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이 골절은 이상합니다 (1)
“하.”
수혁은 잠시 한숨을 쉬었다.
자기 환자 뺏기기 싫어하는 최낙필 과장에게서 환자를 뺏어다가, 환자 보기 싫어하는 서효석 교수에게 환자를 주어야 하는 입장이지 않은가.
여기서 한숨이 나오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일단 저지르고 생각하시죠.]
‘일단 저지르라고? 그러다가 병원에서 쫓겨나 인마!’
[아뇨? 절대 안 쫓겨날 걸요? 수혁이 일반 레지던트라면야 뭐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아시잖아요, 수혁도. 수혁은 이제 완전 로얄입니다.]
‘음.’
[어차피 최낙필 교수 오늘 안에 수술실에서 못 나옵니다. 아까 봤잖아요?]
‘하긴. 음.’
바루다의 말에 수혁은 가만히 아까 협진 보러 오기 전 봤던 수술장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수혁의 머리 안에 박힌 바루다는 비록 제거하지 못한 사람이지만.
또한, 인성도 그렇게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효석과는 달리 최낙필은 당당히 태화 의료원의 신경외과 과장 자리를 꿰찰 정도로 실력 있는 교수였다.
‘두개저 종양이었지? 이비인후과랑 조인에서 수술하는.’
[네. 뭐……. 12시는 넘어야 끝날 겁니다. 그 안에 전과시키시죠. 레지던트는 좋아할걸요? 어차피 협진도 냈겠다. 게다가 최낙필은 머린데 이 사람은 허리잖아요. 안에서도 아마 다른 교수한테 보낼 생각 있을 걸요.]
바루다의 말은 아주 달콤하고도 설득력이 있었다.
이미 이 환자가 대체 어떤 병을 가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극에 달한 수혁으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서효석 교수님은? 그 사람은 어쩌지?’
[어차피 회진 돌러 오지도 않는데요, 뭐. 수혁이 질문이라도 하지 않은 이상 자기 환자 누구 있는지도 모를 겁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아니, 말도 안 되는 얘기여야 했다.
그런데 말이 됐다.
상대는 그 서효석였으니.
‘그럴싸한데?’
게다가 수혁은 적어도 서효석에게만큼은 아무것도 묻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발칙한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서효석보다는 더 나은 의사가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뭘 망설이십니까.]
‘오케이. 알았어. 음. 그래. 일단 저질러 보자.’
그래서 수혁은 흠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환자를 돌아보았다.
환자는 느닷없이 찾아온 내과 의사가 뭐 좀 진료를 하나 싶더니만 한참 허공을 응시하고 있어서 좀 무섭던 참이었다.
따라서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살짝 몸을 뒤로 움직였다.
“아야.”
통증 때문에 쉽진 않았지만.
“저, 환자분. 김다현 환자분.”
“어, 네.”
“제가 오늘 찍은 엑스레이를 보니까…… 역시 신경외과적인 골절은 아닌 거 같아요.”
“네? 아, 그럼 정형외과로 가나요?”
우리나라처럼 의료 접근성이 좋은 나라도 드물 터였다.
덕분에 대다수 사람이 대략적으로라도 어떤 과가 어떤 병을 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틀렸다.
골절 자체에 대한 치료는 골반뼈의 골절이 관찰되느니만큼 당연히 정형외과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 있겠지만.
수혁이나 바루다가 판단하기에 수술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이 다발성 골절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알아봐야만 했다.
[암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다발성 골수종을 의심해야만 했다.
이놈은 뼈를 쥐 파먹으면서 골절을 일으키는 병이었으니까.
물론 엑스레이 소견이 좀 다르긴 했지만.
원인 모를 다발성 골절이 있는 상황에서 이 질환을 빼먹는 건 일종의 의료사고였다.
“아, 아뇨. 일단 내과적인 원인이 의심됩니다.”
“내…… 과요?”
