여야지. 운동하면 얼마나 한다고. 다리도 불편한 녀석이.”
“그……. 네. 명심하겠습니다.”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바로 어택이 딱딱 들어왔다.
“너 체중 1kg 늘 때마다 고지혈증이나 당뇨 및 고혈압에 걸릴 확률이 얼마나 올라가는지 아냐? 젊다고 건강 자신하지 마. 아니, 너 이제 젊지도 않어 인마. 곧 30대잖아. 내가 지금 너랑 그 학회인지 나발인지 못 가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라고.”
심지어 이현종은 뒤에서 고지방 식이에 따른 심혈관 질환 발생 가능성에 대한 논문을 읊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으, 시끄러워.]
‘하지만 좋지?’
[네. 뭐……. 아무래도.]
‘고향이야. 내 고향.’
[왠지 무슨 느낌인지 알 거 같군요.]
시끄러운 와중에도 수혁은 환하게 웃었다.
솔직히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이리저리 흔들렸던 건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그쪽 교수들이 여기보단 좀 더 여유가 있어 보였으니까.
하지만 원래 미국인으로 태어났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여전히 이방인이었다.
완전히 섞여 들어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무튼, 가서 그래도 좋은 경험하고 왔네. 정말 많이 보고 왔어.”
과장인 신현태는 모두가 신변잡기에 관한 것을 떠들어 대는 동안에도 그나마 과장다운 말을 꺼냈다.
“이 새끼는 저 혼자 학회 가게 됐다고 신난 거 봐라, 이거.”
물론 옆에서 도와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신현태는 꾸준했다.
“에이, 뭘 신나요. 아니, 제자가 몸 성히 잘 다녀왔으니까 좋은 거지.”
“아……. 뭐, 그건 그래. 아이오와야 워낙에 사고가 없는 곳이라 그렇긴 해도. 저기 뭐야. 그래, 시카고는 총기 사고 꽤 잦은 곳인데 안전하게 잘 다녀왔다.”
“아아! 나 황 교수님한테 너 얘기 들었어, 참. 안부 전해 달라고 하시더라.”
막판에 조태진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오와에서 봤던 황 교수가 혈액종양내과였다.
“아, 원래 알고 지내세요?”
“어. 거기 가기 전에는 학회 활동 열심히 했었지. 원래 환자 보는 것도 좋아하셨는데……. 이젠 뭐 아예 연구 쪽으로 빠져서 좀 뜸한데……. 그래도 학회 가끔 가면 한 번씩 봐. 거기서 아주 인상 깊었다고 하더라.”
“그래? 역시 우리 수혁이. 엘리슨한테 전화나 해 봐야지.”
이현종은 자신의 예상대로 거의 찢다시피하고 온 수혁을 대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는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이곳과 아이오와 사이에는 상당한 시차가 있고, 따라서 활동 시간이 거의 겹치지 않았지만.
원래 그런걸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니지 않은가.
“왜 안 받아, 자나?”
해서 이현종은 냅다 전화를 건 채 조금 멀어져 갔다.
그사이 신현태가 말을 이었다.
“그래. 이번 달…… 어디지?”
“내분비입니다. 서효석 교수님.”
“아. 뭐……. 그 친구랑 그렇게 서먹하진 않지?”
“네. 그냥 별로 신경 안 쓰시는 타입이라.”
“그래. 니들이 고생이 참 많아. 잘 돌고. 이거, 학회 관련해서는 따로 시간 만들어서 보자.”
“네, 과장님.”
수혁은 그렇게 말한 후에도 꽤 오랫동안 조태진 등에게 붙들려 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선배!”
물론 그런다고 끝이 아니었다.
강당 앞에는 안대훈과 우하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피곤했지만 그래도 나름 팬클럽을 자처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어, 그래. 오랜만이야. 아, 니들 선물 사 왔어.”
그래서 수혁은 냉장고에 붙이는 자석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참 별거 없는 선물이었지만, 수혁에게는 상당한 의미가 있는 선물이기도 했다.
처음 대학교 들어와서 동기 녀석 집에 놀러 갔을 때, 냉장고에 붙어 있는 각 나라 자석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때부터 자석 모으기가 수혁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가 되었더랬다.
“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둘은 수혁이 아이오와 흙이나 한 움큼씩 쥐여 준다 해도 좋아할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런데 잘 보니까 마냥 기뻐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뭔가 곤란한 말을 꺼내려는 거 같은데요?]
먼저 눈치챈 것은 역시 바루다였다.
“근데 무슨 할 말 있어?”
해서 질문을 던지니, 안대훈이 하윤과 눈을 마주쳤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그……. 좀 이상한 환자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