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전신 위약 (1)
“응? 너 어디 도는데?”
수혁은 왜 하필이면 방금 미국에서 돌아온 자신에게 상의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화 의료원이 어디 조그만 의원은 아니지 않은가.
1년 차인 안대훈 입장에서는 환자에 관해 물어볼 만한 사람이 수두룩 빽빽이었다.
일단 내과 교수님들만 해도 수십을 헤아렸으니까.
“저……. 내분비내과입니다. 서효석 교수님 파트.”
“아.”
하지만 이름을 전해 듣자마자 딱 이해가 됐다.
서효석이라면 감히 묻기가 좀 그랬을 터였다.
그 양반은 의사인 주제에 환자 보기를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지 않은가.
전공의들이 뭐 좀 물어보려고만 하면 왜 알아서 공부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성을 내기 일쑤였다.
“어떤 환잔데?”
수혁은 태화 의료원에 그런 사람이 교수로 있다는 사실에 새삼 좌절하면서 안대훈을 향해 물었다.
안대훈은 미리 준비해 온 종이를 펼쳐 들었다.
보아하니 수혁만 오면 물어보려고 준비를 꽤 단단히 한 듯했다.
종이에는 간간이 이질적인 필체의 메모가 쓰여 있었는데, 그건 우하윤이 써넣은 것으로 보였다.
‘인턴인데 열심이네.’
[수혁이 인턴 땐 거의 틈만 나면 잤던데.]
‘인턴은 원래 그게 정상이야.’
[우하윤은 아닌 거 같은데요?]
‘얘가……. 얘가 이상한 거라고.’
아무튼, 수혁보다 더 노력하거나, 더 똘똘해 보이는 사람만 발견하면 발작하는 바루다였다.
물론 수혁의 얼굴은 잔잔하기만 했다.
이제 이 정도 방해 공작 따위에 흔들릴 그가 아니었다.
바루다와 살아온 지난 세월이 헛된 것이 아니었으니.
“52세 남자 환자인데……. 바로 어제 응급실로 입원했습니다.”
“어제? 일요일인데 용케 서효석 교수님이 받았네?”
“뭐……. 전화드렸는데 받지 않으셔서 문자로 노티 드렸더니 딱 ‘입원’이라고만 답문이 와서요.”
“아.”
역시 개판이었다.
“오늘은 보셨고?”
“아뇨……. 외래 봐야 된다고 그냥 가셨어요.”
“음. 그래.”
수혁은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걸 애써 참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중요한 거는 화내는 게 아니다…….’
일단은 병원에 와서 입원까지 한 환자를 보는 게 중요한 일 아니겠는가.
나중에야 어떻게든 서효석 교수를 좀 끌어내리거나 하긴 해야겠지만.
지금은 전혀 급하지 않은 일이었다.
가능하지도 않았고.
“계속해 봐. 어떤 환자야?”
“네. 고혈압, 당뇨 진단 받은 지 10년 되어서 당뇨에 대해서는 경구혈당강하제 먹고 있고, 고혈압에 대해서는 이뇨제 먹고 있습니다.”
“더 해 봐.”
수혁은 우선 당뇨가 10년이나 됐음에도 불구하고 경구혈당강하제를 먹고 있음에 반쯤은 안심했다.
뭐가 어찌 되었건 아주 심각한 지경으로까지 진행하지는 않았단 뜻이었다.
완전히 안심하지 못한 것은, 간혹 그냥 약만 타는 경우엔 제대로 관리받지 못하는 환자들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아예 관리가 안 되어서 상태가 매우 나쁠 수도 있습니다.]
‘명심할게.’
수혁이 바루다와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안대훈은 계속해서 자신이 적어 둔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원래는 술을 거의 안 드시는 분인데, 내원 2일 전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신 병력이 있습니다. 내원 전일 오전부터 전신에 힘이 떨어지는 증상과 30에서 40회가량의 구토 증세 있었고 이후 전신에 힘이 빠지는 증세 보여서 어제 응급실로 왔습니다.”
“이런 환잔데 얼굴도 안 봤어?”
“네…….”
“음.”
병력에서 어떤 진단명을 떠올리기는 조금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만 30회에서 40회가량의 구토가 무척 심각한 증세라는 건 딱히 의사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사안이지 않은가.