당연하게도 환자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골절인데 내과라니.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네. 환자분은 분명 어디 부딪친 적이 없었다고 했죠?”
“아, 네. 저……. 뭐 어디 그렇게 많이 다니지도 않아요.”
“그런데 명백한 골절 라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골절 부위는 사실 외상으로는 잘 안 생기는 부위입니다.”
“아.”
“따라서 무언가 뼈를 골절시키는 내부 원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그게 뭔데요?”
“그건 이제부터 내과로 오시면 저희가 찾아봐야죠.”
“아…….”
하지만 수혁은 원체 말을 잘하는 인간 아니던가.
게다가 표정이나 말투 또한 이제는 상당히 발전해 있었다.
환자로서는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제가 반드시 찾아서 교정해 드리겠습니다.”
“어, 근데 그냥 이렇게 가요? 교수님 인사도 안 하고?”
“입원 어제 했는데, 어제 한번 봤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그건 그래요.”
김다현 환자는 큰 눈을 도로록 굴렸다.
교수 얼굴도 한번 봤지만, 그 밑에 주치의 얼굴도 어제 보고 감감무소식이었다.
신경외과라는 곳이 워낙 바쁜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심할 줄은 몰랐더랬다.
‘내과가 여기보단 낫겠지…….’
덕분에 환자의 마음은 상당히 기울었다.
“저는 매일 적어도 두 번은 볼 수 있을 거예요. 무조건 원인을 찾아서 치료해드리겠습니다.”
게다가 눈앞의 수혁은 상당히 어려 보이긴 했지만,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최낙필에 비교할 바는 아니어도 주치의보다는 훨씬 나아 보였다.
듣다 보니 내과 질환이 맞는 거 같기도 했고.
“어……. 알겠어요. 그럼 뭐…….”
더군다나 내심 신경외과랑은 이미 얘기가 되었겠거니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 않는다면 좀 이상한 얘기 아니겠는가.
물론 진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마당이었지만.
환자로서는 미처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수술실이죠?”
그사이 수혁은 병실을 잠시 벗어나 전화를 걸었다.
“네, 13번 방입니다. 무슨 일이시죠?”
전화를 받은 수술실 간호사의 목소리는 그리 좋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13번 방에서 하는 수술은 무려 10cm이 넘는 두개저 종양에 대한 수술이었으니까.
아마 접근하는 데만 해도 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을 터였다.
그러한 사실을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는 수혁은 정말 다 알고 있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내과 2년 차 이수혁입니다.”
“아……. 이수혁 선생님. 안녕하세요.”
간호사는 수혁의 이름을 듣자마자 태도를 싹 바꾸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살벌하고 바쁜 수술실에 웬 놈이 전화를 걸었냐는 말투였다고 한다면.
지금은 거의 교수에 준하는 대우를 하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수혁도 좀 당황했을 테지만.
이젠 이런 특별 대우에 익숙해진 상황이었다.
“네. 혹시 강도형 선생님 전화 가능한가요?”
“아……. 지금 강 선생님 보조 중인데요.”
“전화기 가져다 대 줄 수는 있어요? 협진 낸 환자 때문에요.”
“잠시만요.”
간호사는 수화기를 든 채 수술실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성질 더러운 최낙필은 팔짱을 끼고 옆으로 비킨 상황이었다.
눈은 수술 부위에서 한 시도 떼고 있진 않았지만.
아무튼, 지금은 이비인후과 쪽에서 수술 부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이비인후과 교수는 최낙필에 비하면 거의 천사인지라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게다가 강도형은 아무래도 신경외과 레지던트라 제1보조의가 아니라, 2보조를 맡고 있었다.
그저 당기고 있단 뜻이었다.
“저 선생님. 전화 왔는데요. 내과 협진 때문에요.”
“아, 네.”
강도형은 그렇지 않아도 어제 낸 협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리고 그 협진이 어지간해서는 답신이 오지 않는 내분비내과 쪽 협진이었다는 것 또한 기억해 냈다.