근데 명색이 교수라는 사람이.
그것도 내분비내과 교수라는 사람이 코빼기도 비추지 않을 줄이야.
“환자 어딨지?”
수혁은 자신이라도 일단 가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대훈이나 우하윤이나 비록 열심히 하는 의사긴 하지만.
아직 애송이들 아닌가.
5월 레지던트 1년 차는 사실 인턴이랑 별 다를 게 없다고 보면 되었고.
5월 인턴은 그냥 학생 수준이라고 보면 되었으니까.
“9층 서병동에 있습니다.”
“오케이. 가자.”
“네, 선생님.”
안대훈은 수혁이 별다른 말 없이 환자를 보러 가자고 하자, 더없이 든든한 얼굴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대훈에겐 수혁이 그 어떤 교수보다도 더 믿음직했으니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는 우하윤 또한 비슷한 얼굴이었다.
‘여차하면 아빠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안 물어보길 잘했어.’
그의 아버지, 우창윤 교수는 나름 내분비내과 학회에서 중진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서효석 교수 따위하고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다.
그런데도 직접 환자에 관해 묻지 못한 것은, 그 질문 자체가 태화에 누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서효석이 엉망이라서 태화 내분비내과가 약점이라는 소리가 판을 치고 있는데.
거기서 하윤이 태화에 입원한 환자를 아선에 물으면 어찌 되겠는가.
그야말로 개판 오 분 전이라는 것이 티가 날 터였다.
‘이수혁 선배라면……. 반드시 치료해 주실 거야.’
하윤이 수혁을 향한 믿음으로 미소 짓는 사이, 수혁은 대훈에게 계속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키랑 몸무게는?”
“178에 78kg 입니다. 건장한 체격이에요.”
“그럼 만성적인 원인일 가능성은 좀 떨어지는데.”
아주 간단한 정보들뿐이었지만.
거기서 뻗어 나가는 수혁의 유추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혈압은 내원 당시에 78에 68이었고……. 심장박동 수는 분당 155회였습니다.”
“155회? 부정맥 소견은 없었어?
“네. 그냥 빈맥이었습니다.”
“그냥 빈맥? 이상한데? 다 온 거지?”
“네.”
“빨리 가 보자.”
“네, 선생님.”
수혁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어디 환자가 한 바퀴 뛰고 왔다면 모를까.
안정 상태에서 155회는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벌컥.
그렇게 들어선 병실엔 거의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환자가 침대 상부를 높인 채 누워 있었다.
아예 의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명료한 것도 아니었다.
[알코올에 의한 급성 중독 가능성이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증상이 오래가는군요.]
바루다는 환자의 현재 상태를 보자마자 일단 가능했던 진단명 하나를 지웠다.
녀석의 말대로 알코올에 의한 급성 중독에서도 이 비슷한 증세를 나타낼 수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응급실에 온 이래로 계속 수액을 부었을 텐데 여전히 이런 상태인 것은 설명할 수 없었다.
“일단 심전도 찍어 보자. 환자분 여기 어딘 줄 알겠어요?”
수혁은 대훈과 하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동시에 환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환자는 숨이 워낙 찬 데다가, 의식도 명료하지 못해서 제대로 된 답을 하진 않았다.
[돌팔이 1년 차가 환자 잡게 생겼군요…….]
바루다는 영 한심하다는 눈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혁 또한 비슷한 생각이 들었지만, 적어도 대훈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대학 병원 좋은 게 다 뭐란 말인가.
백이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근데 제일 위에 있는 서효석이 도망갔으니 그게 제대로 될 턱이 없었다.
“대훈아, 일단 인투베이션(Intubation: 삽관)부터 해야겠다. 이 정도 숨찬 건……. 산소만 줘서 될 게 아냐.”
“아, 네. 준비는 해 뒀습니다.”
“좋아. 그냥 바로 근이완제 줘.”
“아……. 바로요?”
“그래. 내가 넣을 테니까, 걱정 말고 로큐 줘.”
“네, 선생님.”
대훈은 잠시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자신만만해 보이는 수혁을 마주하고는 이내 로큐론을 환자의 수액 라인에 흘려 넣었다.
‘그래. 이수혁 선생님은……. 그냥 머리만 좋은 게 아냐.’