그래서 살짝 이비인후과 교수와 최낙필 과장의 눈치를 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이비인후과 이낙준은 천사라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허락을 해 주었다.
“전화 받았습니다. 신경외과 1년 차 강도형입니다.”
“아, 저 내과 2년 차 이수혁입니다. 협진 주신 김다현 환자 때문에요.”
“아아, 네 선생님.”
동기 중에는 수혁을 질투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하나만 아래로 내려가도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로열에 똑똑하지, 어지간하면 환자도 잘 봐주지.
이런 위 연차가 세상천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환자 제가 보니까……. 골절이 다발성으로 있어요.”
“네? 다발성……. 아, 네.”
강도형은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다가 최낙필의 눈치를 보고 훅 깔았다.
그동안에도 수혁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내과 쪽 원인일 가능성이 매우 커 보여요. 전과 받아서 보겠습니다.”
“어, 전과……. 그…….”
“왜요?”
“아뇨. 음.”
강도형은 슬쩍 최낙필 쪽을 바라보았다.
성질이 더러운 편이라, 평소 1년 차한테는 인사도 잘 받아 주지 않는 위인이었다.
본격적으로 머리 쪽 수술이 시작되면 3년 차나 4년 차가 들어오겠지만.
지금은 여기 신경외과 레지던트라고는 자기 혼자였다.
‘시발 어쩌지?’
당연히 고민이 되었다.
물어보면 간단할 문제였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평소 최낙필 과장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다들 그러할 터였다.
“거, 신경외과 선생. 이제 슬슬 집중해 줬으면 좋겠는데.”
고민을 더 이어 나갈 수도 없었다.
천사로 소문난 이낙준 교수마저도 이제는 안 되겠다고 판단을 내린 탓이었다.
“어……. 네. 아,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넘기겠습니다. 네.”
그래서 강도형은 어영부영 넘기고 말았다.
왜 머리를 보는 최낙필이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를 받았을까에 대한 고민은 해보지도 못했다.
“자, 여기 당겨 줘요.”
“네.”
물론 김다현 환자에 대한 생각 자체도 오래 가지 못했다.
수술 외에 다른 생각을 하기엔 지금 이 환자 수술이 너무 어려웠다.
교수들도 쩔쩔매고 있는데, 1년 차가 어떻게 마음 편히 있을 수 있겠는가.
‘전과하래. 간호사한테 말해서 받으면 되겠네.’
[네, 그럼 그렇게 하시죠. 넘어오는 즉시 처방을 좀 내 봅시다.]
‘뭐 뭐 내지?’
[일단 수혁의 의견을 들어 보죠.]
바루다는 즉각 답변을 주는 대신 수혁의 의견을 물었다.
약간 교육받는 느낌이긴 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어차피 바루다에 100% 의존해서는 절대 세계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없을 테니까.
솔직히 말하면 언제까지 머릿속에 있는 바루다가 제대로 작동해 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고.
그래서 수혁은 상당히 협조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읊어댔다.
‘일단 피검사 긁어 봐야지. 이게 파골이 되는 건지……. 뭔지 알려면.’
[그렇죠. 그리고?]
‘엑스레이에서는 골절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부위가 너무 많아. 본 스캔을 해 봐야 해.’
[좋군요. 또?]
‘뭐……. 영상에서 어지간하면 보이긴 하겠지만. 이비인후과에 의뢰해서 편도선 포함한 검진을 받아보는 게 좋겠지.’
[임파암까지. 세심하군요, 수혁.]
바루다는 진심으로 감복했단 얼굴이었다.
워낙 깐족대던 놈이라 이게 진심인지 뭔지 좀 헷갈리긴 했지만.
‘넌 뭐 추가할 거 없어?’
[없습니다. 결과를 보면서 추가하도록 하죠.]
‘좋아. 가 보자.’
[네.]