내과 의사로서 해야만 하는 여러 술기의 달인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삽관은 더 훌륭한 수준이었다.
[그래, 거기. 아니, 아휴. 그냥 확 내가 할 수도 없고, 이거.]
‘무서운 말하지 말고. 정확하게 표현해. 방향이랑 거리까지.’
[앓느니 죽지……. 그래요. 우측으로 1cm. 그래, 거기. 그렇게.]
물론 수혁의 능력만으로 쑥쑥 집어넣는 건 결코 아니었다.
거의 시야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삽관하려면 바루다의 조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쑥.
아무튼, 곧 삽관이 되었고 환자의 분당 호흡수가 눈에 띄게 개선되기 시작했다.
수혁은 제대로 들어간 것까지 확인한 후 대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대훈아. 이게……. 산소 포화도가 괜찮다고 호흡이 좋은 게 아냐.”
“아……. 그럼…….”
“분당 호흡수가 25회를 넘어갔잖아. 갈비뼈 사이 근도 들락날락하고. 이러다가 훅 가는 거라고. 지금도 아마 한 1시간만 늦었어도 환자 어레스트 났을 걸?”
“아,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지금 배웠으니까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수혁은 그렇게 말하면서 재차 환자를 돌아보았다.
아깐 호흡이 급해서 제대로 보지 못하지 않았던가.
이제 호흡은 잡았으니, 더욱 찬찬히 환자를 들여다볼 작정이었다.
‘일단 폐음이 별로야.’
[네. 양측 모두 탁음이 들립니다.]
‘폐렴일까?’
[아뇨. 데이터 분석을 해 보면……. 이런 종류의 소리는 주로 폐부종에서 들렸습니다.]
‘폐부종이라……. 그럼 심장 쪽이 원인인가?’
[심전도 확인을 다시 한번 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환자가 구토를 한 병력이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흡인성 폐렴이 생겼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습니다.]
‘아 맞네. 구토를 했지.’
구토의 원인도 물론 어떻게든 파헤쳐 봐야 하겠지만.
구토의 결과도 생각해 봐야 했다.
비단 흡인성 폐렴뿐만 아니라, 전해질 불균형 또한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심전도는 어때? 그리고 어제 나간 혈액 검사 결과 있으면 띄워 봐. 싹 긁기는 한 거지?”
“네. 불안해서 그냥 다 긁었습니다.”
“그래, 잘했어. 심전도 찍어.”
“네.”
제일 좋은 건 딱 필요한 검사만 하는 것이었다.
그게 당연히 비용 효과 면에서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의학에서는 그게 반드시 옳지는 않았다.
여기서 모자라게 검사했을 때 감수해야 할 위험은 생명이었으니까.
차라리 얼마간 금전적인 손해를 보는 것이 훨씬 나았다.
[혈당이 300으로 올라가 있고……. 백혈구 수치도 높군요. 다행히 전해질은 크게 흔들리지는 않았어요. 오전에 나간 거에는 교정이 되어 있습니다.]
‘감염에 의한 건가?’
[소견 자체는 그렇게 보이는데……. 이상하네요. 이렇게까지 극심한 감염이 갑자기 올 수도 있는 건가?]
‘가능성은 열어 둬야지.’
수혁이 긴가민가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쯤, 대훈이 심전도 결과를 뽑아냈다.
전달을 받아 보니, 당연하게도 단순한 빈맥은 아니었다.
“대훈아…….”
딱 보자마자 탄식이 흘러나왔다.
“네, 선생님.”
“환자 심전도……. 이상하잖아. 일단 심초음파 해 봐야 해. 초음파 기기 끌고 와.”
“아, 네.”
대훈은 수혁의 말을 듣자마자 밖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수혁의 고개라 하윤과 따라 들어와 있던 담당 간호사를 향했다.
그리곤 지금껏 파악한 상태에 대한 처방을 남김없이 쏟아 냈다.
“일단 승압제, 강심제 투약하고……. 어딘진 모르겠지만 감염 의심되는 상황이니까 지금 들어가는 항생제에 레보 추가. 혹시 아직 혈액 배양 검사 안 나갔으면 지금 나가고. 요량 체크 15분마다 해 줘요. 심장 반응 없으면 에크모 받아야 되니까 연락은 해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